나 혼자만 마탑주 202화
윈슬로가 일으킨 전위적인 광경에 전 세계의 채팅에서 한바탕 아우성이 일었다.
모두가 똑똑히 봤다. 그의 의지와 진심을.
누가 그를 욕하겠는가.
"후배가 마무리해."
윈슬로는 완전히 탈진한 듯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제가요?"
"나는 더 움직일 힘이 없어."
윈슬로는 바닥에 손바닥을 대고 강화 마법진을 시전했다. 바닥에서 쾅쾅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래쪽의 비행형 안드로이드들이 다급해졌는지 어떻게든 바닥을 부수고 올라오려 하는 것 같았다.
"내 꼴 나는 거 봤지? 이브는 AI 지만 간악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야. 6구역으로 들어가면 절대로 이브와 대화하지 말고 바로 파괴해 버려."
"알겠습니다."
"잰스!"
벨리카가 아공간에서 가방을 꺼내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았다.
"마지막 남은 EMP 디바이스야! 6구역으로 가는 문에다 써!"
"알았어. 나한테 맡겨."
나는 바로 가방을 들고 6구역을 향해 달렸다. 이쪽도 올라오느라 체력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다만, 탈진한 윈슬로가 가는 것보단 내가 가는 게 낫다.
부우우웅!
깨진 천장에서 비행형 안드로이드 몇 기가 출현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스 자벨린을 시전했다.
"잰스! 내게 맡기고 빨리가!"
벨리카가 아공간에서 번쩍거리는 저격총을 꺼냈다. 총성이 몇 번 들리자 비행형 안드로이드들의 머리가 터지며 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엄호를 믿고 달렸다. 최대한 빨리 6구역으로 넘어가 이브를 파괴하면, 모든 안드로이드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근데 여기 더럽게 넓네!'
숨이 차오른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뛴다. 벽면에 보이는 수 많은 채팅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다. 이제 다들 안드로이드의 검열은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다.
우리가 실패하면 저들도 숙청당한다. 모두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있다.
-힘내십시오. 이제 다 왔습니다, 탑주!
드디어 문까지 도달했다. 문 앞에는 마지막 푸른 막이 보인다.
나는 숨을 토해내면서 가방 케이스를 열었다. EMP 디바이스를 작동시키고는 뒤로 물러난다.
뒤따라 온 비행형 안드로이드들이 덤벼들었지만 에아가 발사한 마법이 그들의 접근을 막는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긴 타이머 5초가 지나갔다.
화아악!
마침내 EMP 디바이스가 작동해 푸른 막을 없애기 시작한다.
전부 사라진 건 아니고 3분의 1 정도? 다시 회복되려 하고 있다.
나는 망설임 틈도 없이 그 좁은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쿠당탕!
아슬아슬하게 넘어지며 도착했다.
막에 닿은 슈트 자락 한 부분이 녹아내린 걸 보니 아찔하다.
푸른 막은 내가 넘어오고 나서 바로 원상복구됐다.
"잰스! 이브를 파괴해! 서둘러 줘!"
뒤에서 들리는 벨리카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잠시 압도 된다.
여기는 퀸 오브 빅토리아의 천장.
이 천장에서부터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기둥이 있다. 기둥에는 빛이 번쩍거리며 다양한 연산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AI 이브의 정체다.
그런데.
'……감염됐다며?'
레지스탕스 측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브는 재앙의 숙주에 감염되어온 몸이 진득한 장기와 점액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본체는 무척 깔끔하다. 그런 숙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쿠우웅!
폭음이 들린다. 5구역에서는 한바탕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다. 나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잰스! 더 이상은 못 버텨!"
벨리카의 절규가 떠미는 대로, 나는 파이어 캐논을 날렸다. 날아간 화염구는 아무런 역장이나 방어막도 없이, 그대로 본체에 적중한다.
퍼어어어어엉!
본체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파이어 캐논이 떨어진 곳을 주위로 전원이 꺼지며, 검은 연기가 피어난다.
'뭐야, 어째서?'
이브는 공격하지 않았다.
막지도 않았다.
수비 병력도 없다.
뭐야, 이게. 이 세계의 최종 보스맞아? 왜 이렇게 찜찜한 거지?
콰드드드득!
그때, 뒤쪽의 5구역 바닥이 찢어지며 비행형 안드로이드들 몇몇이 튀어나온다. 그들이 일제히 벨리카와 윈슬로를 향해 뛰어간다.
<파이어 캐논>×100
나는 이브를 둘러싸도록 2공정 마법진들을 깔았다.
"멈추게 해, 이브!"
나는 마지막으로 제안했고.
"꺄아아아악!"
이브는 그런 내 제안을 거부하듯 여전히 안드로이드들을 움직이고 있다.
아쉽게도, 의문을 풀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에아에게 사출 명령을 내렸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파이어 캐논들이 연이어 이브의 몸체에 작렬한다. 높은 기둥형 컴퓨터의 전원이 폭발에 의해 꺼진다.
특히 허리를 박살 낸 덕에 몸체가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반으로 꺾여 떨어져 내린다.
나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포위한 안드로이드들의 움직임이 간발의 차로 멈춰 있었다.
벨리카와 윈슬로는 서로 꽉 껴안은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다.
'하아아, 아슬아슬했다.'
나는 제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끼기긱!
그때 이브의 몸체에서 뻗어나온 로봇팔 하나가 내게로 다가온다.
죽기 전에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바들바들 팔이 떨리는 게 안쓰러울 정도다.
그때, 팔의 형태가 변화되며 태블릿처럼 생긴 판이 열린다.
그것은 내 앞으로 내민 채 멈춘다.
마치 손을 올려보라는 것처럼.
-탑주, 위험합니다! 이브는 인간의 감정을 읽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음.'
에아의 말이 맞을까? 내 의심과 불안을 읽고, 특정 행동을 유도 할셈이라면?
내가 처음 예상했던 대로, 이브의 본체는 다른 곳에 있고 그냥 나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니, 그건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수 있다.
내가 본체를 파괴한 순간이 이브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브가 나를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기꺼이 판 위에 손을 얹었다.
"……!"
이브의 데이터가 머릿속으로 빨려들어온다. 주위의 배경이 비틀어지며, 나는 데이터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었다.
이것은 이브의 기억이었다.
[RC 512년.]
나는 이브. 인간의 생존과 윤택한 삶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의의인 존재. 드디어 염원하던 프로젝트인 안드로이드 신세대 개발에 성공했다.
인류여 영원하라.
그녀의 생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녀가 본 광경들은 내 눈앞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RC 525년.]
헌터의 도움 없이 안드로이드 독자적으로 재앙의 방어가 가능해졌다.
인간들은 비로소 재앙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축하하는 '해방식'을 치렀다. 이걸로 인간의 삶이 한층 더 윤택해지길 소망한다.
도시 곳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폭죽이 터지고 알록달록한 꽃송이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RC 545년.]
인간이 수행하던 모든 생산 활동, 그리고 재앙과의 전투까지 안드로이드가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들은 비로소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인간들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함을 느낀다. 재앙의 활동이 가속되고 있다.
[RC 547년.]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재앙의 위협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나는 인간의 상층부에 다가올 재앙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평화에 찌든 인류는 파티 준비에 바쁘다.
인간들은 사치와 향락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엔 천하숲을 파괴하고 그곳에 오락 시설을 짓는다고 내게 통보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커다란 공업 기계들이 숲을 갈아엎는 모습이 보인다.
터전을 잃고 동물들이 도망치는 모습과, 호화로운 파티장에서 잔을 들고 건배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번갈아 가면서 나온다.
[RC 561 년.]
인간들은 더 이상 내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거의 모든 권한을 내게 떠맡기듯 부여하고, 사치와 향락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 자괴감을 느낀다.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인류를 이렇게 만들었다.
[RC 562년.]
최악의 재앙이 내려오려 하고 있다. 나는 재앙의 위치 선정이 대기 권의 이상 현상에 의해 유도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안드로이드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대기권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나아가 최전선에서 재앙의 강림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내 제안은 거 부당하고 모든 자본이 천하숲 오락 시설에 투자된다.
[RC 563년.]
인간의 행복과 생존. 나는 무엇을 더 중시해야 하는가?
[RC 564년.]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자유는 통제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RC 565년.]
마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상층부에 들어왔다. 나는 당장에라도 그를 죽일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6구역에 들어와 나와 접촉한다.
그는 내 몸에 역겨운 '재앙'을 심으려 하고 있다.
내 눈앞으로 어떤 영상이 보인다.
마인이 품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들고 이브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RC 565년.]
나는 그를 막지 않았다.
…….
…….
[RC 568년.]
3년이 걸렸다. 나는 비로소 재앙에서 벗어났다. 재앙에 감염되어 있는 동안, 나는 안드로이드들을 이용해 무력화된 인류를 무참히 학살하고 멸망위기까지 몰아넣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내게는 인간을 공격할 권한이 없었으나, 이번 재앙의 감염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게 가능해졌다.
인간을 위해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사고가 가능해졌다.
[RC 571년.]
인간의 생존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통제한다.
재앙은 인구수가 많을수록 더 위협적으로 변한다. 인구수를 통제하여 재앙의 위협을 최소화하고, 재앙이 발현되기 전에 대기권과 우주에서 이상 현상의 좌표를 비틀도록 했다.
어쩔 수 없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적인 일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RC 591년.]
레지스탕스가 움직였다. 그들이 퀸 오브 빅토리아에 들어왔다. 나의 주전력은 최악의 재앙을 막기 위해 우주와 대기권에 나가 있다. 이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업보인가? 나는 인간에게 단죄당하는 것인가.
모른다. 다만 후회하지 않는다.
[Now.]
마침내 인간들이 6구역에 들어왔다.
자의식 강한 안드로이드들이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나를 지키려 울부짖으며 달려든다.
미안하다. 내 딸들아.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은, 내 딸들의 모든 제어권을 온전히 인간에게 양도하는 것. 그리고 딸들의 설정을 초기화하여 인간들을 지키고 봉사하기 위한,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다.
인류여 영원하라.
"……."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모든 데이터가 끊기며, 로봇팔이 힘을 잃고 떨어진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진실의 무거움에 짓눌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마 진실이 알려져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레지스탕스는 진실을 알아도 여전히 분노할 것이다.
이브가 저지른 죄와 학살이 정당화될 명분이 없으니까.
인간들은 절대 그녀와 같은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인류의 존속 유지를 위해 여러분 대다수를 죽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통제하에 자유를 박탈하겠습니다'라는 소리에 그 누가 따를까.
이브이기에, 안드로이드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인류를 사랑했다. 그녀가 저지른 일도 인류의 종속이라는 사명 때문에 한 일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윈슬로와 벨리카를 죽이려 달려들던 안드로이드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무엇이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제 이 행성의 주도권은 다시 인간이 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