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97화
우리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을 쓰러뜨리며 학교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쪽이야!"
처음에 학교로 들어온 정문 쪽이 아닌, 후문 쪽의 숲으로 달렸다. 그녀는 달리면서도 정확한 사격으로 안드로이드들을 박살 내고 있었다.
"벨리카. 저기 벽 뒤에 안드로이드 다섯."
"뭐?"
"내가 봤어."
정확히는 에아가 이야기해 준 거지만 말이다.
그녀는 수상쩍어하는 눈으로 나를 보면서도 허공에 손을 뻗었다. 허공에 녹색 공간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폭탄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저거 설마?'
그녀가 손에 든 폭탄을 던졌다. 그것은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건물 뒤편에서 폭발했다.
파지지지직!
이질적인 푸른 전류가 일어나 안드로이드 다섯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바로 달려나가서 무력화된 안드로이드들을 총으로 쏴 제거했다.
나는 데바의 눈과 에아의 탐지 마법으로 안드로이드들을 감지하고는 말했다.
"좌우에서 계속 온다."
"아, 미치겠네! 진짜 "
벨리카는 내 쪽으로 권총을 휙 던졌다.
"쏠 수 있지?"
"내가 또 목동 사격장 만발 여포지."
"……뭔 개소리야? 아무튼 자기 몸 정도는 스스로 지켜!"
우리는 총을 쏘면서 몰려드는 안드로이드들의 공세를 피해 도망쳤다.
'저기 한 놈 발견!'
안드로이드 하나가 애꿎은 곳을 조준한 채 등을 보이고 있다. 바로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과연 미래시대 총인가, 놀랄 만큼 반동이 없어서 쾌적한 사격이 가능했다.
탕!
그런데 놈은 멀쩡하다. 나는 재차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거 불량인가? 왜 안 맞지?
-탑주. 사격 실력이 기적에 가까우십니다. 못 맞추는 쪽으로요.
'이럴 리가 없는데.'
내 위치를 확인한 안드로이드가 즉시 반격했다.
놈의 총알이 에아의 쉴드에 막혀떨어졌지만, 동시에 내 자존감도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바로 레피드 에로우를 소환해서 놈의 머리통에 꽂아 넣어줬다. 역시 명중 보정이 있는 마법이 최고다.
"하아! 하아!"
벨리카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무 대응이 빨라! 숲에 안드로이드들이 쫙 깔려 있어!"
"우리가 이리로 올 거란 걸 알고 있었나 보네."
퍽! 퍽!
바닥에 총탄이 박히자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제대로 잠입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그녀가 재빠른 반격으로 안드로이드 두 기를 잡고는 나를 째려보았다.
"다 너 때문이잖아!"
"미안하게 됐다."
나도 그녀를 따라 하듯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조준 사격을 했지만, 안드로이드는 멀쩡했다.
총알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겠다.
"이 새끼 존X 못 쏴! 목장 뭐시기라며!"
"감이 녹슬어서 그래!"
안드로이드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 그녀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벨리카. 우리 진실게임 할까?"
"너 진짜 대갈빡에 총 맞았냐?"
"나 먼저 할게. 너 마탑의 1층 관리자지?"
그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어떻게 그걸?"
역시나 그랬다.
수납공간도 별로 없는 교복에서 총이나 탄알집, 폭탄이 나타나는 건 1층의 아공간을 쓰는 거였고, 아까 폭탄을 던질 때 휘어지는 것도 '포션 스윙' 특성의 효과다. 폭탄이 아니라 포션의 일종이었겠지.
벨리카야 말로 이 세계의 마탑주와 연결된 키였다. 제대로 찾았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안드로이드들이 거리를 좁혀온다.
나는 당황하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꽉 잡아."
즉시 벨리카를 훌쩍 안아 들고는 옆으로 내달렸다. 총알이 마구 쏟아진다.
"뭐야 뭐야 뭐야! 뭐 하는 거야!"
벨리카가 깜짝 놀라 소리친다. 나는 허공에 쉴드로 계단을 만들고 뛰어오른다.
총탄이 빗발쳤지만, 에아의 쉴드가 빈틈없이 우리를 보호한다.
-총탄의 구도로 타겟 위치 확인.
'돌려주자.'
<레피드 에로우>
내 몸 주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총알이 쏟아지는 양의 수십 배가 넘는 화살들이 날아간다.
숲 곳곳에 숨은 안드로이드들의 가슴과 머리에 화살에 박히며 쓰러져간다.
나는 쉴드를 디디며 달리다가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꺄아아아악!"
벨리카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목을 꽉 끌어안았다.
바로 두 다리 밑으로 쿠션 쉴드를 쳐서 충격을 감소시키고는 쉴드에 발을 디뎠다.
"이제 눈 떠도 돼."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어디로 가면 돼?"
"저, 저기 절벽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허공에 쉴드를 펼치고 내달렸다.
"……진실게임이랬지?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세계에서 온 마탑주."
* * *
나와 벨리카는 작고 비좁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낀 오래된 바 같은 곳이었다.
온통 날아다니는 미래 시대 시설들만 보다 보니, 이런 올드풍 분위기는 신선했다.
"이, 이쪽입니다. 잰스 님."
벨리카가 바의 뒤편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내가 마탑주라는 것을 밝힌 뒤로, 그녀는 급격히 공손해졌다.
자기가 잰스 님이라고 불러놓고선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어쩐지 웃겼다.
"애쓰지 말고 그냥 편하게 불러. 내가 마탑주라고 해서 너희 세계의 마탑주는 아니잖아."
그 말에 그녀가 반색을 했다.
"진짜요? 그럼 알았어. 바보 잰스."
"……편하게 부르라는 게 막 대하란 소린 아니었는데."
"쩨쩨하게 굴지 마. 딱 보니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자, 여기야."
마법처리가 된 듯 나무벽이 회전하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어디로 가는 거야?"
"후후, 가보면 알아."
벨리카와 함께 계단을 모두 내려오니 작은 마법진이 보였다. 나도 잘 알고 있는 마법진이다.
'워프게이트!'
갑자기 가슴이 뛴다. 시행착오가 조금 있었지만 드디어 진짜 이 세계의 마탑주를 만날 수 있게 됐구나.
우리는 함께 마법진을 밟았다.
우웅!
발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배경이 바뀌었다.
'오, 여기는……!'
틀림없다. 마탑 안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제1층 포션조제국.
다른 세계의 마탑주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내 마탑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1층의 상징이었던 황금 로비는 보이지 않고, 그냥 오래된 고대 건축물이었다.
'뭔가 증권가 시장에 온 느낌인데.'
책상 앞에 빽빽하게 자리한 사람들이 정신없이 홀로그램 좌판을 두들기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럼주 냄새, 담배 냄새가 짙게 풍긴다.
"여기가 우리 마탑이야. 레지스탕스의 본진이지."
"레지스탕스?"
"그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인간들의 모임."
시대가 이렇다 보니 마탑이 반란군이 됐구나.
하긴, 반란군의 아지트로는 이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마탑 안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니까.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와, 깜짝이야.
갑자기 허공에서 배불뚝이 아줌마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옆으로 요염하게 누운 자세로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벨리카는 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른 세계의 마탑주? 음, 그러고 보니 우리 자기가 말한 적이 있는 것도 같고."
이 사람은 누구고, 우리 자기는 또 뭐야? 하늘에 떠 있는 건 고유 능력인가?
"아, 소개가 늦었네. 이 분이 바로 관리자 호문쿨루스 엔릴 님이야."
호문쿨루스! 나는 충격 받은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에아. 네 선배님이시란다.'
-어, 음……네.
같은 호문쿨루스 맞나?
권태에 찌든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허벅지를 박박 긁고 있는 그녀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에아와는 정반대였다.
1층 관리자인 벨리카가 깍듯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적당히 분위기를 맞췄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오홍홍! 예의 바른 총각이네."
엔릴이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잠시 말을 멈췄다.
"오, 우리 자기가 한번 보자고 하네. 9층으로 올라 가 봐."
"감사합니다."
"이쪽이야. 잰스."
벨리카는 나를 마법진 엘리베이터앞까지 안내해 주었다.
"먼저 올라가 봐. 나는 9층에는 못 올라가거든."
"응? 관리잔데도 못 올라가는 거야?"
"당연하지! 위대한 마탑주님의 층이잖아! 9층에 마음대로 올라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엔릴 님뿐이야."
참고로 말하자면 내 9층은 심심하면 멤버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같이 컵라면이나 먹는 직원 휴게실 같은 공간이 되어 있었다.
'……에아. 내가 그렇게 위엄이 떨어지나?'
-리더의 분위기 차이겠죠. 저는 모두와 친근하고 평등한 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하는 탑주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흑흑. 역시 너밖에 없다.
"그럼 올라 가볼게."
"이따 봐. 잰스. 그, 그리고."
"뭐 또 할 말 있어?"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나를 힐끔거렸다.
"아까는 구해줘서 고맙…… 꺄야악! 몰라!"
그녀는 그 말만 내뱉고 도망쳤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레지스탕스 아저씨들이 껄껄껄 웃어댔다.
'방금 꺄야악은 확실히 진보라 같네.'
사실 분석해 보자면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다.
내가 아는 진보라는 이성 앞에서의 부끄러움조차 이용해 먹는 영악한 여우과다.
아무튼 나는 엘리베이터를 밟고, 허공에 떠오르는 버튼 중 9층을 능숙하게 눌렀다. 순식간에 내 몸이 9층에 도달했다.
나도 모르게 코를 잡았다. 술 지린 내가 진동했다. 주위에는 온갖 인스턴트 음식 봉지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미래판 리빙필드냐.'
나는 코를 막은 손을 풀며 심호흡을 했다.
"대선배님! 계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9층 구조는 내가 알던 마탑주의 방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밖에 보이는 광경이 서울 야경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있다. 위치상 내가 있던 폴리스라는 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장소까지 온 것 같다.
'그건 그렇다 치고, 헛구역질 나는 광경이네.'
징그러운 몬스터들과 싸우고, 탄자 니아에서는 리빙필드도 보면서 비위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진짜로 독했다.
위대한 마탑주의 층은 얼어 죽을, 사무실 곳곳에 쌓여 있는 빈 용기들을 보니 정신이 어지럽다.
"엉, 왔냐?"
그때 한 무더기의 쓰레기 더미에서 굵직한 팔 하나가 올라와 위아래로 흔들거렸다.
"여기, 여기야! 좀 일으켜 줄래?"
"아, 알겠습니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힘껏 일으켜 세웠다. 쓰레기 더미가 후두두둑 떨어지며 그 안에서 중년의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떡진 갈색 머리, 성인 여드름 가득한 얼굴, 상투적인 디자인의 안경.
차림은 대충 흰 티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반바지 아래로 다리털이 정글처럼 덥수룩했다.
턱 전체로 자라난 수염은 짧았지만지저분하게 엉켜 있었다.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뱃살에 자꾸 시선이 간다.
"오우! 어서 와. 6층 시련 중인가보네? 나는 10대 마탑주 윈슬로야!"
……미네르바 님. 벌써 그립습니다.
"어디서 왔어?"
"지구라는 행성에서 왔습니다. 14대 마탑주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그래그래."
그는 일어나자마자 근처에 놓여 있던 용기를 집더니, 그 안에 떡이 된 인스턴트 면을 후루룹 섭취했다. 뺨을 씰룩거리며 잘도 먹는다.
"누구누구 먼저 뵙고 왔어?"
"6대 로이스트 님과 8대 미네르바님입니다."
윈슬로의 눈이 번쩍였다.
"오옹, 미네르바 님! 여신 그 자체 아니냐? 정말 아름다운 분이셨지!"
공감합니다.
"내게 푹 빠지신 것 같던데. 시대가 틀려서 아까워."
절대 안 공감합니다.
"아무튼 상황은 알겠어."
그가 꺼억 트림을 하고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을 때마다 뱃살이 그래픽처럼 출렁출렁한다.
"너는 내가 제시하는 시련을 수행해야하고, 제대로 성공하면 마법을 전수받는다. 그리고 너는 마지막 네번째 세계로 가는 거야. 맞지?"
"옙. 정확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출렁거리는 배에 두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서 번쩍하고 마법진이 일었다.
'뭘 하려는……?'
마법진을 중심으로 윈슬로의 배가 쑤욱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겹이나 있던 목살이 빠지고, 턱선이 생겼다. 숲을 이루던 털이 깔끔히 정리되고 탄력 있는 다리로 바뀌었다.
어느새 살이 빠지고 균형 잡힌 몸매의 금발 미남이 착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놀랐나! 후배."
그가 이빨을 드러내며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이빨에서 반짝하고 빛이 났다.
"무, 무슨 마법인가요? 다이어트마법?"
"변신 마법의 일종이야. 이 윈슬로의 오리지널 기술이지!"
그가 팔을 뻗자 허공에서 셔츠와 바지가 날아왔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는 벨트를 맸다.
나는 삐딱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을 9층에 못 올라오게 하는 이유가 있었네요."
"후후후. 마탑주도 프라이버시는 있어야지! 안 그래?"
그가 반대쪽 흰 이빨을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제발 저 부담스러운 제스쳐 좀 그만해줬으면 좋겠네.
"그럼 네가 우리 세계에서 수행해야 할 시련 내용을 공개할게!"
"오, 뭔가요?"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내 과제는 무척 심플하거든!"
그가 검지를 뻗어 내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드로이드 '이브'를 파괴하라!"
…야 이 미친 놈아!
"그거 그냥 이 세계의 최종보스를 잡으란 소리 아닙니까!"
"그래. 어렵나?"
"쉬우면 댁들이 레지스탕스니 뭐니 하고 있지도 않았겠죠!"
"자, 진정. 진정해."
윈슬로가 두 손을 펼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사실 우리가 이브를 잡을 절호의 찬스를 확보했거든."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절호의 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