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95화
나와 미네르바는 섬을 포위한 모든 몬스터들을 쓰러뜨렸다.
한쪽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는 나를,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수고했어."
"고생하셨습니다!"
무아지경 속에서 6공정을 쏴댄 것 같다.
다만 바람계 마법인 윈드 사지타리우스는 나가를 일격에 죽일 수 없어서 중간에 플레임 타우로스로 전환했다.
그래도 내가 수업할 내용은 6공정 마법진 겹치기였으니까 상관없다.
능력치도 적지 않게 올랐다.
"그럼, 이제 헤어질 시간이네."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내 몸이 흐릿해지며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우리 작별은 쿨하게! 뒤돌아보지 말고 가는 거야.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어. 유신아."
그렇게 말하는 미네르바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쿨하자면서요.'
말하기 무섭게 울다니, 참 정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또 만나자,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이게 마지막이고, 앞으로 영원히 볼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의 시간대에서는 그녀는 이미 없는 존재일 테니까.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잊지 않을게요."
내가 작별을 고하자, 그녀는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빙그레 웃어주었다.
"잘 가."
[두 번째 시련을 클리어했습니다.]
[다음 세계로 이동합니다.]
* * *
칠흑 같은 어둠을 떠돌던 나는, 몸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걸로 세 번째 세계구나.'
미네르바와의 이별에 대한 여운이 무척 컸지만, 감정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빨리 이 6층 시련을 끝내고 홍율을 구해내야만 했다.
'후우우.'
각오를 다진 나는 천천히 눈을 떠 보았다. 이번엔 하늘이 아니라 천장이다.
LED 조명이 환하게 방을 밝히고 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옆에는 냉장고와 책상이 보인다. 책상에는 내가 알던 것과는 생긴 게 조금 다르지만, 컴퓨터로 추정되는 모니터도 보인다.
'……뭐야, 지구로 돌아온 건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꽉 차 보이는 좁은 방이다.
창밖을 바라보니 울창한 숲속이었다. 찌르륵거리는 새 소리들이 난다.
신기해서 창문을 열어보려는데 도통 열리지 않는다.
'……이거 설마.'
벽 밑에 보이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숲의 풍경과 창문이 사라지고 그냥 휑하니 벽만 남았다. 스크린이 출력하는 영상일 뿐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거냐.'
대체 여긴 뭐 하는 곳일까? 우선이 방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일단 에렌델은 아닌 것 같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탑주.
책상을 살피다 보니 휴대전화가 보인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최첨단인듯 홀로그램 UI가 떠올랐다.
나는 사용자 정보를 터치했다.
'잰스? 이게 내 이름이네.'
왜 그렇게 판단했냐면 사진에 내 얼굴이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오호. 조금씩 감이 잡힌다. 나는 이 세계에서 잰스라는 사람을 연기 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이는 17세. 폴리스 소속. 고등학생이다. 벽걸이를 보니 교복도 있다.
'오, 뭔가 흥미진진한데.'
좁은 방안에서 단서를 찾고 있으려니 방탈출 카페에 들어온 기분이다.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해 보았다. 다행히 이 세계의 언어를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이쪽의 마탑주를 찾는 게 급선무니까 나는 포털 사이트에 '마탑주'를 한번 검색해 보았다.
[검열된 검색어입니다.]
[마탑주에 대한 검색 결과가 출력되지 않습니다.]
"……검열이라고?"
이것 봐라. 뭔가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나는 빠르게 이 세계에 몰입했다.
왜 이곳의 상위층들은 마탑주를 검색하는 것을 막아버린 걸까?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았지만, 인터넷으로 마탑주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에아. 네가 한번 찾아 볼래?"
-알겠습니다. 시야 고정 마법, 터치 마법을 사용하겠습니다.
휴대전화 위에 마법진 두 개가 떠오른다. 내가 손대지 않아도 휴대전화 화면이 알아서 차자작 움직인다.
어쩐지 에아. 신나 보인다.
-탑주.
"오! 벌써 뭔가 알아냈어?"
-스케쥴 앱에 들어가 보니 학교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각은 07시. 09시에 첫 수업이 있습니다.
"그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가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가도,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려면 이 흐름을 따라 잰스를 연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와, 이게 얼마 만에 교복이야.'
나는 교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일체형 디자인. 위아래 몸에 달라붙는 흰색의 제복이다. 어떻게 되어 먹은 구조인지 다리를 대충 집어넣으니까 자동으로 착 줄어들며 몸에 알맞게 맞춰졌다.
어렵지 않게 교복을 입고, 내 슈트는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가자!'
드디어 방 밖으로 나섰다. 크게 헤맬 필요 없이 주위에는 나와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여긴 학교의 기숙사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와.'
바깥의 광경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미래 세계?'
어두운 배경 아래로, 형광빛의 네온사인이 사방에 펼쳐진 찬란한 대도시였다.
하늘에는 이상한 비행기들이 슝슝 날아다니고, 일직선으로 뻗은 철근위로 자가 부양 열차가 씽씽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SF영화에서나 보던 멋진 광경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나 별대신 도시 위성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저쪽에도 사람들이 왔다 갔다하는 게 보인다.
"앞에 누구야?"
"지나갈게요. 좀 비켜주세요."
아차. 출입구를 막고 있었나 보다.
나는 뒷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 하고는, 학생들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과학이 상당히 발전한 세계네. 이 정도의 기술력을 가졌는데도 재앙에게 패배한 거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다. 이게 다 몇 층이야.
이곳의 사람들은 지상에만 사는 게 아니라 공중에도 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공중 100층쯤 됐고, 우리 위에도 200층 300층까지 있었다.
멸망한 세계, 바다뿐인 세계를 겪었지만, 이곳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다.
'어, 근데 저긴 내리막길인데?'
학생들의 등교 루트에 아무것도 없는 절벽이 나타났다. 100층 높이에서 떨어지면 무조건 추락사다.
-탑주. 여기가 터미널인 것 같습니다.
에아의 말대로였다. 우리 앞으로 탈 수 있는 비행 발판이 다가왔다.
특이하게 생긴 로봇들이 학생들을 통제해 두 줄을 세우게 했다. 발판은 두 개씩 왔고, 그 위에 한 명 씩 올라탔다.
근데 이거 안전한 건가? 발판이 워낙 작아서 균형 잘못 잡으면 떨어질 것 같다.
조금 기다리니 금방 내 차례가 왔다. 내 옆에 있는 가르마 머리의 남학생은 안내 안드로이드에게 꾸벅 인사까지 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발판에 올라탔다.
'안내 로봇한테 웬 인사?'
뭔진 모르겠지만 나도 그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판 위에 안착했다.
위험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탑승감이 좋다. 마치 자석처럼 발판이 발을 잡아주고 있다.
위이이잉!
공중 발판이 나아갔다. 슬쩍 아래를 보니 역시나 아찔하다. 나는 100층 높이의 허공에서 작은 발판에 몸을 맡긴 채 나아가고 있었다.
건축물의 형태도 신기했다. 마치 나무처럼, 건물에 건물이 달려 있고, 그 건물에 또 작은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긴 수백 층 높이인데, 건물의 층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발판을 타고 이동하다가 원하는 점포로 들어갔다.
-탑주. 지금 이 세계에 대해 조사한 정보들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물론이지.'
-이 세계의 이름은 '마키나티오.' 보시다시피 첨단 과학 기술이 발달한 세계입니다. 이곳에선 인류와 안드로이드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흠.'
-이 세계에도 균열과 재앙은 있지만, 압도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베이스로 잘 막아내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거대한 마력 장벽이 쳐져 있고, 몬스터들은 닿는 것만으로 즉사합니다. 압도적인 과학기술이 재앙을 억누른 케이스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야기만 들어서는 재앙을 가장 쉽게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지구까지 바톤이 넘어왔다는 건, 결국 이 세계도 멸망했다는 소리잖아?'
-긍정. 이 탄탄한 행성이 어쩌다 무너졌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마탑주에 대한 자료도 조사해 보려고 했지만.
'했지만?'
-대부분의 정보가 막혀 있었습니다. 지구에서의 인터넷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 세계의 인터넷은 인간들끼리 업무상 대화를 나누는 작은 커뮤니티 정도만 가능한 수준으로, 극도로 통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검열 단어를 확인해 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에아가 내 눈앞에 홀로그램 화면을 띄웠다.
[마탑주]
[마법]
[역사]
[반란]
…….
'갈수록 수상한 행성이네.'
-그렇습니다. 현재 이곳의 인터넷 보안을 뚫기 위해 스마트폰의 앱을 변조하여 간이 해킹툴을 구축해 보고 있습니다. 성과가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완전히 시스템 체계가 다른 이쪽 세계에서 해킹툴을 만든다고? 에아의 유능함은 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녀가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나는 나대로 이쪽 세계에 적응하면서 마탑주에 대한 정보를 얻어봐야겠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마침 공중 발판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발판에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내 옆에 탄 그남학생은 또 안내 로봇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간다.
'쟤는 왜 저러는 거야?'
-잠깐.
그때 기계 안드로이드가 나를 불러세운다.
"왜 그래?"
삐! 삐!
안드로이드의 머리에 붙은 모니터에서 붉은빛이 들어온다.
-등록번호 K-5, 330, 580. 5점 감점. 안드로이드의 호출에 매뉴얼대로 응하지 아니함.
"……뭐?"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인간.
나는 기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학생을 보며 말했다.
"야. 이 로봇 뭐라는 거야?"
삐! 삐!
-등록번호 K-5, 330, 580. 10점 감점. 인간이 안드로이드의 호출에 두번 불응함. 사고 의식에 대한 의문 제기.
"으, 으아악!"
옆에 있는 남학생은 기겁하며 도망쳤다.
……이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등록번호 K-5, 330, 580. 사상이 의심됨. 매뉴얼대로 응답하도록.
"야! 너 뭐 해!"
그때였다. 내 뒤에서 공중 발판을 타고 온 여학생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인류 등록번호 D-7, 157, 854! 벨리카 17세! 죄송합니다!"
그녀는 대뜸 안드로이드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그녀가 나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에이 씨! 뭐 해! 너도 빌어!"
그녀가 내 뒤통수를 힘껏 붙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아팠다.
그래도 일단 나는 얌전히 굴기로 했고, 그녀 또한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가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규율에 익숙지 않아요! 제가 잘 교육하겠습니다!"
-등록번호 K-5, 330, 580. 일주일전 폴리스 입국 심사 확인. D-7, 157, 854의 의견은 합당한 것으로 판단.
"감사합니다!"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바닥에 엎드린 우리 옆을 지나간다.
……아침부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K-5, 330, 580의 사상은 검증이 필요하다고 판단됨. 방과 후 4시간의 교화 교육 실시.
벨리카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신지……"
-D-7, 157, 854. 우수한 그대도 우리의 의사에 반하는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도 나를 따라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나는 그녀가 으득 이빨을 가는 모습을 보았다.
안드로이드의 이만 가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는 통학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한번 쉬더니 차가운 얼굴로 옷을 털고는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그녀의 옆으로 뛰어가 말했다.
"구해줘서 고맙……"
나도 모르게 말이 멈췄다.
아까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하마터면 내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그녀는 진보라와 정말 쏙 빼닮았다.
"너 뭐 어디 산에 살다 왔니?"
그녀가 표독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어떤 폴리스를 가도 규율은 비슷비슷할 텐데?"
성격은 많이 다르군. 나는 웃는 얼굴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건 아니고. 사정이 좀 복잡해."
"……네가 전학생 잰스구나?"
나는 남에게서 얻은 새로운 정보들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나는 전학생이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학생회니까 대충 들었어. 그보다 다시는 그딴 자살 짓거리하지 마. 하려거든 내 눈 밖에서 하든가. 괜히 찜찜하게."
"……내가 한 짓이 그 정도야?"
"안드로이드가 즉결처형 판결을 내리고 네 심장을 쏴도 할 말 없거든."
기계가 인간에 대한 즉결처형 판결을 내린다라.
-탑주.
'그래.'
이제야 감이 확실히 잡힌다.
이번 세계는 기계들이 인간을 정복한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