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93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를 보았다. 처음에 이 행성의 바다를 봤을 때는 별 생각 없이 '와, 바다다.' 하는 감상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뒤 바다를 보니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오싹오싹하고 두렵다. 저 시커먼 바다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바다도 적이다. 이곳 모두가 바다라는 악의에 포위당해 목숨을 위협받으며 살고 있었다.
"단 하나의 재앙 때문에 우리 세계가 이렇게 된 건 아니야."
미네르바가 입을 열었다.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지."
"복합적인 원인이요?"
"응."
그녀가 검지를 세웠다.
"우리 행성엔 극지가 있거든. 빙하가 뒤덮인 대륙."
"아, 저희 행성에도 있어요!"
"그럼 이해가 빠르겠네. 바로 그 외지에 재앙급 몬스터가 나왔어. 당시 대륙의 나라들은 치열한 전쟁 중이어서 이 극지의 재앙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 최우선으로 제거해야 하는 재앙이었는데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던 거야."
"그러면……"
"그래. 극지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서대륙이 통째로 물에 잠기고 말았어.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지."
이 행성은 국가 간 빈부 격차가 상당히 심한 편인 듯했다.
사람들은 재앙의 공세에 못 이겨 살기 좋은 중앙 대륙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버려진 대륙에서 처치하지 못했던 재앙들이 점점 세를 불리다가 결국 인류가 막기 벅찬 시점까지 오게 됐다.
"재앙은 방치됐고, 인간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계속 됐어. 제1의 군사력을 가진 제국에서도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 빨리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는 게 인류를 결집시킬 유일한 방법이다.' 뭐 이런 의견들이 대세로 기울고 있었어. 정작 다른 대륙에서 어떤 생지옥이 펼쳐 지는지 알면서도 외면했지."
"……아."
"결국 숙제처럼 남겨놓고 있던 재앙들이 바다 건너 중앙 대륙까지 위협했어. 남대륙에서 시작된 작은 재앙이, 해일의 대재앙이 되어 제국을 뒤덮을 때는 이미 다 늦었던 거야."
비슷한 케이스를 나도 알고 있다.
바로 재앙 '타베스'.
내가 탄자니아에서 상대한 타베스계 몬스터들의 대부분 재래식 화기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약했지만, 던전에 일체화되고 차후 진화 리스트를 훔쳐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요새형 타베스에, 드래곤형 타베스까지 나왔다.
아프리카 포기 주의자들의 의견대로 이들을 그냥 방치했으면 인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라타 행성은 타베스급이거나 그보다 더한 재앙들을 수두룩하게 방치했고, 결국 그 대가를 치렀다는 것 같았다.
"특히 가장 무서웠던 건…… 아!"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세요?"
"미안해. 잠시만 기다려 줄래? 내 호문쿨루스에게 연락이 와서."
"네. 천천히 하세요."
나는 그녀가 제자리에서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작게 조소를 머금었다. 진보라나 정서진이 나를 보는 시점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그녀가 호문쿨루스의 연락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 호문쿨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네 선배쯤 되는 사람이겠네. 에아.'
-호문쿨루스에게 선배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탑주.
'하하하.'
-그래도 한번 만나보고 싶기는 하군요.
잠시 후, 미네르바가 급박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문제가 생겼어. 준비해."
"무슨 일 있나요?"
"범람의 재앙이 오고 있어. 지금 당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미 대륙이 다 침수된 상황인데, 범람의 재앙이 또 온다고?
"재앙이 마지막 남은 일말의 육지까지 가라앉히려는 거야!"
"……지독하네요."
"포인트로 가자. 따라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련에서 빠져나가려면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녀를 뒤따랐다.
"로웬!"
로웬이라는 말에 다른 엘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 관리자 엘프가 돌아보았다.
"네. 마탑주님!"
"범람의 재앙이 오고 있어요! 모두 대피시키세요! 지금 당장!"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겠습니다!"
"다들 움직여! 왕국에 있는 사람들 전부 대륙으로 피난시켜!"
엘프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유신이는 날 따라와 줘."
"네."
"정말 미안해.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무슨 말씀을.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이 사람이랑 있으면 없던 의욕도 생긴다.
단순히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선한 의지라는 게 이렇게 대단할 수 있구나 싶다.
"이쪽이야. 도약 마법 쓸 수 있니?"
"물론이죠."
그녀는 바람을 딛고, 나는 리프부츠를 밟고 날아올랐다. 대륙에서 루릭 왕국까지 한 번의 도약이면 충분했다.
"잘 따라와!"
"네!"
우리는 섬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뛰어올랐다. 한 걸음마다 왕국과 왕국을 오가고 있다. 사람들은 벌써 배를 타고 대륙으로 피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마탑주님 죄송합니다!"
"힘내세요!"
미네르바는 급한 와중에도 한 명 한 명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는 모습이 마탑주라기보다는 한명의 히어로 같다.
"이쪽이야."
우리는 이 소라타 제도에서 가장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섬에 도착했다.
"여기서 재앙을 막을 거야."
"……이건 제 생각인데, 막을 거면 그냥 사람들이 많은 대륙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국은 물론, 한 점의 영토도 바다에 빼앗기고 싶지 않아. 전부 지킬 거야."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두손을 가슴 앞으로 세웠다.
"6공정 전수는 이번 재앙이 끝나면 해줄게."
"그럼 재앙이 끝날 때까지 미네르바 님을 지키면 되겠네요. 알겠습니…… 어어?"
앞을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고개가 아플 만큼,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한 해일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해일도 아니다.
물의 층. 사격형 단면의 초대형 어항이 다가오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자연재해는 세상을 심플하게 이등분했다. 여기가 지하층이고, 저쪽이 지상층으로.
범람이니 침수니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물로 세계를 갈아엎는 수준이다.
"막아야 해."
그리고 내 옆에서도 소름 끼치는 대량의 마력 유동이 느껴진다. 끌어올린 마력의 양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윈드 스케일>
그녀는 바람계가 전공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뻗어 나간 바람이 주위의 섬들을 뒤덮는 공기층을 형상한다. 마치 섬을 공기로 덧씌우는 것 같다.
'저걸로 보호하는 거구나.'
제국을 덮는데 시간이 꽤 걸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든 제국은 보호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작 우리가 위험하다.
"미네르바 님! 이대로는 우리가 휘말려요!"
그녀의 동공이 마력으로 푸르게 빛났다. 수식을 처리 중인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뭐라도 하는 수밖에.
<아이올로스>
4공정 바람계 마법을 몇 겹으로 겹쳐서 나와 미네르바의 몸을 둘렀다. 물론 그녀처럼 섬 전체를 덮는 건 무리지만 내 다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옵니다!"
나는 숨을 참고 밀려드는 물의 대재앙을 맞이했다.
꼬로로로로록!
세계를 구획화하는 물의 층이 우리를 통과했다. 순식간에 햇빛 따가운 온난화 기후가 차가운 바닷속 세상으로 변했다.
'큭! 압력이 장난 아니야!'
아이올로스로 보호하긴 커녕, 이대로는 둘 다 물살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집중력을 쥐어짜 내 아이올로스를 한층 더 깔고,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도록 산소망을 두르는 정도로만 마무리했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내 다리가 점점 물살에 밀려난다. 급하게 부착 마법인 글루를 사용해 다리와 섬을 딱붙이고 아이올로스 유지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새삼 느끼지만 격이 다르구나.'
나는 기껏해야 두 명을 보호막으로 두르는 게 최선이었지만, 미네르바는 기어이 모든 섬을 바람막으로 감싸서 보호했다.
압력과 물살이 거셌지만 바람막은 휘청휘청하면서도 깨지지 않고 잘 버텼다.
"후우우우."
위기가 지나가고, 나도 어느 정도 적응을 끝냈다. 한결 여유가 생긴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와.'
바다 깊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물의 세계는 황홀했다.
형광빛을 뿜는 물고기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는 모습은 별빛이 흐르는 것만 같다. 수중 생명체들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다른 방식으로 느긋하게 바닷속을 헤엄친다.
고요하다. 온몸으로 명상을 하는 기분.
비현실의 극치가 보여주는 태초의 세계에 들어온 것만 같다.
재앙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광경이 라지만,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어, 고래도 있다.'
커다란 고래 하나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우리 쪽인데?
-탑주! 이쪽 세계 생물이 아니라 몬스터인 것 같습니다!
'윽!'
고래 괴물이 접근해 오고 있다. 나는 습관처럼 파이어 캐논을 쓰려다가, 여기가 물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빨리 캐스팅을 취소하고 새로운 마법을 꺼냈다.
<아이스 자벨린>
내 주위로 생성된 서리의 창이 연달아 날아갔지만 물살에 얼마나 아가지 못하고 뒤로 떠밀려 버렸다.
'망했다. 수중 마법 같은 건 따로 없는데 어쩌지?'
바람계 마법을 써봐도 그냥 물살에 흩어질 뿐이다.
고래 괴물은 우리에게 명백한 적의를 흘리며 입을 벌렸다. 미네르바는 아직도 마법의 시전에 집중하는 듯 미동이 없다.
'…… 어쩔 수 없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이르지만 해보자.
그녀처럼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눈을 감았다. 원격 시전으로 돌진해오는 고래의 몸에 직접 마법진을 그린다.
여섯 개의 공정을 두 개 공정의 난이도로 격하시켜 속도를 폭발시키는 극의.
<플레임 타우로스>
고래의 몸에 마법진이 새겨지고, 격발한다.
꽈아아아앙!
물속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고래의 몸에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놈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더니 이내 몸을 돌려 도망친다.
'해, 해냈다.'
잠시 얼이 빠져 있는 그때, 내 주위의 바다가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쏴아아 갈라진다.
빈 공간이 확보되고 대기로 이루어진 바람막이 형성되어 우리 몸을 감싼다.
"하아, 하아! 정말 수고했어! 이제 아이올로스는 꺼도 괜찮아."
어느새 미네르바의 눈에서 푸른빛이 사라지며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아이올로스를 거두었다. 안 그래도 산소가 슬슬 부족할 시점이었다.
"이걸로 괜찮을까요?"
"응. 어지간한 몬스터들의 공격도 보호할 수 있고, 산소도 내가 지속적으로 만들면 돼."
나는 멍한 얼굴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이런 일 많이 겪나요?"
"수도 없이 겪지. 한 달에 3~4번 정도?"
"……고생하시네요."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갑작스러운 재앙이라 준비가 미흡했는데, 네가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
"……아, 흠흠.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아까 잠깐 봤어. 벌써 6공정을 쓸 수 있는 거야? 6층 시련 도전 중에 6공정이라니, 대단해!"
"하하,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그녀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나는 다시 마법 운용에 신경 써야 하니까 쉬고 있어."
"넵."
그녀가 다시 눈을 감고 마법에 집중했다. 나는 다시 멍한 얼굴로 바다를 올려다보았다.
'……별의별 경험 다 한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