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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92화 (192/337)

나 혼자만 마탑주 192화

"……."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 걷히고, 나는 눈을 떴다.

공기가 바뀌고, 지형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뭉실뭉실 구름 사이로 화창한 햇살이 내려오고 있다.

뒤통수로 포근한 땅의 감촉이 느껴진다. 누운 채로 앞을 보면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뻗어 있는 게 보인다.

뭐, 이 세계가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나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뭐냐고 그 인간……"

-탑주. 괜찮으십니까?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응. 괜찮아."

로이스트의 속셈은 알 수 없지만, 일단 그가 내 머릿속에 심어둔 그 끔찍한 연구만 건드리지만 않으면 당장엔 별문제 없을 것 같다.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던전에 갇힌 홍율의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

최대한 빨리 그녀에게 가야 했다.

'일단은 지금 겪고 있는 세계에 집중하자.'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구에서는 본 적 없는, 형광 색색 다채로운 식물들이 보인다. 생김새도 나무라기보다는 산호처럼 생겼다.

어딘가의 숲. 뭐, 숲 한복판에 덩그러니 떨어졌다는 건 별로 감사할 일은 아니다.

숲은 기본적으로 위험한 장소다.

나침반이나 뭔가 지표가 될 만한 것도 없다. 여기서 어떻게 이쪽 세계의 마탑주를 찾아 낼지 눈앞이 컴컴하다.

일단 이 숲에서 빠져나오는 게 우선이니,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풀들이 다리에 닿는데 정말로 바닷속의 산호처럼 말캉말캉 흐물흐물했다.

'마을부터 찾자. 거기서 마탑주에 대해 수소문하다 보면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를……'

-탑주.

에아의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응. 나도 감지했어.'

걸음을 멈춘 채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수풀 속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몬스터의 발소리는 아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사람 목소리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나무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말하고 있었다.

뭐든 간에 시작부터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만난 건, 운이 좋다.

"저는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나는 전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로 정체를 밝혔다.

"이상한 이름이군. 이곳에 들어온 용무는?"

"마탑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마탑주님과는 무슨 관계인가?"

오, 마탑주를 알고 있다니! 이번 세계는 엄청 잘 풀릴 느낌인데?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탑주님의 제자 되는 사람입니다."

숲에 깊은 정적이 흐른다.

"하, 제자라고? 네놈이 진짜 제자라면 스승의 존함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망했네.

"침입자다. 쏴."

수풀과 나무 위에서 화살들이 날아온다.

전부 마나를 머금고 있는 화살들.

한 명 한 명이 공인 헌터급 궁수수준이다.

-전투사체 감지 완료. 가드하겠습니다.

에아가 내 몸 주위로 쉴드를 타일처럼 펼쳤다.

날아온 화살들이 쉴드에 막혀 팅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가끔 쉴드에 균열을 만들거나 화살촉 부분이 뚫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완전히 관통하는 건 없었다.

나는 지휘자처럼 두 팔을 펼쳤다.

<레피드 에로우>

내 몸을 축으로 360도 방향에 금빛 화살들이 소환되어 날아갔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린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람이나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마나 화살이야!"

"……활도 안 꺼냈으면서 어떻게?"

몇몇이 기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계속 할 거예요?"

이곳은 다른 세계다. 괜히 이쪽 주민들을 위협하거나 난동을 부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꾸 내 목숨을 노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침입자 주제에 건방지게!"

그때 수풀 속에서 나를 심문하던 목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갈색 피부와 훤칠한 키, 그리고 뾰족한 귀를 가진 여자가 내게 활을 겨누었다.

'엘프족인가?'

에렌델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종족. 그래, 이번에야말로 에렌델인 모양이다.

그녀가 겨눈 화살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마력이 살벌한 기세로 응축된다.

"더는 봐주지 않……!"

"잠깐만."

후우우우웅!

내 앞으로 녹색 돌풍과 함께 나뭇잎이 흩날렸다. 이내 그 바람 속에서 아름다운 또 한 명의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월계수 왕관을 머리에 쓰고,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며,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엘프들보다 키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와.'

방금 전투 중이었는데 사람이 넋을 놓게 된다.

이런 외모는 반칙이다. 남녀 불문하고 그냥 보는 순간 넋을 잃게 만들 정도로 신이 빚은 아름다움이었다.

"네가 마탑주의 제자라고?"

"예."

"그래. 그럴 때가 됐구나."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뒤쪽으로 손짓을 했다. 나를 노리고 있던 이곳의 모든 엘프들이 활을 내렸다.

"내 이름은 하라 시온드 미네르바."

그녀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8대 마탑주란다."

나는 마음속으로 '땡큐 갓'을 외쳤다. 제발 이 사람이 마탑주이기를 빌고 또 빌고 있었다.

로이스트에게 했던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14대 마탑주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행성, '소라타'에 온 걸 환영해. 김유신."

* * *

"역시 대선배님이시네요!"

"오호호! 부끄러우니까 그냥 미네르바라고 불러."

나와 미네르바는 나란히 숲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온화한 성격에 나긋나긋한 목소리, 고운 마음씨까지. 어디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이상적인 여신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와의 대화는 꿈결 같았다. 이전 세계에서의 뒤숭숭했던 기분이 말끔히 사라졌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나랑 한바탕 싸울 뻔했던 그 갈색엘프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설마 정말로 마탑주님의 제자분이 실 줄은……."

"하하.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런 상황에선 오해하실 수도 있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실력이 훌륭하시더군요."

그녀가 눈을 빛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정식으로 대련을……"

"아이참, 손님한테 그게 무슨 무례니?"

미네르바가 장난스럽게 면박을 주자 엘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마탑주님. 실례했습니다."

그 엘프는 다시 다른 사람들 사이로 후다닥 돌아갔다. 미네르바가 나를 보았다.

"미안해. 내 관리자인데 호승심이 워낙 넘치는 아이라서."

와, 말도 안 돼, 목소리마저도 살살 녹는다 진짜.

흠흠, 아니, 이게 아니지. 정신 차리자.

"미네르바 님의 세계는 평화로운 것 같아서 좋네요. 이전에 방문한 세계는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었는데."

"어머, 어디 어디 가봤니?"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다.

우리는 마탑주로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 층에 대한 이야기, 관리자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 마탑의 선택을 받아 마탑주가 됐는지 등등.

그녀 또한 6층 시련 때 로이스트의 행성에 갔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는데, 그녀는 평범하게 마법만 전수받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암흑 마법에 적성이 없는 그녀에겐 로이스트가 본심을 드러내지 않은 듯했다.

"6대님의 세계. 무서웠지."

과거를 상기했는지 살짝 어깨를 떨던 그녀가 나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을 걸?"

"네? 이렇게 평화로운데요?"

그녀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으니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숲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바다네요."

"응. 바다야."

끝도 보이지 않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주위엔 작은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자리해 있었다.

처음엔 대륙의 숲 한복판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리 크지도 않은 섬이었다.

"여긴 어딘가요?"

"파이크 제국 본토. 우리 행성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곳이야."

……지금 번역 마법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거 맞나?

그때였다. 우리 앞에 보이는 조그만 섬의 집에서 한 노인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미네르바가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루릭 폐하! 좋은 아침이에요!"

폐하?

"오, 마탑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 젊은이는 누구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제 후배예요!"

"아, 안녕하십니까."

나는 노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미네르바가 싱글벙글 웃으며 설명했다.

"저분은 루릭 왕국의 국왕이셔. 특산품은 당근이야."

아, 물론 그렇겠죠! 저기 집 앞 텃밭에 당근밖에 없으니까!

"저쪽은 라인 왕국이고, 저쪽은 데레스 공국이야."

상식과 어긋나는 괴리감에 머리가 아파진다. 원룸 주차장만도 못한 섬위에 사는 사람들인데 하나하나가 전부 왕국이라고?

"이상하지?"

내 눈치를 본 그녀가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대답했다.

"이, 이상하긴요! 하하! 조금 작긴해도 행복이 넘치는 왕국들이네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픔을 잊는 저마다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줬음 해."

"아픔을 잊는…… 방법?"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짓더니 내 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미, 미네르바 님?"

"자, 후배님? 앞을 보고 차렷."

그녀가 내 머리를 앞으로 부드럽게 돌리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신체접촉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에게서는 꽃향기가 났다. 향수를 썼을 때 나는 인위적인 플로럴향이 아닌 진짜 생화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데레스 공국을 봐줄래? 저기 큰 야자수 있는 곳. 응. 거기서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바다를 보는 거야. 맞아, 잘 했어!"

섬섬옥수 같은 그녀의 오른손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덮었다.

"왼쪽 눈은 감고, 오른쪽 눈만 떠. 그렇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의 검지와 중지 사이로 세상이 보인다.

"이제 눈 깜빡이면 안돼. 그럼 간다?"

그녀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마법진 하나가 펼쳐진다. 내 오른쪽 눈은 그녀의 마법진을 통과해 앞을 보게 됐다.

'우와악!'

갑자기 내 몸이 바닷속으로 훅 빨려드는 것 같다. 정신없이 바다로 내려가던 내 시야가 어느 한 시점에서 멈춰섰다.

바다 밑바닥.

그곳에는 도시가 있었다.

우리가 살던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빌딩과 높은 건물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이끼와 해초들이 뒤덮고 있는 모습이다.

도로도 있고, 분수대도 있다. 빌딩은 이제 물고기들의 은신처이자 집이 되었다.

'이게 대체……'

집인 줄 알았던 갈색 개체가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렸다. 지나가던 물고기들을 우악스럽게 입에 넣고 뺨을 씰룩거렸다.

그 괴물의 동공이 가만히 나를 응시한다.

"봤니?"

그녀의 그 한마디에, 내 시야가 빠르게 바닷속에서 올라와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르바 님. 설마 그 아픔이라는 게……"

"맞아."

내 옆으로 온 그녀는 슬픈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우리 소라타 행성은, 대재앙에 의해 지표면의 99% 이상이 물에 잠겼어. 이제 이 세계에서 남은 건 여기뿐이야."

그랬다.

이번엔 침수의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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