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9화
"허억! 헉!"
나는 몰려드는 이 세계의 사람들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슬슬 체력이 달린다고 생각할 때마다 능력치가 올라주었다.
그래, 세상만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대로 그냥 도망치기만 해도 강해지는 거잖아? 러닝만 해도 강해져! 같은…….
-탑주! 앞은 막다른 길입니다!
딴 생각할 틈이 없네.
에아의 경고에 나는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정말로 막다른 길이었다.
그사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그냥 싸우는 수밖에 없지.'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마력을 개방했다.
<레피드 에로우>
주위로 생성된 황금빛 화살들이 빛살처럼 날아간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화살에 맞아 픽픽 나가떨어진다.
나는 마법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는 길마다 화력이 퍼부어졌고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주저앉았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시원하게 올라주는 능력치에 만족하며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괴이한 장면을 목격했다.
허벅지에 레피드 에로우가 꽂힌 남자가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마나 화살을 핥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광기 어린 얼굴로.
"마나! 마나다!"
"오오오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살상력 있는 공격 마법인데, 사람들은 마법을 쓸수록 더 흥분했다.
누군가의 몸에 꽂힌 레피드 에로우에 다섯 명이 달려들어 본인은 물론 모두가 혓바닥을 할짝댔다. 바닥에 꽂힌 화살이 보이면 또 우르르 달려든다.
'이거 기분 진짜 이상하네!'
뭐라고 해야 하나, 마치 도시 한복판에 만 원짜리 지폐 수천 장을 뿌리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레피드 에로우로 사람들의 포위망을 뚫고는 다시 도망쳤다.
"밥 줘어어어어!"
쿠쿠쿵!
건물 한 채가 통째로 박살 나며, 키 10미터의 뚱뚱한 거인이 나를 향해 팔을 뻗어왔다.
"니 밥을 왜 나한테 찾아!"
나는 밥 대신 파이어 캐논을 시전해 날렸다.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거인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나도 마나 줘! 불 싫어어어어어!"
그러면서도 불을 먹으려고 혓바닥을 내밀다가 혓바닥까지 다 타버렸다.
……쟤 바보 아냐?
"저기 있다!"
"잡아!"
얼마 안가 또 사람들에게 포위당했다. 역시 이쪽 지리는 나보다 이도시 사람들이 더 잘 아니까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하필 윙골렘이 고장 났을 때 이 난리라니!'
그 집행부 저격수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빨이 갈린다. 이 시련에서 성장한 뒤 밖으로 나오면 기꺼이 정성들여 박살 내주마.
-탑주! 지상에는 길이 없습니다.
일단 허공에 쉴드를 딛고 빠져나가셔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케이. 부탁해!'
에아가 쉴드를 펼쳐서 징검다리를 만들자마자 그 위로 날아올랐다. 뒤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따라올 생각은 하지 못하고 쉴드를 먹어치우기에 바빴다.
쉴드를 딛고 허공을 내달리고 있다. 아래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팔을 휘젓고 있다.
더없이 끔찍한 광경이다. 저기 한 가운데 떨어지면…… 상상도 하기 싫다.
"저기 있다!"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잡는답시고 건물의 지붕과 천장으로 올라와 뛰어내리고 있다. 다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나는 데바의 눈을 활성화시킨 채 떨어지는 사람들을 피해 달렸다.
'깜짝이야.'
정신없이 쉴드를 밟고 달리다 보니 절벽이 나왔다. 아래에는 지형이 푹꺼지며 낮은 지형의 도시들이 보인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당히 높은 상공을 달리는 격이 되었다.
'에아! 이 도시에서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지점을 표시해 줘!'
-알겠습니다. 탐지 마법을 시작합니다.
잠시 후 에아가 데바의 눈으로 지점을 표시해 주었다. 나는 그곳으로 힘껏 도약하며 무릎을 가슴에 딱 붙였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신발 밑창을 홅었다.
<데바스타>
내 몸이 검은 연기를 이끌고 쏘아져 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 에아가 표시한 지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나는 벽에 주먹을 올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대체 뭐야! 시간여행이라며!"
-저도 당혹스럽습니다. 에렌델의 어떤 기록에도 이런 건…….
투둑!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러났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에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 마법?"
장벽에 잔해들이 떨어지며 글자가 새겨진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신 글자가 모두 그려진 후 장벽의 위를 향하는 화살표가 그어졌다.
"여길 올라오란 거야?"
나는 고개를 들어 까마득히 높은 장벽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마법을 썼을 때의 반응으로 추정한다면,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틀림없이 희귀한 존재다.
그 마법사가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는 건 틀림없이.
'마탑주다.'
힘들었지만 드디어 실마리를 잡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탑주.
"당연히 가야지. 선택의 여지가 있어?"
나는 마나 엘릭서 한 병을 꺼내 꿀떡꿀떡 들이켰다.
윙골렘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예전에 탄자니아 반군 주둔지의 장벽을 오를 때처럼, 손발에 부착 마법진을 붙이고 천천히 장벽을 올라가기로 했다.
'마법 하나 배우기 참 힘드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올라가고 있는데, 문득 플레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래. 끝까지 한번 가보자.'
* * *
휘이이이이잉!
강한 바람이 내 몸을 사정없이 때린다. 의지가 있어서 나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만 같다.
나는 두 손과 발을 벽에 더 꽉 붙이고 장벽을 기어올랐다.
'으으, 다 귀찮다아.'
의기양양하던 처음과는 달리, 점점 힘과 의욕이 빠져나간다. 체력이 떨어지니 정신력도 느물느물해진다.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
헛고생한 건가? 여긴 또 어떻게 내려가지?
온갖 우려들이 내 멘탈을 흔든다.
-힘내십시오 탑주.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나마 에아의 감미로운 목소리 덕분에 힘을 낸다.
"한국 쪽이 걱정이네. 다들 잘 있으려나?"
-네, 탑주. 일단은 무사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일단은, 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뭔 일 있었어? 프로스트가 또 이상한 수작을……"
-……탑주. 시련에 온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에아가 냉정하게 말했다.
-앞으로 저는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탑주에게 외부 소식을 알려 드리지 않을 생각입니다.
"뭐어? 왜!"
-지금은 오로지 시련에만 집중하실 때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시련에 갇혀 있는 탑주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다. 이번 6층 시련은 중도하차 따위가 불가능하다.
한번 구축된 이 공간을 클리어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바깥의 동료들이 걱정된다면, 오히려 더욱 이 세계에 집중하시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사료됩니다.
"네 말이 맞아. 고맙다 에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걱정을 잠시 흘려보냈다. 오로지 앞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팔다리에 힘을 꾹꾹 실어가며 장벽을 올랐다.
[인내가 1 올랐습니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더럽게 힘들다. 시련 특유의 성장치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고달플 뻔했다.
단련이라고 생각하고, 초심을 잃지 말자. 전력 외 시절을 떠올리자.
체력 1 올려보겠다고 중력 기구 미친 듯이 들고 내리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 나는 초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체력이 1 올랐습니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분노의 단계에 이르렀다.
'……밖에 나가면 내 윙골렘 부순 새끼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이 개고생을 선사해 준 자들에게 극도의 분노를 불태우며 전진했다.
분노는 집중력의 좋은 재료이자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활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마침내.
터업.
위로 뻗은 내 오른팔에 장벽의 끝이 닿았다. 왼팔을 뻗어서 올라가려는데.
덥석!
하마터면 새 같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장벽 위에 있는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고 끌어올려 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힘이 무척 셌다.
나는 매달린 것처럼 위로 올라왔다. 맞닿은 그의 손에서 까끌까끌한 세월의 주름이 느껴졌다.
'꼭대기는 이렇게 생겼구나.'
장벽 위는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망루에, 건물까지 세워져 있다.
가볍게 숨을 돌리고 나를 끌어 올려준 사람을 보았다.
'……깜짝이야.'
이 사람은 얼굴이 없었다.
치렁치렁한 로브를 입고 얼굴엔 후드를 쓰고 있는데, 후드 너머의 얼굴은 윤곽도 보이지 않고 그저 한없이 새까맣기만 했다.
팔을 뻗어보면 얼굴이 잡힐까? 아니면 그냥 텅 빈 공간일까?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그와 마주했다.
"어서 와라. 벽 내부에서 나타난 벽 너머의 인간."
목소리마저도 특수한 떨림 효과가 잔뜩 들어간 것처럼 신비롭게 울려퍼졌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의 이름은?"
"저는 14대 마탑주.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정체를 밝히자 남자는 크게 놀란 반응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내 이름은 로이스트. 제6대 마탑주다."
바로 이 사람이었구나!
나는 안톤의 일기에서 안톤이 취했던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이계의 후배여."
우리는 다시 한번 악수를 했다.
"14대라고 했나?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군."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여기 왔다는 건, 6층 시련을 진행하는 중이로군. 그렇지?"
깜짝 놀랐다. 안톤과 싸웠던 4층시련 때처럼, 그는 내가 겪고 있는 상황 자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맞습니다."
"나 또한 여섯 번째 시련에서 선대들을 만나 뵙고 가르침을 구했지. 그때의 젊은 혈기가 그립구나."
얼굴 없는 공허한 남자가 매연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를 따라 악취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에렌델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여기는 에렌델이 아니다."
나는 말을 멈췄다.
"네, 네? 에렌델이 아니라면 여긴 대체……"
"이 행성의 이름은 '안코르 드 안티르스'. 한때 300억 인구가 살았던 세계다."
잠깐만. 이 사람도 마탑주라며? 에렌델 말고 뭔가가 또 있었어?
내가 가진 상식과 관념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혼란스러운가 보군. 에렌델은 나도 모르는 세계다. 아마도 자네의 행성이거나, 그 전대 마탑주가 있던 행성이겠지."
아니, 미친. 그러면 대체 스케일이 얼마나 커지는 거야?
"에렌델이 어디인지, 자네의 세계가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로이스트는 나를 데리고 반대편의 장벽을 보여주었다.
"자네가 실패하면 자네의 행성도 이렇게 될 지 모르지."
"우욱!"
까마득한 장벽 아래로,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장벽의 맨바닥으로부터 시작해, 몸으로 쌓고 쌓고 쌓아 올려 거의 장벽의 끝에 도달하기 직전인 모습이었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다. 지금 좌우편에도 몬스터들의 산이 형성되어 있다.
이 한 면에만 3개의 산. 장벽은 동서남북으로 있으니까 이쪽 라인과 동일하게 계산하자면 총 12개의 몬스터 산에 의해 이 도시가 공격받고 있었다.
'끝이 안 보여.'
장벽에 산을 쌓고 있는 몬스터 무리는 물론, 평야 지역에도 몬스터들이 무수히 많았다. 지평선 끝까지 몬스터들이 있다.
"11년. 우리가 이 도시를 지키고 있었던 시간이다."
로이스트가 뒷짐을 지고 장벽을 걸었다.
"여기가 '안코르 드 안티르스' 최후의 보루다. 이 도시마저 무너지는 순간, 세계는 멸망하고 재앙에 의해 사라진 또 하나의 행성으로 기록되겠지."
"……아."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자네가 왔다는 건, 이미 이세계는 멸망했다는 소리겠지만."
……맞는 말이다.
만약 이곳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14대 마탑주는 '지구의 김유신'이 아니라 '안코르 드 안티르스'의 다른 누군가가 되어 있었어야 할 테니까.
하지만 자신이 지키는 세계가 멸망한다는 미래를 알았어도, 로이스트의 반응은 유난스럽지 않았다. 좌절하거나 체념하는 기색도 아니다.
그냥 알고 있는 걸 들은 듯 무덤덤 했다.
"사설이 길었군. 자네도 여기에 온 목적이 있겠지."
"네!"
6층 시련은 '마탑주의 시련'이다.
내가 만나야 할 마탑주는 총 4명.
그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과제를 제시한다.
내가 무사히 과제를 클리어하면 마탑주들은 보상으로 6공정 마법 중 하나를 가르쳐 준다.
대충 그런 흐름이라고 보면 된다.
"나 6대 마탑주 로이스트가 내리는 시련은 이것이다."
그가 장벽 밖의 무수한 몬스터 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는 세 개의 산을 무너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