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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87화 (187/337)

나 혼자만 마탑주 187화

"계속 하려고?"

블랙잭이 어깨를 풀며 말했다.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즐기는 모습이다.

나는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두 주먹을 흙바닥에 댔다.

<건틀릿>

다시 한번 충격파가 일어나며 주위에 뿌연 흙먼지가 펼쳐진다.

즉시 물의 장막을 시전해서, 먼지 속에서 세 명의 '나'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낸다.

"뭔가 했더니 또 그거야?"

블랙잭과 모두의 시선이 움직인다.

기다리고 있던 탐지계 능력자가 팔을 뻗자, 세 명중 진짜 인 한 명에 '녹색 점'이 드러난다.

모두가 그곳으로 돌진한다.

"잡았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도달한 블랙잭이 내 뒤통수를 힘껏 붙잡는다.

출렁!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내 몸이 물로 바뀌어 바닥에 떨어진다.

"이게 가짜?"

블랙잭이 다급히 뒤를 돌아본다.

능력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던 탐지계 능력자가 물로 변해 떨어진다.

물의 장막이 떨어진 자리에는 기절해 있는 진짜 탐지계 능력자가 보인다.

뭐, 어렵지 않은 연줄이다.

정신없이 블랙잭에게 얻어맞을 때, 미리 시전해 둔 윈드포트로 탐지계 능력자의 목을 압박해 몰래 기절시켰다. 그다음 안톤의 목걸이로 사용하는 물의 장막을 원격 시전으로 그의 앞에 깔았다.

진짜인 나는 폭발 연기를 뚫고 러시아 진형으로 내달리고 있다.

"뭐 해! 쫓아!"

나는 데바스타까지 발동해 놈들과의 거리를 벌리고는 윙 골렘을 작동시켰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가면 러시아 헌터들의 영역이……!

타앙

총성과 함께 내 몸이 바닥에 추락했다. 공중에서 가속하는 중에 추락해서 낙하 충격은 두 배였다.

"빌어먹을!"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윙 골렘이 박살나 있다. 영리하게도 슈트와 마나로 보호받는 내 몸이 아닌 윙 골렘을 직접 노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이를 악물고 달렸다.

저 앞에 펜스로 막혀 있는 러시아 현장이 보인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데바스타를 준비했다. 오른발에 켜자마자 지체없이 지면을 밟고 두 팔을 머리 앞에 세웠다.

<데바스타>

터어어어엉!

추진체처럼 날아간 내 몸이 펜스를 부수고 현장에 도달했다. 나는 바닥을 뒹굴며 그 자리에서 뻗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누구냐!"

러시아 헌터들이 깜짝 놀라며 총을 겨누었다. 나는 얼른 두 팔을 들어보였다.

"하, 한국의 공인 3급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저 아시죠? 지원 간다고 연락했었는데!"

"지원?"

"들은 적 있어?"

러시아 헌터들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며 웅성거리는 사이, 나는 슬쩍 앞을 바라보았다.

임모탈이 보인다. 그것은 쇠사슬같은 것에 봉쇄되어 있었는데, 움직이려 할 때마다 수비조의 헌터들이 적절한 타격을 가해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탑주! 가슴에 게이트가 보입니다!

'그래, 저기로 들어가면 돼.'

한바탕 소란스러운 때에, 뒤쪽에서 블랙잭과 집행부 헌터들이 들이닥쳤다.

"그 새끼 이리로 넘겨!"

"뭐, 뭐야?"

외부인들이 우르르 나타나자 기겁한 러시아 헌터들이 내게 겨눈 총을 집행부 요원들에게로 돌렸다.

"다 멈춰! 누구냐!"

"그 이상 다가오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

선전포고란 말에 블랙잭은 멈칫했다.

신원을 밝히고 협조를 구하느냐, 다 쓸어버리고 나를 확보할 것이냐.

하지만 여기 있는 목격자들을 전부 죽이는 건 리스크가 너무 심하게 크다. 지금은 대륙급 재앙을 클리어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들을 방해하면서까지 나를 잡는 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

"대한민국 집행부의 박승훈이오."

결국 공인증을 보인 블랙잭이 실명까지 언급했다.

"미리 귀국에 통보하지 못한 점은 사과합니다. 한시를 다투는 사안이라서요. 그자는 불법 출국한 범죄자니까 이리 넘겨요."

"……."

러시아 헌터들이 표정을 굳혔다.

"또 뭔 소란이야."

나는 순간, 불곰이 다가온 줄 알았다.

적갈색 슈트, 갈색의 짧은 스포츠머리와 구레나룻에서 턱을 지나 목아래까지 발달된 수염,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야수라는 표현이 정말로 어울리는 남자였다. 자칭 짐승남 거리던 사람들도 이 사람 앞에선 꼬리를 말 것 같았다.

"그리즐리 님!"

나도 알고 있다. 그리즐리라면 러시아의 간판 헌터. 무려 공인 2급이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저벅저벅 다가 와 내 앞에 서더니, 무릎을 굽히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당신이 우리를 돕겠다고 자원했던 그 헌터군."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예, 맞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라 네 쪽인 것 같은데."

곳곳에서 러시아 헌터들의 껄껄거리는 웃음 소리들이 들렸다.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던전은 클리어된다. 왜 불법 출국까지 하면서 여기까지 온 거지?"

"이봐요!"

보다 못한 블랙잭이 소리쳤다.

"그자는 범죄자요! 교활한 범죄자와 이야기할 필요 없으니 어서 놈을 넘기시오!"

그리즐리가 픽 하고 웃었다.

"니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리즐리의 서슬 퍼런 눈빛이 꽂히자, 블랙잭이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여긴 러시아고, 니들도 똑같은 침입자야. 한 번만 더 내 말 끊으면 한 놈도 남김없이 찢어 죽인다."

집행부 일원들이 그 자리에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리즐리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말해."

"대한민국의 협회장인 홍율을 구하러 왔습니다. 아직 그녀는 임모탈의 재앙 던전 안에 살아 있어요."

그리즐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던전은 곧 닫힌다. 이제 와서 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일말의 승산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리즐리는 고민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고민할거리도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의 집행부에서 신분을 밝히고 협조를 요구한 상황이다.

괜히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바엔, 그냥 나를 넘겨 버리고 프로스트에게 대가를 뜯어내는 쪽이 더 좋게 먹히겠지.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는 고민하고 있다.

'데바스타는 일단 아껴두자.'

약간의 틈이라도 나면 데바스타를 써서 게이트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잠시 유보다.

왠지 흘러가는 상황이 나쁘지 않다.

"그리즐리 헌터! 현명하게 판단하시오!"

블랙잭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그자는 한국의 범죄자요! 그대는 우호국의 범죄자를 감싸주는 누를 범하는 거요!"

"……누를 범한다고?"

턱 아래의 수염을 긁적거리던 그리즐리가 입꼬리를 찢으며 웃었다.

"잘 모르겠는데."

"……!"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국의 상황은 들어서 알고 있다. 대영웅 홍율이 실종됐다는 소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지."

그리즐리의 몸에서 농도 짙은 마력이 흘러나온다.

"러시아는 기억한다. 4년 전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된 '모스크바의 악몽'. 자국 헌터들마저도 줄행랑을 치는 그때, 외국인인 그녀가 온몸을 내던지며 그 거대한 재앙과 맞섰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뼈가 박살나고, 복부에 구멍이 나도 싸웠다. 그리고 기어이 재앙의 주체를 쓰러뜨렸다."

그리즐리가 감회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젖혔다.

"그녀는 러시아를 구했다. 모든 러시아인은 대영웅 홍율에게 죽어도 갚지 못할 빚이 있지."

"자, 잠깐……!"

"그렇다면 묻겠다. 유닉스의 졸개들아."

그리즐리의 안면 근육이 씰룩인다.

"너희는 러시아를 위해 무엇을 했지?"

"……."

그 물음에, 블랙잭의 입이 그대로 들어갔다.

"한국에서 정권 좀 잡았다고, 너희가 뭐라도 됐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밖으로 나오면 너흰 그 사람의 발톱 떼만도 못한 존재다."

"내,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프로스트 협회장께서는……!"

"그딴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의 말따위! 듣고 싶지도 않다!"

쩌렁! 쩌렁!

어마어마한 박력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와우 씨.'

지켜보는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한국의 협회장을 듣보잡으로 칭하는 저 패기라니.

"그 전설적인 영웅이 이깟 심심한 재앙에 당했다고? 그럴 리가!"

그리즐리는 명백히 분노하고 있었다.

"권력에 눈이 멀어 스스로 영광스러운 신화를 꺾은 머저리들아! 너희가 대영웅의 구원을 방해하겠다면 전 세계가 나서서 협회에 죄를 물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서울로 가서 그 프로스트란 놈을 끌어내 볼까?"

"이, 이보시오! 그런 망언은 중대한 외교적 결례……!"

"이게 마지막 경고다."

우득! 우드드드득!

그리즐리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바닥을 짚은 양손이 앞발로 변하고, 뒤로 뻗은 뒷발은 이 임모탈 현장의 펜스 끝에 다다랐다.

"……무, 무슨!"

"저건 또 뭔 메타모포시스야!"

임모탈보다 더 크다.

몸길이가 30m가 넘는, 거의 작은 마을 하나를 뒤덮을 만한 갈색 털의 곰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냉기가 흐른다.

-이 땅에서 꺼져라!

그리즐리의 목소리에 세상이 진동한다. 그는 정말로 집행부 전원을 죽일 생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척!

스릉!

다른 러시아 헌터들도 헌팅 디바이 스를 뽑아들며 그들을 겨누었다.

"어, 어떻게 합니까?"

집행부 요원이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굳은 표정의 블랙잭은 거대한 곰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곤 조용히 말했다.

"가, 가자."

결국 블랙잭과 집행부 요원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다.

'협회장님. 보고 있진…… 않겠죠?'

나도 처음엔 그녀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헌터는 몸이 자산이다. 특히나 공인 1급이나 되는 헌터라면 자신의 몸을 아무리 아껴도 모자랄 판에,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전세계의 어디든 기꺼이 나가서 싸워왔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미련하다고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다.

그녀의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설 수 있겠나?"

어느새 인간 상태로 돌아온 그리즐리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공략조가 던전에 들어간 지 7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지만, 지금쯤이면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겠지. 보스 사냥을 유예한 채 출구를 유지하고 싶어도 그건 내 권한 밖이다."

"알고 있습니다. 모든 출구가 닫혀도 상관없어요."

그때 마침, 사슬에 붙들린 임모탈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에 박힌 게이트도 흐릿해진다.

"던전이 클리어됐군."

"네."

그리즐리가 전투 장갑을 꼈다.

"러시아는 기억한다. 그녀를 구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던질 만한 가치가 있지. 나도 가겠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건 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분들이 계시면 오히려 방해예요."

방해라는 말에 그리즐리는 팔을 내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군."

"저 사람들을 쫓아주신 것만 해도 대단히 큰 도움인데요, 뭘.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그리즐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세계의 그 누구라도, 나처럼 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해외에 나와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홍율은 여전히 전설이었고.

그녀의 분투는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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