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6화
'……으, 머리야.'
언제쯤 이 차원 이동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익숙해지지 않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싱그러운 녹색의 숲이 나를 반긴다.
키 큰 이계수들과 지구의 나무들이 뒤섞인 숲의 모습은 이제 세계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찌륵찌륵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바람이 불며 풀들이 쏴아아 흔들리는 소리. 조금만 자연에 몰입하는 것으로도 명상을 하는 효과가 난다.
나는 한결 맑아진 정신으로 몸을 일으켰다.
-탑주. 러시아 극동부 블라디보스톡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확인. 임모탈 지역은 이곳으로부터 700m 떨어진 곳입니다.
'좋아. 가자.'
대뜸 작전 지역에 나타났다간 총맞을지도 모르니까.
마력 파장도 감출 겸, 작전 지역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나타났다.
'근데 러시아 헌터들이랑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그런 고민이 들었다.
러시아 측에서는 내가 던전 지원신청을 했다가 한국 헌터협회 측에서 반려시킨 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지금의 나는 러시아와 아무런 약속이 안 되어 있다.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해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무슨 핑계를 둘러댈지 고민하고 있는데.
"……."
나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잠시 끊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나오시죠?"
소리 없이 날아온 탄환이 내 눈앞에서 딱 멈춘다.
끼기긱!
쉴드에 흠집을 내면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총탄이 이내 힘을 잃고 떨어져 풀밭을 구른다.
'저격이다.'
나는 발을 교차하고 몸의 중심을 뒤로 옮겼다. 내 몸이 기울어지는 동시에 바닥에서 커다란 드릴 형상의 디바이스가 솟아 나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무너지는 균형을 되찾으며 물러나자, 이번에는 주위의 대기에 심상찮은 마나 흐름이 감지된다.
틀림없이 원거리 고유 능력이다.
'쓰읍!'
나는 데바스타보다 시전이 빠른 리프부츠를 밟고 날아올랐다. 그 심상찮은 마나 흐름이 능력에 의해 팽창한다.
꽈아아아앙!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폭발하고, 공중에 붕 떠오른 내 몸이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러시아는 아닌 것 같은데.'
숲 곳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협회의 집행부입니다, 탑주.
'역시.'
당연히 임남진이 이끌던 집행부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좌천됐고, 지금의 집행부는 프로스트가 임명한 유닉스의 정예들을 비롯해 유닉스의 뒤편에서 궂은일을 도맡던 '처리부대'의 일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흙이 묻은 슈트를 툭툭 털었다.
"이유나 좀 듣고 싸웁시다. 왜 집행부가 자국 헌터를 다짜고짜 공격하는 거죠?"
주위를 포위한 헌터들 중에서, 한 남자가 기이한 팔자걸음으로 걸어왔다.
"출국 금지령 걸리신 양반이 할 소린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외형은 트레이닝복에 가까운 헌터슈트.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짝다리를 짚은 불량스러운 인상, 특히 쭉찢어진 눈매와 가는 턱선을 보고 누군지 확실히 알았다.
전(前) 유닉스 공인 3급, 헌터 네이밍 블랙잭.
"번거롭게 굴지 말고 투항해."
"그건 좀 곤란한데요."
나는 느긋한 태도로 옆머리를 긁적이면서 눈알을 굴렸다.
아직 놈들의 능력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자.
"그건 그렇고, 당신들 진짜 뭡니까?"
"음?"
"내가 던전에 들어가도, 홍율을 데리고 생환할 가능성은 1%도 안돼. 그냥 날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당신들 입장에선 더 편할 거 아냐? 근데 출국금지까지 내려놓고 러시아에서 미리 대기 타고 있는 건 대체 무슨 심보예요?"
아무리 사업가라도 1% 미만의 변수까지 고려하는 건 결벽증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걸 지금 프로스트는 자신의 심복인 집행부까지 파견해서 막고 있다.
게다가 프로스트는 내가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러시아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밑에 사미아가 있다는 걸 고려한다고 해도, 그녀가 타인과 함께 텔레포트 하지 못하는 텔레포터라는 사실도 협회라면 알고 있을 터.
부자연스럽다. 대체 뭐지? 프로스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건 우문이군. 명령에 의문을 가지는 바보가 어딨냐?"
블랙잭이 씩 웃으며 말했다.
"시키니까 죽일 뿐이야."
대화는 여기까지.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상태창을 보고 상대의 정보도 대강 입수했다.
나 하나를 잡기 위해서 프로스트는 상당한 인력을 투입했다. 다수의 공인 4, 5급. 그리고 나와 같은 3급은 최소 두 명 이상 있다.
'설령 공인 2급이라도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는 팔을 빙빙 돌리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약한 소리 할 때가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져나가야만 한다.
타아아앙!
총성이 들린다. 나무 위와 풀밭, 사방에서 마나를 머금은 탄환들이 들이닥친다. 총탄은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에아가 쉴드를 펼쳐 대응해 준다.
내가 신경 쓸 건 바로 전면으로 뛰어오는 두 명의 체술계 헌터들.
한 사람은 대검을, 다른 한 사람은 창을 들었다.
후웅!
나는 헌터가 휘두르는 대검을 보고 피하며, 반대편으로 찔러 들어오는 창을 쉴드로 받아냈다.
카각! 소리가 나며 창이 빗겨 나간다.
푸쉬익!
그런데 휘둘러 지나가던 대검 디바이스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대뜸 궤적이 역으로 수정된다.
"큭!"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공격 때문에 나는 허공에 쉴드를 깔고 텀블링해서 피해냈다.
비정상적인 공격에 의한 불안정한 회피. 이 틈을 놓칠 리 없는 창술가가 힘껏 창을 내질러온다.
'침착하게.'
나는 창을 끝까지 보며 고개를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뺨에 붉은 실선이 그어지며 창끝이 내 눈 옆을 지나간다.
부웅!
놈이 창을 회수하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회전한다. 휘두르기 동작 같아보이지만, 녀석의 코트 옆이 불룩하고 튀어나오는 게 보인다.
나는 본능적으로 쉴드를 펼쳤다.
타앙!
놈의 코트를 뚫고 발사된 총알이 쉴드에 부딪힌다.
'이것들이……!'
확실히 다르다. 그동안의 대헌터전이라고 해봐야 베고 찌르고 베고 찌르고 뭐 그런 몬스터 사냥에 특화된 헌터들만 상대해 왔는데, 집행부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훈련해온 헌터들이다.
모두가 인간을 속이고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다. 변칙기와 페이크 플레이는 기본으로 나온다.
-탑주!
'미안, 에아! 조금만 더 버텨줘!'
그리고 우리가 근접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저격수들은 계속해서 나를 쏘고 있었다.
에아도 변칙 사격과 궤적이 휘어지는 공격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총격 때문에 슈트 게이지는 빠르게 깎여나가고 있다. 뒤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번엔 봉과 도끼를 든 헌터들이 내 진행 방향을 가로막았다.
나를 포위한 네 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춤을 춘다.
후웅!
화악
앞뒤 좌우 네 방향에서 무기들이 휘둘러진다. 나와의 거리를 교묘하게 유지한 채 헌팅 디바이스의 리치만으로 치고 빠진다.
정직한 공격 따윈 없다. 모든 공격이 변칙의 연속. 게다가.
'이것들은 아군이 맞는 것도 상관 안 하는 거야?'
아군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싸우고 있는데 원거리 사격은 계속 된다. 심지어 체술계 헌터들은 공격 궤적이 겹치기도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철저히 슈트 게이지를 빼놓기 위한 포위 스크럼. 벌써 슈트 게이지가 간당간당 하다.
이대로는 내가 당한다. 내 특기인 난전으로 유도해야 한다.
<파이어 캐논>×30
허공에 다수의 화염구를 만들었다.
이것으로 모든 격수들을 동시에 타격하고, 연막을 일으키면…….
짝!
박수 소리가 들렸다. 하늘의 마법진들이 물결처럼 출렁이더니 이내 대기의 마나 상태로 되돌아갔다.
"당신에 대한 공략은 끝났습니다. 김유신 헌터."
저 멀리서 손뼉을 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공인 3급의 '웨이브 마스터'다.
"당신은 마법을 사용하려면 마법진을 펼쳐야 하죠. 어떤 마법을 구사하던 제가 더 빠릅니다."
하드 카운터잖아. 망할.
다시 근접 헌터들이 주위를 포위해 온다.
'그렇다면 즉시 시전이 가능한 마법으로 시간을 벌고.'
나는 오른손에 건를릿을 착용하고는 힘껏 바닥을 내려쳤다. 주위의 흙이 산탄처럼 퍼져 나가며 모래 연막이 쳐진다.
<물의 장막>
바로 이어지는 페이크.
내 몸이 세 개가 되어 동시에 연막을 빠져나간다.
혼란을 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본체인 내 이마 위로 녹색 점이 찍힌다. 살짝 당황하던 헌터들이 바로 녹색 점을 보고는 나를 뒤쫓아 온다.
'와, 설마 물의 장막까지 공략한거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나를 레이저 장비로 가리키고 있는 탐지계 능력자가 보인다.
틀림없이 저 녀석이다.
그때 주위의 마력이 불안정하게 바뀌며, 근접 헌터들이 포위를 풀고 좌우로 흩어진다.
-탑주! 아까 그 폭발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공간 전체를 감싸는 라운드 쉴드를 펼쳤다. 잠시 후 맹렬한 폭발이 터져 나오며 내 주위가 시꺼먼 연기로 둘러싸인다.
'차라리 잘 됐어.'
자세를 숙여 오른발에 데바스타를 착용하고는, 폭발 연기 밖에 있는 놈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에아. 바로 현장으로 도망치자. 놈들도 러시아 헌터들 앞에서는 막 나가진 못하겠지.'
-지금으로썬 최선의 판단으로 사료됩니다.
<데바스타>
바닥에 해골 문양을 그리며 내 몸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다. 순식간에 폭발 연기를 뚫고 놈들의 포위를 빠져나오는데.
투웅!
갑자기 앞에 푹신한 뭔가가 부딪혔다.
충격은 없었다. 정확히는 충격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 몸이 도로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내 앞에 보이는 건 구름이었다. 고유 능력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인 구름.
데바스타로 쏘아져 나가는 그 속도를 계산하고 반응했다.
'설마 데바스타까지……!'
"하하! 공략 다 끝났다니까!"
풀숲을 뚫고 누군가 달려온다. 망할, 블랙잭이다.
놈과의 접근전은 위험하다.
아이스 자벨린을 연달아 꺼냈지만 이번에도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진이 사라져 버렸다.
"붙어보자, 대마도사!"
어쩔 수 없다. 양 주먹에 건틀릿을 켜고 놈과 맞선다. 접근해 온 그가 오른손으로 스트레이트를 내지른다.
'고개를 틀어 피하고 카운터.'
쩌억!
그러나 충격은 왼쪽에서 왔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만한 타격.
스트레이트 동작이 수정되며 그의 왼손이 잔상이 남길 만큼 빠르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저게!'
퍽! 우득! 콱!
주먹이 연달아 내 몸에 박힌다.
대처가 불가능하다. 왼손 펀치를 보여주고 오른손 잽, 로우킥을 보여주고 머리로 오는 브라질리언 킥.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려 할수록 오히려 내 움직임만 더 꼬인다.
"딱 고만고만한 정도네."
전력을 다한 내 펀치를 가볍게 쳐낸 그가 씩 웃는다.
"마나를 피스톨 삼아서 위력은 강하지만, 결국 허접해. 너 제대로 된 체술 트레이닝 받아본 적 없지?"
으적!
잔상 있는 발차기가 내 턱에 꽂힌다.
"그게 날치기의 한계야."
골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으며 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놈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특기인 마법은 봉쇄. 좀 한다는 체술도 진짜를 만나니 무력해. 심리전과 완급조절? 그런 게 다굴당하는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야?"
빠악!
녀석의 발끝이 얼굴에 부딪혔다.
나는 피를 흩뿌리며 바닥을 굴렀다.
으으, 더럽게 아프다. 슈트의 역장효과는 몸을 덮지 않은 얼굴도 방어해 주지만 충격이 들어오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당신도 협회장님의 1급 후보라고 들었는데, 줄을 잘못 타니 이 꼴이지."
"……쿨럭! 큭!"
"아직 늦지 않았어. 마지막 기회를 줄게."
그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웃었다.
"지금이라도 협회장님께 충성을 맹세하겠나?"
나는 씩 웃는 얼굴로 중지 손가락을 들었다.
"X까. 난 누구에게도 충성 안 해."
빠아아악!
순간 세상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공중에서 몇 바퀴나 회전하다가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무력하네.'
몬스터가 아닌 암살자들과의 실전.
무력했다. 너무나도.
물론 마법사는 다른 포지션의 지원을 받아야 제 활약을 펼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가 누구라도 내가 원하는 전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4공정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는가. 몬스터 수천을 지울 수 있는 5공정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는가.
쓸 수가 없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국 다대일의 급박한 실전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2공정 물량마법 정도.
그러나 그것도 하드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파장계 능력자에게 막혀 버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 빠른 마법.'
내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6공정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