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5화
러시아에 전화하기 전, 신나라는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다.
"공문을 올리면 헌터협회의 귀에 제일 먼저 들어갈 거예요.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프로스트란 사람에 관해서 좀 연구해 뒀죠. 지금 그는 홍율 협회장을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렸다는 의혹을 안고 있습니다. 그게 역린이고, 협회장 생활에 가장 민감한 스캔들이죠. 그런데 홍율 협회장을 구하러 나선다는 헌터를 막는다? 스스로 의혹을 증폭시킬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아, 알겠습니다."
신나라 대표가 매니저들과 통화했다. 매니저들은 바로 파견 절차를 밟으며 러시아 측과 접촉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렸나?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를 받던 신나라가 말했다.
"러시아 측에서 의아해하던데요? 이미 임모탈은 무력화시켰고 던전공략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와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면서요."
"어떻게든 꼭 가고 싶다고 설득해주세요. 작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왔다 간다고."
신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전화를 붙들었다. 그 결과.
"됐어요! 러시아 측에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역시 신 대표님!"
"비행기는 내일 아침 일찍 가시는 거로 잡아드리면 될까요?"
잠깐 고민했다.
사미아의 워프로 가도 되기는 하는데, 괜히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려면 정식 절차를 밟는 게 좋겠지.
"오늘 밤 비행기로 부탁드릴게요. 한시가 급한 사안이라서요."
"알겠습니다!"
절차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 신나라는 추가적인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마탑으로 돌아와 장비를 점검했다.
마나 엔진 비행기로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한 시간 조금 더 걸린다. 공항에서 현장까지 거리도 가까워서 윙 골렘을 타면 바로 도착할수 있다.
계획은 완벽하다.
러시아로 간다. 임모탈 던전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6층 시련을 일으킨다. 시련을 클리어하고 던전의 핵심에 도달한다. 던전을 해킹하고 홍율을 구해내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린다.
'좋다, 좋아.'
띠링!
아무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한참 장비를 점검하는 중에 내 스마트폰으로 문자가 왔다.
[귀하는 『출입국관리법』제4조에 따라 아래와 같이 출국금지 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이런 미친……!"
문자를 본 뒤에 바로 신나라로부터 통화가 왔다. 나는 그녀의 전화를 받으면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김 헌터님! 큰일 났어요!
"방금 출국금지 문자 받았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기사 떴어요! 포털 사이트에서 알케미아라고 검색해 보세요!
바로 노트북으로 검색해 보았다.
유명 언론사 메인에 떡 하니 내 이름이 붙은 기사가 떠 있었다.
[알케미아-전 헌터협회장 유착 의혹. 대표 김유신 수사 착수. 출국금지조치.]
프로스트가 선수를 쳤다.
'끙, 이건 내 오판이야.'
현재 프로스트 정권의 가장 민감한 스캔들은 '홍율 협회장' 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극도로 조심할 줄 알았는데, 바로 알케미아 건을 걸고 넘어져 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내가 프로스트란 사람에 대해서 뭔가 잘못 알고 있나?'
헌터의 출국은 의무적으로 협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프로스트는 내가 블라디보스톡에 가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내 목적이 재앙 임모탈 던전의 출입이 목적이라는 것까지 추측했으리라.
그러니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줄 알았다.
나야 뭐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지만, 외부인이 봤을 때는 저게 뭔 미친 짓이냐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에서 사라진 홍율을 러시아 던전에 들어가 찾는 것도, 찾아서 제시간에 데리고 나오는 것도 한없이 불가능한 확률.
그런데 프로스트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의 스캔들에 한층 더 의혹을 가중시키는 리스크를 안고 출국 조치까지 내렸다.
일말의 가능성도 차단하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뭔가를 더 알고 있는 걸까?
"탑주."
에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허공에서 나타났다.
"왜 그래?"
"탑주가 계약한 원룸에 침입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원룸은 별거 아니고, 서류상 주거지가 필요해서 일부러 상계동에 저렴한 곳을 하나 계약해 뒀다.
에아는 감시카메라 화면을 띄웠다.
'와, 막 나가네 이것들.'
창문으로 들어와 내 방을 샅샅이 뒤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영상에 찍혔다.
허리에는 헌팅 디바이스를 차고 있고 손에는 총을 들었다. 차림을 보아하니 전부 집행부 요원들이다.
"에아. 이 자료 화면이랑 내 출국문자 메시지 파일로 만들어서 신 대표님한테 보내. 여차하면 프로스트의 의혹을 부풀리는 용도로 쓸 거야."
"알겠습니다."
"기왕이면 이 사람들 얼굴 대조해서 집행부라는 사실을 확실히 했으면 좋겠고."
"그 작업도 처리하겠습니다."
에아가 내가 시킨 일을 하러 사라졌다.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하아, 마탑이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다행스럽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프로스트는 마탑의 정체를 모르고,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다.
하지만 안심하고 있을 때만은 아니다. 곧 내 행적이 상계동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테고, 최악의 경우 서울의 버려진 흉물에 의구심을 품게 될 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는 속도전. 모든 행동은 신속할수록 좋다.
"김유신 헌터. 무슨 일로 불렀나?"
내 연락을 받은 사미아가 9층에 올라왔다.
"지금 바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야 합니다. 워프 하나 만들어 주실 수 있죠?"
"음. 워프 마법진에 여분이 없어서 제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두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괜찮겠나?"
"그 정도면 딱 좋네요. 지금 바로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에게 이동할 위치를 알려주었다. 사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5층으로 되돌아갔다.
띠링!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엔 또 뭐야?'
불안한 마음으로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그런데 보낸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선배.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다름 아닌 홍연이다.
언니가 사라진 이후, 어떤 연락도 받지 않았던 그녀였다.
'이 녀석 괜찮을까.'
사미아가 워프 마법진을 제작하는 중이니까 아직 시간은 좀 있다. 그런데 바로 약속장소를 이야기해 버리면 우리 위치를 들킬 염려가 있으니까.
나는 에아를 이용해 우회해서 발신자 표지 제한의 국제 문자를 보냈다.
[암호화 알고리즘 메시지 어플]
그녀가 이 링크를 누르면 위지 좌표 메시지가 뜬다.
* * *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나섰다.
한적한 공원. 예전에 자주 들렸던 곳이다. 평일에다 바쁠 시간이라 그런지 유난히 조용했다.
홍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았으니 기다려 봐야겠다는 생각에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
그러다 문득, 벤치에 앉아 있는 홍연을 발견했다.
모자로 빨간 머리를 숨긴 채, 차분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 그녀.
문득 묘했다. 미궁 던전 때 경주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가 떠오른다.
"빨리 왔네."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
나는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
"……."
어색한 침묵이 일었다. 경주에서 만난 그때처럼.
그래도 나름 아프리카에서 이런 저런 고난을 겪으며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뭐, 상황이 상황인지라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럴 상황이 아니긴 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반짝이던 헤이즐넛 빛깔의 눈동자는 총기가 없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선배."
"응.
"저 내일이면 남극에 파견가요."
가슴이 철렁했다.
"야, 말도 안돼! 아프리카 갔다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남극을 가?"
그녀는 씁쓸하게 웃을 뿐,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프로스트의 짓일것이다. 임남진과 전 집행부 요원들을 좌천시키고 해외에 뺑뺑이 돌리는 것처럼, 그녀도 한국에서 내보내 힘을 떨어뜨릴 생각이다.
남극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돌아와도 의미가 없다. 그녀가 굴복할 때까지, 프로스트는 몇 번이고 그녀를 위험한 오지로 보낼 것이다.
"협회에서 나올 생각은 아니지?"
"네."
"잘했어."
그렇다고 협회를 나오는 순간, 상황은 더 악화될 우려가 있다.
프로스트는 이번 재앙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핑계로 전시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녀가 평헌터로 돌아가면 전시령을 이용해 지금보다 더 위험한 파견지에 보낼 것이다. 언제 어디서 제거당할지 모른다는 소리다.
그래서 임남진도 협회 소속을 유지 한 채 버티고 있었다. 이 전시 상황만 해제되면 반격의 여지가 생긴다.
한국 정부는 다 한통속이니 의미없고, 헌터 연맹에 부당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프로스트의 행적에 브레이크를 걸 수도 있다.
내가 이런 저런 복잡한 셈법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언니는."
"음?"
"언니는 틀림없이 살아 있을 거예요."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분이 그리 쉽게 당했을 리가 없지."
"일본으로 갈 거예요."
"갑자기 거긴 왜?"
"일본 가고시마 현에 아직 열려 있는 임모탈 던전이 있다고 해요. 오늘 저녁에 저택에 있는 마력헬기를 타고 가서 언니를 구하러 가겠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쩜내가 생각하는 것과 이렇게 똑같냐.
"너 그거 명령 위반인 거 알지? 들통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처형이야."
"알고 있어요."
"그리고 임모탈 던전에 들어간들, 협회장님을 찾을 가능성은 1% 이하야."
"그래도!"
그녀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에 꾹 힘을 쥐었다.
"이대로 그냥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
나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남극에 가겠다고 약속해."
"못 해요."
"약속해 주면, 내가 러시아에 갈게."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너보다 내가 가는 게 성공 확률이 훨씬 더 커. 나는 나만의 방법이 있거든. 너도 옆에서 봤잖아? 내가 미궁던전에서 보스존에 포탈 수십 개 열어젖힌 거."
"……설마."
"응. 내겐 던전이 닫혀도 빠져나올 수단이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어 보였다.
"협회장님 찾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까지 일본에서 조난당하면 수고가 두 배로 들잖아. 안 그래?"
"……."
나는 깜짝 놀랐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주먹 위로, 물방울이 투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호, 홍연……"
그녀가 우는 모습은 처음 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홍연이 내셔츠를 꾹 붙잡았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눈물 젖은 갈색 눈동자로, 그리고 더 없이 처연한 목소리로, 그녀는 내게 마법을 걸었다.
"제발 언니를…… 구해주세요."
* * *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나를 믿고 남극으로 가기로 했다. 홍연을 만나고 나니 책임감이 더 막중해지는 것 같다.
'하아.'
그녀가 우는 모습의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감성에 젖어 있을 틈도 없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때다.
-탑주. 차원지기가 워프 마법진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알았어. 5층으로 가면 되지?'
나는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했다.
사미아가 진지한 얼굴로워프게이트 옆에서 있었다.
"지시한 대로 블라디보스톡에 좌표를 걸어두었다. 워프 이후 강한 마력의 파장이 발생하니 균열이나 던전 게이트로 오해하는 헌터들을 조심해라."
"고맙습니다. 사미아."
내가 워프게이트 앞에 섰다.
"김유신 헌터.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나?"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역시 나라도 따라가는 게……"
"괜찮습니다, 사미아. 이건 제 시련이니까요. 혹시 제가 실패할 경우의 수를 대비해서라도 남아서 던전 워프 마법진을 개발해 주세요. 3급이시니까 다른 멤버들도 지켜주시고요."
"…… 알겠다."
우리는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진 마라."
"그럼요."
사미아가 워프게이트를 작동시켰다. 좌표 마법진과 워프게이트가 연동되며, 워프게이트의 이동 방향이 틀어진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게이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