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4화
프로스트에게 불려온 홍연은 이번에 새롭게 바뀐 협회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자리에 섰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동안 자네가 좀 어려웠어."
프로스트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 대단하신 분의 여동생이라는 배경도 그렇고, 자네가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도 특히 더 그렇지. 눈부신 은백색의 갑주를 입고, 불꽃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사람들을 거느리고 당당히 앞을 응시하는 모습에는 나조차도 감탄하게 되더군. 영웅다운 품성. 사실 나한텐 없는 요소야. 그런데 말이야."
한국의 왕좌라고 할 수 있는, 헌터협회장의 의자에 앉은 프로스트가 턱을 쓰다듬으며 홍연의 차림을 품평하듯 훑었다.
"그렇게 누구보다 빛이 나던 자네가, 내가 디자인한 정복을 입고, 규격화된 검정 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헤어망에 그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숨기고, 정복 모자를 쓰고, 규정으로 정해진 똑같이 균일한 7단계의 화장을 했군. 이렇게 보니 마치……"
프로스트가 입꼬리를 쭉 찢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평범한 여사원들과 다를 바가 없군."
"……."
"그래. 바로 이게 '시스템'이야."
프로스트가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규정이란 게 그렇지. 안 그런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아무리 특출난 개인이라고 해도 시스템에는 복종하지. 자네만 해도 꼼짝없이 그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지 않나?"
다시 한번 홍연의 차림을 감상한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시스템이야말로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고 생각해. 신기하지 않나? 공통된 비전을 가진 조직 안에서 개인이 부품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면,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비범한 결과를 이룰 수 있거든! 자네 같이 태생이 비범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말이야!"
듣다 못한 홍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인간을 부품이라고 표현한 시점부터, 인간이기를 포기한 게 아닐까요?"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인간은 톱니바퀴고, 조금 더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못 돌아가는 톱니바퀴, 그리고 불량품이 있을 뿐이야. 딱 그것뿐."
프로스트가 턱을 괴며 홍연을 응시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그렇지. 더 원활한 공정을 위해 그런 불량품들을 가려내는 일들 말이야."
"협회장님. 연설을 하려고 저를 부르셨나요? 이제 그만 용건을 말씀해주시지요."
협회장을 발음할 때, 그녀의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스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좋아.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 밑으로 들어와라, 홍연 헌터."
"저는 이미 당신 조직에 속한 직원입니다만."
"아니, 아니. 그런 형식적인 거 말고."
프로스트의 눈이 번뜩였다.
"자네가 내 시스템의 핵심이 되어 줬으면 해."
"……."
"인간은 딱 부품일 뿐이지만, 가끔은 대체 하기 힘든 중요 부품들도 있거든. 그게 바로 자네야."
프로스트가 손가락으로 리듬감 있게 책상을 두들겼다.
"나는 새로운 협회장으로서, 새로운 공인 1급 헌터를 내 임기 안에 배출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어. 바로 그 핵심적인 역할을 자네에게 맡기려는 거고."
"……."
"자네도 그러기 위해 그 정복을 입고, 붉은 머리카락을 헤어망에 숨기고, 어울리지도 않는 짙은 화장을 하고 내 앞에서 있지 않나."
책상을 두들기던 프로스트가 검지를 뻗었다. 그러곤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협회 규정을 제대로 숙지 안 했군? 여자는 오른손이 왼손 위로 올라가지."
"……."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순간 프로스트마저도 어깨를 움찔 할 정도의 위압감이었지만, 결국 홍연은 눈을 질끈 감고 자세를 수정했다.
"아, 그리고 손이 너무 내려왔어. 아랫배 부근, 배꼽을 살짝 가리는 느낌으로…… 그래, 그래. 바로 그렇게 하는 거야! 하하하! 미안하네. 내가 괜히 이런 거에 민감해서. 아무튼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나는 자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선사할 생각이야. 대한민국의 모든 역량과 유닉스의 방대한 자본을 자네 한 사람의 성장을 위해 때려 박을 용의가 있어."
이야기를 하던 프로스트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만약 자네가 내 돈을 받아먹어 무럭무럭 성장한 뒤, 언니의 복수를 하겠다고 덤벼든다고 해도 말이야."
이야기를 듣던 홍연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온라인상에 가끔 그런 음모른이 떠돌더군. 앙심을 품은 내가 홍율 선배님의 뒤통수를 친 거라고. 뭐, 헌터계가 워낙 흉흉하니까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 이해는 하지만 음모른은 음모른 일 뿐, 나는 결백해. 전부 사고였고, 그분의 은혜 덕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어. 나야말로 전대 협회장의 유지를 잇는 사람이야."
프로스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홍연과 눈을 마주했다. 홍연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믿지 않는 눈이군."
"……."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3년 안에 한국에서 공인 1급 헌터를 배출한다는 공략을, 자네는 자네 나름의 목적을. 일단 양쪽 모두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서로 협조할 수 있지 않겠나?"
프로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리를 바꿔 꼬았다.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겠네. 그동안 자네가 받아본 적 없는 파격적인 지원을. 대신 딱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뭡니까?"
프로스트가 다리를 내밀었다.
"내 발밑에 엎드려 구두에 입을 맞춰라."
"……!"
"무얼,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진말게. 발등 키스는 고대시대부터 이어져 온 간단한 테스트지."
프로스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같은 목표를 위해 달려나가기만 하면, 그 후에 내 운명이 어찌 되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염려 하는 건 과정 중간에 자네가 돌발행동을 저지를까 하는 거야. 그런 건 정말 싫거든."
방 안에 서리가 낀다. 온도가 서서히 떨어진다.
"자꾸 묘하게 신경 쓰여. 자네가 불량품인지 아닌지 의문이 든단 말이지. 그러니 자네가 톱니바퀴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턱을 쓰다듬던 프로스트가 더 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사욕을 숨기고 사회에 굴복할 수 있음을, 사회 부적응자가 아님을!"
그녀는 제자리에서 못이 막힌 듯 서 있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프로스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뭐 인간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질 낮은 성희롱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누구나 하는 절차야. 나도 자네 언니의 발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한 적이 있지. 시스템에 복종하고, 굽힐때 굽힐 수 있다는 게 바로 불량품이 아니란 증거야."
그가 끌끌 웃었다.
"자아, 눈 딱 감고 한 번의 굴욕만 참으면! 그렇게 하면 이 나라의 헌터계 전부를 넘겨주지! 공정의 가장 위, 최고로 빛나는 황금의 톱니바퀴가 되어 자네가 돌아갈 때마다 자네 아래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수천만 톱니바퀴들의 소리를 들려주지!"
프로스트가 눈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자! 어서!"
"하아."
홍연은 대답 대신 여러 감정이 담긴 한숨을 늘어뜨렸다.
그러곤 정복 모자를 손으로 꽉 쥐더니 프로스트의 얼굴에 소리 나게 내팽개쳤다.
"……!"
뒤이어 헤어망을 잡아 뜯었다.
물결과도 같은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흘러나왔다.
"역겨워서 더는 못 듣겠습니다. 프로스트."
"잠깐, 이봐!"
"그 오만과 독선. 세상이 전부 당신 발아래에 있는 것 같습니까? 천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막을 겁니다. 당신의 그 더러운 짓거리를 세계에 까발리고 말겠습니다."
프로스트가 킬킬 웃었다.
"그게 자네의 대답인가."
"돌아가겠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협회장실을 나가 버렸다.
'예상하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됐군.'
프로스트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신의 턱 밑에 대고 고민했다.
그러다가 책상에 놓인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남극에 갈 장기 파견자가 정해졌다."
* * *
시간이 지나도 사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럴 때 Top 10 길드들이 똘똘 뭉쳐 협회를 견제해야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일단 서열 1위인 유닉스부터가 친헌터 협회 길드였고, 길드마스터를 잃은 블랙가드와 NIX는 궤멸 상태.
거기에 갑자기 2개의 길드가 돌연 프로스트의 지지를 선언했다.
나머지 다섯 길드의 힘만으로는 프로스트를 어쩔 수 없었다.
여론 쪽도 마찬가지였다. 민간인들이 대부분 프로스트의 정책을 찬성하고 있는 가운데, 헌터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헌터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말이 많았다.
[생각해 봐. 원래 헌터란 직종이 젊을 때 바짝 땡겨야 하는 수익구존데, 이게 길고 가늘게 버는 거로 바뀐 것뿐이잖아. 연금 생각하면 수입총액은 큰 변함 없을 걸?]
[국가 소속인 게 좋지. 연금 타는 공무원이고, 안정적이고.]
[맞음. 다들 협회 직속 헌터 되려고 그리 애를 쓰면서 해준다니까 또 난리네. 어느 장단에 맞추란 거냐?]
[은퇴 후 치킨 튀기기 VS 연금 타먹으면서 해외여행 다니기.]
[반대하는 애들 다 5급 따리인 거 아시죠? 괜히 일반인들한테 갑질 못하게 되고 4급들한테 꽉 잡혀 살라니까 저러는 거.]
긍정적인 의견도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을 공무원이랍시라고 자위하는 니들 정신 상태가 제일 궁금하다. 부모님은 무탈하시고?]
[통제받는 삶이 좋을 리가 있나요?]
[요즘 것들 군대 안 가봐서 저런 말 나옴. 밖에서 보면 밥도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고 마냥 좋아 보이지? 한번 가봐라.]
[세상이 진짜 미쳐 돌아간다. 빡대가리들 선동충들 천지야.]
[은퇴가 답이다.]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힘을 합쳐 하나로 단합해야 하는 상황에 헌터들마저 조금씩 의견이 갈리는 상황.
물론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쪽이 더 많았지만 이대로는 애매했다.
프로스트는 유닉스의 거대 자본과 정부 및 국민들의 지지를 업고 자신의 정책을 터프하게 강행했다. 잔뼈굵은 3급 이상의 상위급 헌터들이야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지만, 내가 보기엔 너무 안일한 행동이다.
결국은 시스템이 정착되면 누구든지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뭐, 지금은 그런 걱정할 때가 아니지.'
나는 신나라 대표와 자주 만나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러시아에 가시겠다고요?"
그녀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네. 홍율 협회장은 아직 살아 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 말엔 동의하지만…… 그런데 러시아는 왜요?"
"당연한 이야기죠."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재앙 임모탈의 던전은 하나로 연결된 던전이잖아요? 아직 닫히지 않은 러시아의 재앙 출입구로 가서 협회장을 찾아 데려 올 겁니다."
"그, 그건 말도 안돼요! 사막에서 바늘 찾기라고요! 게다가 이제 곧 모든 임모탈이 잡히고 게이트가 닫혀 버릴 텐데……"
"수색 방법과 빠져나올 수단은 전부 생각해 뒀습니다."
나는 미궁사태 때 던전의 핵심을 장악하고, 던전의 모든 포탈을 보스존으로 연결했다는 이야기를 설명했다. 신나라는 진중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김유신 헌터님은 던전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거네요."
"네, 던전의 출입구가 완전히 닫혀도 저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만약 협회장을 찾지 못해도 저 혼자 빠져나오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신나라가 너무 걱정해서, 일단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런 저런 머리를 굴려보던 그녀가 결국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김 헌터님은 계산이 안 서는 분이시네요."
"……하하."
"그래도 지금까지 김 헌터님이 해내신 수 많은 기적들이 어딜 가는 건 아니까요."
그녀는 바로 휴대전화를 들었다.
"러시아 측에 알릴 내용은 '재앙 임모탈의 우호적 파견 지원' 정도면 괜찮겠죠?"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의 허락도 떨어졌다.
드디어 반격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