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2화
박정양이 새로운 협회장을 발표한 뒤, 프로스트가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말을 고르려다가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잠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셔터 세례가 미친 듯이 쏟아졌다.
"홍율 협회장님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프로스트는 연설과 연줄의 대가였다. 그의 실감 나는 이야기에는 모든 청중이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며, 합리적 이유를 곁들은 설명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됐다. 그만큼 프로스트의 화술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전 협회장 홍율은 막무가내라는 이미지가 무척 강했다.
그렇기에 이 스마트하고 신사적인 젊은 헌터의 이미지는 대중과 기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프로스트가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국민 여러분께 약속하겠습니다! 3년, 딱 3년 안에 제가 대한민국을 아시아 최고의 헌터 강국으로 바꾸어놓겠습니다!"
단호한 어투, 확신에 찬 눈빛, 자신감 넘치는 제스쳐,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프로스트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다.
"우리들은 3대 미궁 세대를 비롯해, 전 세계가 부러워 하는 최고의 유망주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변화된 헌터 육성 프로세스 속에서, 대한민국의 떡잎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지원을 받으며 성장할 겁니다. 더 이상 공인 1급 보유국이 아니라고 실망하지 말아주십시오. 이번 일을 계기로 더 많은 미래들이 나타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은, 한 명의 특출한 엘리트가 이끄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가 두 팔을 펼쳤다.
"All for One! 이제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입니다!"
"와아아아아!"
곳곳에서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다.
프로스트는 연설을 마치고 강단 뒤로 빠져나왔다.
"인상적인 연설이었네."
그곳에는 박정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악수를 건네자, 프로스트는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를 받았다.
"대통령님께서 주신 기회,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허허허!"
박정양도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래, 이래야지! 이래야 협회장이지!
허구한 날 사람 죽일 듯이 째려보고, 앞에서 바닥에 침을 찍찍 뱉고, 참담한 욕설을 쏟아내는 협회장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흠흠, 그런데 물건은……"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깨끗이 세탁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아."
물론 이 남자를 새로운 협회장으로 앉힌 대가로, 박정양은 자기 후손까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금전적지원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내 협회장만 믿겠네."
"기대해 주십시오."
* * *
오랜만에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았다.
새로운 협회장 프로스트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 게시글들 중에서 조회수 1위를 기록한 영상이 있었다.
[협회장 프로스트의 인성 재평가.]
뭔가 싶어서 영상을 실행해 보았다. 현장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건지 화질은 좋지 않았다.
홍율이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었고, 프로스트는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식구들이 던전에서 생사불명입니다. 모두 유닉스에서 동고동락한 제소중한 가족들인데 어떻게 마냥 손놓고 있겠습니까! 저희가 정 못 미더우시면 협회장님과 함께 들어가는 것 정도는 허락해 주십시오!]
[야, 너 진짜 뒈지고 싶…….]
홍율이 발끈하는 것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이런 일도 있었구나.'
나는 바로 아래의 댓글을 확인해보았다.
[그래, 협회장은 이런 사람이 돼야지.]
[솔직히 홍율은 그냥 쌩 양아치야. 인성이 글러 먹었잖아. 아직도 1급이라고 홍율 빠는 흑우 있냐?]
[프로스트 다시 봤다. 재벌 출신이라 좀 거만한 이미지였는데. 자기 식구들 챙긴다고 무릎 꿇고 비는 거 봐라. 저런 사람이 협회장 되는 게맞음.]
[그냥 홍율이 홍율했다. 독선적인 지도자보다 조직을 중시하는 프로스트가 훨씬 낫다.]
[사실 미궁 던전 때도, 이번 임모탈 때도, 홍율과 헌터협회가 더럽게 무능했다는 건 증명됐지.]
인터넷 곳곳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적어도 이 영상에서만큼은 프로스트 협회장이 더 낫다는 사람들의 반응이 훨씬 많았다.
이것 외에도, 그동안 홍율이 막무가내로 저질렀던 일들만 짜깁기된 글들이 올라오며 점점 프로스트 협회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댓글을 보고 있는 나는 어쩐지 입맛이 썼다.
'레전드가 되어도 별 의미 없구나.'
방식은 과격했지만, 그렇게 의무감으로 몸 다 상해가면서 뛰는 헌터가 없었다.
인류에 대한 어떤 공헌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녀의 인생을 심하게 깎아내리는 것에는 나도 반감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닥칠 11랭크 재앙 네메시스.
홍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녀의 도움 없이 이걸 막아내는 게 가능할까?
'이대로 그냥 앉아 있을 순 없어.'
아무래도 마탑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홍율 같은 사람이 던전에서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게이트가 닫혀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정서진의 말에 따르면, 이번 재앙에 나타난 던전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하나의 대륙이 던전으로 존재하고, 지구에 나타난 게이트는 그저 대륙으로 향하는 출입구라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만 따지면 밀양 게이트에 진입해서, 홍천 게이트로 빠져나올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던전에 들어가면 통신도 불가능하고, 지도도 없고, 지형도 복잡하며, 수 많은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다.
출구를 찾아서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그냥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더욱이 한국에서는 모든 던전이 클리어된 상태.
사람들이 실종 처리된 헌터들을 사실상 사망했다고 여기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마탑에는 아직 방법이 있다.
바로 제6층 시련.
[미치는 줄 알았다. 6층 시련에 적합한 던전을 찾느라 엄청 시간을 소모했다.]
안톤의 일기에 따르면, 6층 시련은 지금까지 나온 시련 중에서 '최고의 스케일'을 자랑한다고 한다.
이것을 좁은 탑 안에서 재현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는 모양.
그래서 이번 6층 시련은 던전에 들어가서 작동시켜야 한다.
'바로 이거지.'
내 손에는 작고 딱딱한 검은색 콩같은 것이 들려 있다.
안톤의 일기 내용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6층 시련에 다다랐을 때, 평소처럼 이런 플레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련의 마법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련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내가 도전한다고 말하자 시련의 공간에서 바로 이 새까만 콩알 같은게 떨어졌다. 외견만 보면 그냥 말랑말랑한 촉감의 콩이지만, 사실 이게 시련을 여는 방아쇠다.
이것을 적정규모의 던전에서 작동시키면 비로소 최고 스케일의 6층 시련이 열린다.
그리고 이 시련을 클리어하면 동시에 던전을 클리어한 것으로 계산되어, 던전의 핵심체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거기까지만 가면 던전을 해킹해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홍율을 찾아내는 것도, 홍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도 가능하다.
"탑주."
내가 9층에서 세부 계획을 짜고 있는데 에아가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프로스트가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어? 벌써?"
"예. 그가 헌터계에 새로운 정책들을 도입했습니다."
사실 프로스트가 새로운 협회장이 됐을 때, 여러 부정적인 의견들 중 하나가 '그래도 뭐가 바뀌겠어?' 였다.
결국 다 똑같을 거면서 입만 번지르르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프로스트는 이런 지적을 보란 듯이 뒤엎었다.
'이 사람……'
에아가 홀로그램 화면으로 띄워준 글을 읽어본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하루아침에 준비해서 될 게 아니다. 그만큼 방대한 양이었고,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프로스트는 오래전부터 협회장이 될 준비를 해온 것 같았다.
[헌터 복장 일체화.]
: 석 달의 혼용 기간을 둔다. 대한민국 모든 헌터에게 동일한 외형의 의복을 입도록 하여 소속감과 일체감을 부여한다.
현재 헌터들의 복장은 자유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정장이나 노줄 없는 단색 헌터 슈트를 입는 정도의 격식이다.
그런데 이 정책은 헌터들의 평상복은 물론, 슈트까지 통제한다.
앞으로는 대한민국의 모든 슈트가 기능이나 외형은 달라도, 외형이나 색깔, 문양 같은 것은 통일되도록 국가에서 통제할 것이다.
능력의 편차 때문에 특수한 개인슈트를 입어야 하는 경우, 슈트 위에 협회 정복을 겉에 걸쳐야만 한다.
던전 안에 들어가거나 전투가 벌어질 때 비로소 본래의 슈트 차림으로 싸울 수 있다.
"의복의 자유 박탈이네. 그럼 다음은……."
[헌터 제식 통일 확립제.]
제목만 봐서는 뭔지 잘 감이 안왔는데, 내용을 읽어보니 아까 정책의 연장이다.
헌터는 등급제지만, 상위 등급의 헌터랍시고 반드시 경례를 해야 한다거나, 상급자 대우를 해줘야 한다거나 그런 법적으로 정해진 룰 같은건 없다. 그냥 다른 회사 다니는 동종업계 선후배 관계다.
하지만 이제는 군인들처럼, 급수가 낮은 헌터는 반드시 높은 헌터에게 경례하고 상급자 대우를 해야 하는 게 규정화됐다.
경례 구호는 '충성'으로 통일된다.
이제 하위 헌터는 상위 헌터의 명령에 명령-복종관계가 강제된다.
게다가 여기에는 헌터들의 복장뿐만 아니라, 두발 규정 같은 세세한 사항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남성 헌터의 경우 앞머리는 눈썹을 덮어서는 안 되고, 옆 머리 길이는 12mm 이하. 파마와 염색은 금지되고 수염을 기를 수 없다.
여성 헌터의 경우 치마 길이, 힐높이, 헤어 스타일 규정이 들어간다.
긴 머리는 반드시 헤어망을 이용해서 단정히 해야 했다.
이른바 모든 헌터들에게 품위 유지의 의무가 추가 된 셈이다.
'……진짜 군대네. 군대야.'
그리고 4~5급 헌터들에게 필수 훈련 교육 기간을 부여하고, 실행 초기 기간에는 한 달에 두 번 이상 다녀오도록 의무화하는 내용도 있었다.
명목은 헌터트레이닝이지만, 실상은 군기 교육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헌터 수익 구조 개편.]
[헌터 상업화 통제.]
헌터들이 마정석을 매매할 때 붙는 세금을 더 올리고, 헌터들이 받는 사적 임무를 전부 통제하는 정책들이다. 모든 민간인의 의뢰는 길드나 헌터 사무소가 아닌, 반드시 협회에 일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
사냥터에 가든 던전에 가든 반드시 국가에 그 수입을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어길 경우 탈세 혐의가 적용된다. 헌터는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헌터들의 매출원을 제한하고 돈을 주는 길드에 충성하는 게 아닌, 협회와 나라에 더 집중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와, 이건 반발이 좀 있겠는데.'
시간이 흐르며 헌터들의 수입은 다변화되어 있다. 그냥 딱 마정석 수 입만으로 살아가는 헌터들은 별로 없다.
이제 헌터협회에서는 추가 임무를 수행하거나 던전 공략을 수행하면, 그 수입을 일괄적으로 회수했다가 협회에서 봉급제 형식으로 제공한다. 최소 기준치도 있고 연금도 있다.
이제는 협회에 소속된 헌터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터들 모두가 공무원이 된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기존 길드의 정책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라 모든 길드들이 직격탄을 맞는 셈이다. 길드 마스터 출신이 협회장이 됐으니 내심 기대하던 다른 길드 마스터들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라.
나는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놀랐다.
'……와, 이 새끼 진짜 미친 놈이네.'
프로스트의 목적은 헌터의 군대화였다.
이것은 현재 세계적인 추세이자, 현대의 헌터 시스템인 '헌팅 = 비즈니스' 개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철저한 국가주의 정책.
국가를 가장 우선적인 요소로 놓고, 헌팅 전 영역에 걸친 광범위한 통제력을 부여하는 체계.
헌터는 이제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서 뛰게 된다.
"보고 계십니까. 탑주님."
나와 에아가 고개를 돌렸다. 정서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9층에 올라오고 있었다.
"응. 너도 봤어?"
"예."
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들을 유닉스그룹의 사병으로 만들 생각이군요."
정서진은 나보다 더 노골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