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81화
후웅!
홍율이 다시 움직이자 박성진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이 뒤흔들리는 데미지를 받았지만, 죽어도 방패는 놓치지 않았다.
'놓치면 죽는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방패를 꽉 붙잡았다. 그때 홍율은 펀치 대신, 방패의 윗부분을 덥석 붙잡았다.
카가가가가각!
그러곤 힘주어 바닥에 눌러 꽂았다.
압도적인 힘. 방패가 지면 아래로 파고들자 방패를 붙잡은 박성진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안간힘을 써도 방패가 올라오지 않았다. 이제 홍율과 박성진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안뇽."
홍율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박성진은 그 웃는 모습이 지옥도의 악귀처럼 보였다.
전신이 공포감에 물들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사, 사, 사, 살려주시오! 협회장! 나는 그냥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꽈득!
야수처럼 달려든 홍율이 그의 이마에 박치기를 가했다.
초점이 사라진 박성진은 그대로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목은 흉측하게 뒤로 꺾여 있었다.
"후우."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길드원들이 팔을 바들바들 떨며 무기를 쥐고 있었다.
'끙.'
시야가 흔들린다. 놈들의 모습이 수십으로 갈라져 보인다. 피로도 피로지만 이 망할 가스 때문에 컨디션은 확실히 최악이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짚고 한쪽 눈을 감았다.
"뭐 해? 다 덤벼."
그때였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은 폭음과 함께, 수정동굴 전체가 거대한 충격에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도, 동굴이!"
드높은 동굴 천장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홍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로 떨어지는 집채만 한 수정 잔해들이 수십 갈래로 흩어져 보였다.
"……아, X발."
* * *
대전에서는 여전히 임모탈을 향한 공격이 계속 되고 있었다. 임모탈이 게이트의 마나를 받아 움직이려는 족족 헌터들의 맹공이 퍼부어졌다.
임모탈은 한 발자국도 버티지 못하고 있었지만, 헌터들도 슬슬 힘에 부치는 상태였다.
"아!"
"임모탈의 몸이 갈라진다!"
거대한 투명 거체의 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앙이 클리어됐습니다.]
근방에 있는 모든 헌터들에게 플레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케이!"
"마지막 놈까지 잡았다!"
다들 팔을 뻔쩍 들며 환호했다.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한국은 대규모 재앙에서 살아남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에 다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임모탈은 사라졌고, 이제는 닫혀가는 게이트만 남아 있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현장에 있는 모두가 자리를 지키며 영웅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나온다!"
섬광와 함께 게이트에서 한 무리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스트와 유닉스 길드원들이었다.
그들 모두 흙과 몬스터의 피로 행색이 엉망이었다. 다들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었고, 정신을 잃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기 중인 의무진들이 바로 부상당한 헌터들을 앰뷸런스로 옮겼다.
"유닉스가 저렇게까지 당하다니."
"전투가 상당히 치열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헌터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죽을상이라는 점이 이상했다. 틀림없이 전투는 승리했을 텐데 분위기가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어떻게 된 건가? 프로스트."
임남진이 다가와 물었다. 상처투성이인 프로스트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
"생존자는 저희뿐입니다."
"뭐라고?"
헌터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협회장! 협회장님은?"
"블랙가드와 NIX는 어떻게 된 거야?"
"제발 설명을 해주세요!"
사람들의 독촉에 프로스트는 눈을 꾹 감았다.
"보스 몬스터는 9랭크 이레귤러 용족 몬스터였습니다."
"……9 랭크라고?"
"이미 들어간 모든 파티가 그 보스에게 전멸당해 있었습니다. 연이은 전투로 홍율 협회장님 마저 컨디션이 최악이라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프로스트는 울먹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특히 협회장이 불을 뿜는 드래곤의 몸 안으로 직접 들어가 드래곤 하트를 부쉈다는 실감 나는 묘사에는 한바탕 탄성이 일어났다.
결국 보스는 클리어했지만, 협회장은 모두를 탈출시키는 대신 드래곤과 자멸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럴 수가……"
이야기를 들은 헌터들이 넋을 놓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임남진 헌터! 안됩니다!"
임남진은 충혈된 눈으로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집행부 요원들이 달라붙어온 몸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게이트가 곧 닫혀요! 지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임남진의 입술에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우뚝 걸음을 멈춘 임남진이 프로스트를 홱 돌아보았다.
"프로스트 헌터."
"예, 선배."
임남진이 저벅저벅 프로스트에게 걸어갔다.
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로 마나가 흘러나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콘크리트 도로에 발을 디딘 자국이 생기며 가루로 변했다.
"가, 가까이 가지 마!"
"닿으면 석화된다!"
누구도 임남진이 프로스트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일대일로 대면했다.
"방금 그 이야기, 한 점의 거짓도 없겠지?"
"물론입니다."
물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 프로스트의 눈빛이 한 순간 서늘해졌다.
"그럼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빠득. 빠드득.
프로스트의 다리 아래로 서리가 끼기 시작하자 다들 기겁하며 물러났다. 냉기와 모래를 흩날리며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만!"
군 현장을 지휘하던 합참의장이 소리쳤다.
"둘 다 그만하게! 이 엄중한 사태에 뭣들 하는 짓인가!"
"……."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임남진과 프로스트는 결국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프로스트와 유닉스 길드원들은 치료를 받기 위해 앰뷸런스를 타고 자리를 떴고, 다른 헌터들은 하염없이 흐려지는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게이트가 닫힐 때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파괴된 임모탈 : 14/14
-대한민국, 임모탈 재앙 완전 클리어.
헌터 실종자 명단 :
공인 1급 홍율 - 대한민국 헌터협회장.
공인 3급 박성진 - 블랙가드 길드마스터.
공인 3급 유재학 - NIX 길드 마스터.
외 78명.
이 임모탈 재앙은 한국을 거친 최악의 재앙 중 하나로 기록된다.
* * *
[협회장 홍율, 재앙 던전에서 실종.]
[마지막 임모탈 던전은 보스 몬스터는 9랭크의 이레귤러로 추정.]
[전 세계에서 애도의 물결. "믿을 수 없어."]
[최후까지 동료들을 내보내고 보스 몬스터와 일대일. 영웅적인 그녀의 발자취.]
대한민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국의 가장 큰 자랑인 홍율이 실종됐다. 그리고 게이트가 닫힌 던전에서의 실종 건은 사실상 '사망 선고'라고 봐도 무방했다.
살아 있었어도 게이트가 닫혔으니 빠져나올 방도가 없다.
"……이건 말도 안돼요."
1층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진보라가 퀭한 눈으로 말했다.
"그 사람이 죽을 수나 있는 사람이었어요? 어쩜 이럴 수가……"
다른 사람들도 진보라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누구나 협회장을 무적의 존재로 생각했고, 어떤 시련이든 이겨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이룩한 커리어들은 기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만큼 찬란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죽었고, 사람들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잖아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가끔은 무섭기도 했지만, 내게는 누나처럼 살갑게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하와이도 같이 갔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내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냉정한 건지 현실 도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데리고 나올 수 있을지 그것만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나보다 더 충격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홍연은 괜찮으려나.'
그녀에게는 아직 전화도 못 걸고 있다. 그녀는 가끔 사용하던 메신저도 탈퇴했고 휴대전화도 꺼둔 상태였다. 충격이 크겠지만 잘 추스르길 바랄 뿐이다.
"채널을 돌리겠다."
분위기가 워낙 처져 있자 보다 못한 사미아가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역시, 어느 채널을 돌리던 협회장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여, 참담한 뜻을 밝힙니다.]
마침 공영방송에서 박정양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은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아야하고, 과거를 딛고 미래로 도약해야 합니다. 그것이 최악의 괴수를 혼자 상대하며, 젊은 길드원들을 내보낸 협회장의 고고한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2의 홍율, 제3의 홍율이 나타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 정부와 헌터 협회는 힘을 합하여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는 강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나는 턱을 괴며 박정양의 연설을 들었다.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때 진보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글쎄."
나는 긴 한숨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마도 차기 협회장은 다음 서열인 임남진이 되겠지. 홍율처럼 파격적이고 진취적이진 못하지만 진중하고 냉정한 성격이야. 지금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는 데는 이만한 사람이 없을 거야."
나는 짐짓 냉정한 척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진보라나 다른 관리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탑주님!"
그때였다.
부스스한 머리의 정서진이 2층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이번 재앙을."
"오리지널인 줄 알았는데, 에렌델의 기록에도 있었어?"
"예. 많은 내용이 담긴 건 아니지만, 오래된 고서를 뒤져서 기록을 몇 줄 정도 챙겼습니다."
정서진이 고서를 펼쳤고, 로비에 앉아 있던 나와 진보라, 사미아가 다가갔다.
사미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책을 봐도 모르겠군. 이상한 언어로구나."
"에렌델어라서 그렇습니다. 요점만 설명드리지요."
정서진이 눈을 날카롭게 뜨며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에 떨어진 14개 임모탈, 그중에서 유닉스 측에서 공식으로 발표한 9랭크 이레귤러 드래곤 타입 몬스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
"비슷한 부분을 찾아 보자면, 유닉스 측에서는 수정동굴이라는 곳에서 홍율과 보스가 싸웠다고 했는데, 거기 나와 있는 건 크리스탈 드래곤. 이레귤러도 아닌 그냥 7랭크 몬스터입니다. 보스 몬스터도 아니죠."
"잠깐만, 그럼 유닉스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바로 그렇습니다."
진보라와 사미아가 말문이 막힌 듯 정서진을 보았다.
"저는 유닉스의 방식, 정확히는 프로스트의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유닉스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히 추정할 수 있죠."
정서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유닉스가 홍율 협회장을 죽였습니다."
"……아!"
"3급 헌터들이 포함된 8개 파티들이 이딴 던전을 클리어 못 할 이유가 없습니다. 블랙가드와 NIX 또한 유닉스와 협력해 협회장을 공격했을 겁니다. 그들이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협회장의 손에 전부 죽었거나 그들마저 유닉스의 손에 배신당한 거겠죠."
이렇게 '확정적'으로 추정하는 정서진의 모습은 처음 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 선배님! 대통령이 중대발표를 하겠다고 선언했어요!"
"……지금?"
다들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정양이 관계자에게 서류를 받아서 읽는 모습이 보인다.
[작금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해야 합니다. 가장 중대한 헌터 협회장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는 판단에,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차기 협회장을 발표할까 합니다.]
웅성웅성!
'바로 이 자리에서?'
충격 선언.
기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카메라셔터가 정신없이 파바박 터진다.
"차기 협회장은……"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유닉스 길드 소속의 공인 2급 헌터, 프로스트입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X발'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