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74화
"죄송합니다."
대한민국 5위 아일라의 길드 마스터. 안세현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길드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완전히 표정이 맛탱이가 간 채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박지현이 보인다. 옆에는 부 길드 마스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나는 사과를 받아들였고, 안세현은 박지현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박지현 헌터는 이번 공략조 자격을 박탈하겠습니다. 더불어 두 달간 근신 처분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돌아 가 보세요."
그녀는 부 길드 마스터와 함께 터덜터덜 걸어갔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이번엔 내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렇게 제 면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별말씀을. 당연히 제가 와서 사과드리는 게 맞는데요, 뭘."
우리는 한결 풀어진 얼굴로 악수했다. 안세현은 민망한 듯 옆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소리지만…… 5급에 유난히 베베 꼬인 사람이 많더라고요. 힘든 가면허 시절을 보낸 지 얼마 안돼서 그런가? 김유신 헌터도 5급들한테 꼰대 짓 당한 경험 있죠?"
"어유, 그럼요. 저는 미궁 던전 때 정산 비율 문제 때문에 한 번."
"저는 공략대에 들어갔다가 눈 재수 없게 떴다고 5급 선배님이 파티원들 다 집합시켜서 원산 폭격시켰습니다. 한 시간쯤 있으니까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고전적인 가혹 행위네요. 그 선배는 어떻게 됐어요?"
안세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도 5급이에요. 예전에 잠시 만난 적 있는데 눈도 못 마주치더라고요."
"하하하!"
같은 3급이라 그런지 안세현과는 그럭저럭 통하는 게 많았다.
아일라 길드의 대표정도 되면 어깨에 힘 빡 들어가서 으스댈 만한데. 그는 매사에 겸손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재앙과 포션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걸어 다녔다. 중간 중간마다 마주치는 헌터들은 기겁하며 인사를 해오곤 했다.
"이번 재앙.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안세현이 턱을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음, 그런가요? 멕시코에 열렸던 재앙 '임모탈'의 업그레이드판 재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미궁던전에 비해 클리어 조건도 명확한 편인데요."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안세현은 말을 멈추고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석연찮은 부분이 많군요."
나는 허투루 듣지 않았다. 이런 베테랑 헌터의 감은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편이다. 예전에 품질이 보증되지 않은 우리 상태이상 포션을 들고 간 것도 전적으로 그의 감이었다.
"그리고 이건 주제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요즘 길드 간의 분위기도 최악이에요."
"길드 간에요?"
"네. 폭발 직전이라고나 할까요. 뭔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야! 안 대표! 언제까지 농땡이 피울 거야!"
부 길드 마스터인 여성 헌터가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안세현은 '곧가겠습니다, 선배.' 하고 대답하고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시네요. 무사귀환을 빌겠습니다."
"김유신 헌터가 남아준다면 안심이네요! 뒤는 맡기겠습니다."
안세현과 헤어진 나는 다시 일행들의 집합장소인 막사에 돌아왔다. 진보라, 정서진, 은솔은 물론 4층팀 멤버들까지 모두와 있었다.
"김 대표님!"
차도연과 소심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두 손 꼭 모은 채 걱정 가득한 그녀들의 얼굴을 보미, 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일라측에도 이야기 잘 해놨으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아, 다행이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건 내역할이다. 괜히 어쭙잖게 대응하면이 사람들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 일이 터진다.
그러니 이런 시비가 붙었을 때 확실히 나가야 뒤탈이 없다.
"어휴, 진짜! 나이 처먹고 그러고 싶을까? 눈깔을 콱!"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진보라는 씩씩거리며 두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상급 레드 엘릭서 좀 있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신도 목소리를 낮췄다.
"좀 드릴까요?"
"응."
진보라는 조용히 1층 관리자의 아공간을 열고 포션 몇 개를 꺼내주었다.
"저번 달에 많이 챙겨 드렸잖아요. 벌써 다 썼어요?"
"미안. 다음부터는 아껴 쓸게."
그녀는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대신 배시시 웃어 보였다.
"포션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요!"
"김유신 헌터님!"
막사에 신나라가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 있었어요? 갑자기 마법사팀 공략조 투입을 포기하신다고……!"
내가 보낸 메시지를 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시 문제 있을까요?"
"아, 아뇨. 공략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문제는 없는데, 갑자기 포기하신다고 하니까 조금 놀라서요."
이미 4층팀과도 이야기가 된 부분이다.
팀원들이 뒤숭숭한 일도 겪었으니까 그냥 공략조를 포기하기로 했다.
어차피 공인 5급들은 경험 삼아 보내는 거니까 우리가 빠져도 전력상 큰 문제는 없다.
"저흰 괜찮아요. X-1팀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데 경험이나 쌓으라고 보내세요."
어차피 거기 나오는 유물은 안세현이 직접 컨트롤하는 1팀 차지일 것이다. 공략조든 수비조든 수입도 비율 단위로 정산된다면 안전한 지구에서 싸우는 편이 낫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나라는 무전으로 X-1 팀을 공략조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곤 내게 다가와 조용히 귓속말로 말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오늘 재앙 끝나면 아일라에 정식으로 항의하고 사과받아 낼까요?"
"아뇨. 이미 제 선에서 해결했습니다. 방금 안세현 대표도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역시!"
* * *
막사에서 두 시간 정도 대기했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풀며 대기했다.
재앙 시작이 다가올수록 헌터들은 민감해졌지만, 우리 팀은 진보라와 나대용을 중심으로 워낙 분위기가 좋았다.
"다들 늦어서 미안하다."
5층에서 워프 작업을 마치고 온사미아까지 합류하는 것으로 이제 우리는 완전체가 됐다.
"자, 수비조 헌터분들 포인트로 이동하시겠습니다!"
"네!"
우리는 매니저들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막사를 빠져나와, 흉흉하게 뻗어 있는 전차와 포탑을 지나, 게이트 발현 예측지에 도착했다.
데바의 눈으로 보니 허공의 마나가 비틀어지며 공간이 열리기 직전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자, 이번 재앙은 속도전입니다!"
그리고 게이트 발현지 앞에서는 안세현이 마지막으로 브리핑을 하는 중이었다.
"포지션은 확실히 숙지했죠? 신속히 보스 몬스터를 공략해 수비조의 고생을 덜어주고, 불안에 떠는 시민들에게 평화를 되찾아 줍시다!"
"예!"
안세현이 손을 내리자 그의 길드원들이 우르르 손을 모았다.
"Live in truth. (진실하게 살고.)"
안세현이 선창했고.
"Love justice! (정의를 사랑하자!)"
나머지 길드원들이 크게 후창하며 손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열렬히 환호했다.
와, 저런 거 내 취향이야. 막 열정이 느껴지잖아. 우리도 하나 만들어볼까?
"하지 말죠."
진보라가 말했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튼 하지 말죠."
빠른 차단 당했습니다.
뒤이어 가람의 공략조도 등장했다.
3개 파티로 이루어진 레이드 구성이다. 대장은 가람의 공인 3급 중 한 사람인 유하영이다.
"1팀. 포격 장비 준비는요?"
"이상 없습니다."
"2팀?"
"이상 없습니다."
한 가족처럼 똘똘 뭉친 아일라와는 다르게, 가람은 태생이 매니지먼트인 만큼 좀 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구성원을 살펴보니 우리 4층팀 대신 X-1 팀 몇 명이 합류해 있었다.
갑자기 공략조에 참가하게 된 그들은 모두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뭐, 공략조야 헌터의 로망이니까.
"이제 준비해 주십시오! 곧 재앙이 시작됩니다!"
경남에 파견 나온 협회 직원이 큰 소리로 말했다.
공략조와 수비조, 그리고 모든 군병력들이 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 19시 57분! 게이트가 열립니다!"
허공에 일렁이는 마나가 형태를 구축하더니 크게 벌어진다. 마치 공간이 아가리를 벌리는 것만 같다. 저것이 바로 이번 재앙의 게이트.
"게이트 완전 개방 확인! 공간 흐름 이상 무!"
"……그런데 임모탈은?"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브리핑받은 바로는, 게이트 오픈과 동시에 임모탈이라는 파괴 불가능한 개체가 나타난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일반 던전이었다.
안세현과 유하영이 동시에 협회 직원을 바라보았다. 협회 직원은 다급히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모습이다.
그러다 잠시 후.
"본부의 지시입니다. 공략조 모두 게이트에 침투해 주시길 바랍니다."
빠른 판단 좋네. 길게 끌 것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는 아일라-1, 게이트 공략을 시작한다."
"가람-1, 2, 3 게이트에 진입합니다."
공략조들 전원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수비조인 우리는 게이트 앞에 남아서 주변을 지키고 있었지만, 공략조가 들어간 지 10분이 지나도 임모탈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네요?"
"이래서야 그냥 일반 던전과 다를게 없잖아."
"우린 왜 온 거야?"
모두가 웅성거리며 협회 직원을 바라보았지만, 그 또한 이 상황을 설명할 수는 없는 듯했다.
꽈드드드득!
으적!
'……!'
갑자기 뭔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체가 참혹하게 일그러진 모습만 보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와직!
"커헉!"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곳곳에서 참사가 일어나고 있다.
전차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사람의 육편이 허공에 휘날린다.
"조심해! 공격이다!"
"뭐에 당하는 거야?"
나는 데바의 눈의 기능을 확장시켰다.
'……이런!'
허공이다. 허공이 뭉쳐 어떤 거대한 팔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나는 마나의 흐름을 좇아 시선을 움직였다. 저 두 팔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마나 흐름이 게이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내 거대한 팔이 땅을 짚고 일어난다.
"게이트가 하늘로 떠오른다!"
아니, 떠오르는 게 아니다. 저 게이트를 중심으로 투명한 괴수가 몸을 일으키는 것뿐이다. 두 팔과 두다리, 인간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그리고 게이트는 그것의 가슴 한 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키르르륵!
-캬아아아아아악!
"모, 몬스터들이 나옵니다!"
게이트의 입구가 아닌, 투명 거인의 몸체에서 1~4랭크의 짐승형, 곤충형 몬스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전군 사격 개시!"
병사들이 마력 소총을 쏴 갈기고 전차들의 포대가 불을 뿜는다. 몬스터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살아남은 몇몇은 아군의 방어진에 달라붙는다. 전열이 혼란에 빠진다.
'……방식은 임모탈과 같지만, 본질적인 부분이 달라.'
던전 게이트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