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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69화 (169/337)

나 혼자만 마탑주 169화

"여기다."

스마트폰의 지도앱이 '목적지 도착'이라는 메시지를 출력했다.

여기는 헌터 협회 개발 지구. 드디어 협회장을 만나러 왔다.

나는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보고 가볍게 머리를 만지고 옷매무새를 점검한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통행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입구를 지키는 경비 직원이 권태로운 태도로 통행증을 요구했다.

"여기요."

무표정하게 내 공인증의 바코드를 찍던 직원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어, 어서 오십시오! 대마도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직원이 다급히 주위를 휙휙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유, 해드려야죠."

주위에 종이가 없어서 사무실 방문일지에 큼지막하게 사인을 해주었다. 경비 직원은 그 방문일지 한 장을 통째로 찢어서 주머니 속에 챙겼다.

입구를 나와서 조금 걸어가니 또 다른 협회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골프장 카트를 연상케 하는 작은 오픈형 자동차 앞에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있습니다. 자, 타시죠."

"네?"

"협회장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내가 오는 걸까먹지는 않았구나. 안도하는 마음으로 엉거주춤 뒷좌석에 올라탔다.

협회 직원이 '그럼 출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액셀을 밟았다.

'떨린다.'

협회장과의 대면은 언제나 긴장된다. 몇 번 만나본 바로는 나쁜 사람은 아닌데, 워낙 정신이 사차원인 사람이라 걱정이 앞선다.

게다가 약속 장소도 좀 이상하다.

그냥 협회로 오라고 하면 되지 왜 이런 곳으로 부른 걸까.

"다 왔습니다."

"아."

도착했다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짜로 도착한 건가? 건물도, 사람도 없이 휑한 곳이다.

도로인지 활주로인지 매끈한 바닥이 펼쳐져 있고, 앞에는 대형 격납고가 떡 하니 자리해 있었다.

나를 내려준 직원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무전 몇 마디를 듣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일단 격납고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오! 유신이 왔냐?"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격납고 안에서 협회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협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 으헉!"

마음 단단히 먹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놀라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지고 왔는데, 결국 나도 모르게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물 한 방울 없는 서울의 활주로 한복판에서 수영복 차림으로서 있었다.

"꺄하하핫! 요 복쟁이! 내 새끼! 이리 와! 한번 안아보자!"

노출도 높은 수영복 차림의 협회장이 우다다다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아예 헌터 슈트를 입고 왔는데 그녀가 끌어안자 또 다시 우드득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빠르게 체념하며 말했다.

"별일 없으셨죠?"

"그럼, 그럼! 우리 아프리카의 영웅 덕분에 어깨 펴고 살지!"

"그런데 왜…… 수영복 차림이신가요?"

"수영할 거니까 수영복 차림이지."

너무 원론적인 답변이 돌아오니까 사람이 멍해진다.

대체 뭐냐고 이 비키니는.

만약 그녀가 나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노림수로 입은 거라면…… 대성공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협회장님. 제가 방문한 이유는……"

"알아, 알아!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나중에하고, 일단 가자!"

"어딜요?"

그녀는 씩 웃으며 격납고 벽에 붙은 버튼을 눌렀다.

쿠구구구구구구!

대형 격납고의 문이 좌우로 벌어지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을 본 나는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미친!'

……전투기가 여기서 왜 나와?'

"자아! 가볼까?"

수영복 차림의 빨간 머리 여인이 전투기 몸체에 손을 짚고 눈을 찡긋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나는 이론과 이치에 합당하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서울-비키니-전투기의 조합은 내 멘탈을 처음부터 끝까지 박살 내기에 충분했다.

협회장은 대체 무슨 의도일까? 뭘 노리는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 혼자 미궁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뭘 얼 타고 있어? 따라와."

그녀는 내게로 손짓하며 앞서 걸어갔고, 나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나를 전투기에 태웠다.

전투기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는 편이라 모델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뉴스나 미군 영화에서 많이 봤던 그 잘 빠진 전투기다.

"자, 이거 써."

그녀가 헬멧을 건네며 말했다. 이상한 호스 같은 게 달려 있다.

'와. 진짜 전투기 타고 갈 생각인거야?'

처음 써보는 물건이라 버벅대고 있자 그녀가 다가와서 직접 헬멧을 씌워주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특정 신체 부위가 자꾸 눈에 들어와서 곤욕이었다.

"준비 다 됐지?"

"네!"

그녀도 헬멧을 착용하고(몸은 비키니, 머리는 전투기 헬멧이라는 그 언밸런스함이 다시 한번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운전석에 앉았다.

운전사가 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직접 전투기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열려 있던 전투기의 기체가 내려가자 나는 뒤늦게 덜컥 겁이 났다.

"혀, 협회장님!"

"응?"

"제가 이거 타도 괜찮은 거예요?"

"음…… 원래는 뒤에 탄 사람도 훈련은 받아야 하지만 괜찮겠지 뭐. 헌터잖아?"

헌터이기 전에 사람입니다만.

"너 내성 강화 훈련받은 적 있냐?"

"아뇨."

"아카데미에서도 코스 있는데."

"저는 비전투계라서 못 받았어요."

"그래? 에이 뭐, 그래도 상관없어. 천천히 몰게."

아니, 여사님 저기요! 이게 자동차도 아니고 천천히 몬다는 게 뭔 개똥 같은 소리야!

그때 전투기에 시동이 걸린 듯 온몸에 진동이 오기 시작했다.

"음속을 돌파할 거야. 9G에 15초쯤이야 견딜 수 있지?"

"못 견뎌요! 여기서 나가겠습니다!"

"마나로 몸을 보호하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출바알!"

전투기가 출발했다.

그리고 나는 초주검을 경험했다.

* * *

끼루룩. 끼룩.

섬에 사는 맑고 청명한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나는 전투기 옆에 쪼그려 토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협회장이 팔짱을 낀 채 쯧쯧 혀를 차고 있었다.

"으휴. 사내새끼가 칠칠치 못하게."

"……협회장님, 요즘 시국에 그런 발언은 위험…… 우웨엑!"

보다 못한 그녀가 다가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먹은 모든 것을 삭삭 다 게워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았고, 대양의 짭짤한 바람이 불어왔으며, 파도가 쏴아아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여긴 어딥니까?"

"하와이야."

"……아하, 그렇군요. 하와이군요."

이제 그냥 놀라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왜 이제야 목적지를 알게 된 걸까 하는 의문도 접어두었다.

"협회장님. 혹시 어떤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요? 전 그냥 면담 신청을……"

"후후, 실은 나 오늘 휴가거든! 일 이야기는 좀 이따 들어줄게. 기왕 하와이에 왔으니까 수영하러 가자!"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니 휴가에 나를 전투기 태워서 끌고 오냐고.

"유신아, 빨리 와!"

벌써 저만치 앞서나간 그녀가 나를 보챘다.

"아, 넵! 갑니다!"

하와이에 오는 줄 몰랐으니, 당연히 준비는 아무것도 안 되어 있다.

적당히 근처의 물놀이용품점에서 수영복 바지와 슬러퍼만 사서 갈아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헌터들이 지키는 세이프티 해변이라 몬스터가 나올 염려도 없다고 한다.

'와, 진짜 오랜만에 바다에서 노는구나.'

인정하긴 싫지만…… 생각보다 기분 좋다.

로망 있는 에메랄드빛 바다에, 물온도도 딱 적당하다. 나는 바다에 둥둥 뜬 채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힐링된다.

"야! 김유신! 가서 칵테일 좀 사와!"

처음에 협회장이 바다에서 논다고 했을 때, 나는 막 북태평양 바다를 가르고 다니며 상어 떼랑 치열하게 싸우는 그런 판타지적인 상상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생각보다 얌전하게 놀고 있었다.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니면서 칵테일과 과일을 즐기는 정도였다.

"유신아! 떠밀려 왔어! 밀어줘!"

"넵!"

내가 수영으로 달려가 튜브를 밀어주면 그녀는 꺄르르 웃으며 요조숙녀처럼 좋아했다.

'흠흠.'

내 일행이긴 하지만, 오늘 협회장의 모습은 그 어떤 해변의 여인들보다 빛났다.

물론 그런 그녀를 남자들이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Hey! Where are you from?"

"Wow! You are so hot! Can I buy you a drink?"

내가 잠시 한눈팔고 있는 사이, 늘씬한 키의 미국인 몇 명이 그녀에게 다가와 작업을 걸었다.

그녀는 하찮다는 듯 웃으며 팔을 휘휘 내저었다.

"Fuck off."

냉정한 거절이었지만 남자들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협회장이 싱긋 웃으며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다.

남자들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시벌게져서 다가왔다.

협회장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가만히 있었다.

"……!"

그때 세 남자의 몸이 동시에 홱뒤로 넘어가 바다에 빠졌다.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반대된 그들은, 수면 위로 올라간 다리만 열심히 버둥대는 꼴이 됐다.

뭐 대단한 건 아니다. 마나로 고리를 만들어 몸을 잡아당겼을 뿐이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대로 물먹은 남자들은 입에서 바닷물을 켁켁 토해내며 일어났다.

"What the he.!"

파바바바박!

이번에는 성인 주먹만 한 물세례가 그들의 얼굴에 기관포처럼 작렬했다. 남자들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나는 사이, 나는 천천히 협회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으며 삐딱하게 웃었다.

"What's the matter?"

남자들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가 헌터라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내빼고 도망쳤다.

"오올, 김유신."

남자들이 사라지자 협회장은 큰 소리로 깔깔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나는 그녀의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하며 말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응. 네가 저 새끼들 목숨 구했다."

나중에 마주치면 밥 사라 이것들아.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별 탈 없이 끝나고 물놀이가 재개되었다. 그런데 협회장의 부탁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아졌다.

뭐 좀 사달라느니, 뭐 좀 버려달라느니, 튜브 좀 끌어달라느니.

나는 뒤늦게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협회장님."

"왜?"

"이거 권력 남용 아닙니까? 이렇게 후배 헌터를 부려먹어도 돼요?"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너 이 새끼! 머리 좀 컸다고 자꾸 반항할래?"

"반항하는 게 아니라 정당한 항의를…… 우와악!"

"꺄하하! 죽어라앗!"

튜브에서 뛰어내린 그녀가 내 머리를 붙잡고 바닷속으로 끌고 왔다.

나를 무력화시킨 그녀는 아이 다루듯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는 다시 위로 올라갔다.

덥석!

'이제 정당방윕니다!'

이번엔 내가 올라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물속으로 끌어내렸다.

놀란 표정을 짓던 그녀가 이내 눈을 빛내며 웃었다.

'어어?'

그녀는 문어처럼 팔다리로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녀의 붉은 마력에 휘말린 나는 순식간에 소용돌이가 되어 뻗어 나갔다. 바나나 보트가 따로 없었다.

"으아악! 자, 잘못했어요!"

"꺄하하하하핫!"

바다를 가르고 거대한 파도를 만들며 쏘아져 나가던 우리의 몸이 한순간 수면을 빠져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상당한 높이였다.

"얍!"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왔다. 나는 혼자 드높은 상공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격이 됐다.

'마법을!'

<아이올로스>

이제는 익숙하게 4공정 바람계 마법을 몸에 둘렀다.

낙하산 효과로 감속하며 떨어지는 그때, 나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협회장이 불끈 쥔 주먹을 앞으로 내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투콰아아악!

그녀의 주먹에서 통과된 붉은 마력이 내 몸을 스쳤다.

나는 아무 상처도 받지 않았지만, 대신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아이올로스가 흩어져 버렸다. 저번에 헬기에서 호텔로 내려갈 때도 느낀 거지만 이쯤 되면 헛웃음이 나온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컨트롤……!'

첨벙!

나는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에 빠졌고, 협회장도 깔깔 웃으며 내 옆으로 떨어졌다.

"하아아."

대 자로 바다 위에 둥둥 떠다니던 그녀가 웃었다.

"아, 잘 놀았다."

"……그거 다행입니다."

나는 죽는 줄 알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손목에 찬 방수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슬슬 일할 시간이네. 나가자."

"일이요? 휴가라고 하지 않았어요?"

"야! 사회인에게 100% 완전한 휴가가 어디 있냐? 놀러 와서도 잔업해야지."

도통 그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다. 아무튼 우리는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슬슬 시간이 됐는데."

그녀가 계속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쿠르르릉!

해변의 하늘이 먹구름이 낀 것처럼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러곤 그 안에서 커다란 균열이 열렸다.

해변가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비상 방송이 쏟아졌다.

-균열 사태! 균열 사태 발생! 여행객분들은 신속히 해변에서 벗어나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대피했다. 그래도 미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답게 균열 사태에 대한 대응도 침착하고 신속했다.

하와이주에서도 대비는 하고 있었던 듯, 군인과 무장한 헌터들이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시계를 보고 있던 협회장이 말했다.

"왔다."

쿠웅!

균열에서 몬스터가 떨어져 해변에 내려왔다.

고릴라 같은 외형의 대형 몬스터.

키는 7m에 육박했고 몸집도 상당히 거대했다.

6랭크 몬스터, 가일라스다.

균열이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침착했지만, 저런 대형 몬스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 떠들썩한 비명이 들렸다.

모두가 도시를 향해 우르르 도망치고 있었다.

"자, 그럼."

몬스터 쪽으로 걸어간 홍율이 팔을 당겼다. 몬스터 또한 그녀의 마력을 감지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얍."

그녀가 주먹을 내질렀다.

투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먹구름 낀 듯 어두워진 하늘이 단번에 깨끗이 맑아졌다. 거대한 괴수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타이어처럼, 그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나 있었다.

홍율은 가뿐한 표정으로 손뼉을 탁탁 털더니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아, 넵."

쿠쿠쿠쿵!

가일라스는 절명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공인 1급의 휴가지에 떨어진 것부터가, 이 괴수의 운은 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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