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63화
이번 뒤풀이 술자리의 목표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사미아.
술자리가 시작된 지 몇 시간쯤 지나고 밤이 깊어지자 슬슬 술에 취한 사람들이 숙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내 타깃인 사미아는 멀쩡해 보인다. 저번에 같이 마셨을 때 그녀는 주량이 꽤 세다고 밝힌 바가 있다.
나는 페이스를 조절하며 그녀와 이야기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바로 지금.'
나는 천천히 사미아에게 다가갔다.
휠체어에 앉아 홀로 독한 럼주를 들이켜고 있던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왔나. 영웅."
"안녕하세요, 공주님."
우리는 킬킬거리며 술병을 부딪쳤다.
"꿈만 같은 날이군."
그녀가 무트와라의 야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만 즐기고 있는 게 아니다. 무트와라는 밤마다 축제의 연속이었다. 곳곳에서 불을 피우고 술을 마시며 재앙에서 벗어난 기쁨을 표출하고 있었다. 벌써 사흘째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도 될까요?"
"좋은 생각이다. 나도 그대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술판이 벌어진 건물 뒤편, 우리는 인적 없는 한적한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즐기며 다시 한번 술병을 부딪쳤다.
"김유신 헌터."
"네."
"나는 이번 탄자니아전을 기점으로 은퇴할까 한다."
술병을 쥔 내 손이 살짝 떨린다.
"조, 조금 성급한 결정이 아니신지……"
"이번 전투로 확실히 느꼈다. 내 한계를."
그녀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전투에서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치명적이었다. 새로 발현된 체내 텔레포트도 한계가 명확하더군."
여전히, 그녀는 얻은 것 보다 잃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사실상 은퇴해야 할 몸뚱이를 억지로 이끌고 전장에 섰다고 생각한다. 이제 돌아가려고 한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멀리서 보이는 축제의 불길을 바라보았다.
"내 마지막 미련이었던 탄자니아는 해방됐다. 흘리안도 이제 편안히 눈을 감겠지. 내 역할은 다 했다. 나머지는 카림 같은 젊고 훌륭한 헌터들의 몫이다."
아니, 아직이다.
여기서 당신이 퇴장하는 건 곤란해.
"사미아 헌터."
"왜 그러지?"
"이걸로 다 끝난 게 아닙니다."
"물론 그렇겠지. 이 시대에서 안전한 땅은 없다. 여전히 던전과 재앙의 위협이 잔존해 있……"
"아뇨,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협입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몇 년 후, 이 세상은 멸망합니다."
술에 취해 붉어진 그녀의 얼굴이 한 차례 굳어졌다.
"재앙 네메시스. 11랭크의 이레귤러가 내려옵니다. 그 범위는 지구 전체에 달합니다. 우리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을지도 모르는 오버레이 배후의 세계도 이 재앙에 멸망했죠."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 갈 수가 없구나."
"기아의 재앙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통과 슬픔이 뒤따를 겁니다. 그러니까 부디."
나는 휠체어에 앉은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
사미아는 대답은 유보하고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동안 그대를 쭉 지켜봐 왔다. 그대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믿어주시는 건가요."
"그래. 정말로 그런 재앙이 닥친다면, 그대는 틀림없이 인류를 위해 대활약하겠지. 하지만 그 전장에서 몸과 뇌 모두 망가져 버린 내 역할은 없다."
그녀는 내게 구출되었을 때, 능력의 상실감을 느끼고는 목숨을 끊어달라고 간청했었다. 그녀의 마음은 처음부터 곪아 있었다.
다만 공인 헌터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탄자니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타국 헌터들에 대한 부채감때문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휠체어를 타고 전장을 날아다니며 싸웠다.
하지만 상실감으로 망가진 그녀의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고.
"아뇨, 오로지 사미아 헌터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채워줄 방안을 제시한다.
"마법 중에는 '워프'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설마."
"네, 짐작하신 대로 마법계의 텔레포트 같은 거죠."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제가 그 마법을 사미아 헌터에게 드리겠습니다."
"……나는, 마법을 써본 적이 없다."
"괜찮아요. 사미아 헌터가 워프를 배우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사미아가 나를 유심히 지켜봐 온것 이상으로, 나 또한 사미아를 지켜봐 왔다.
텔레포트 능력자의 기술은 워프와 흡사한 부분이 많다. 짧은 시간 안에 좌표 수식을 계산해야 하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공간의 거리감제어, 머릿속에서 거리의 이미지와 사물을 떠올리고 이미지를 조작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래서 텔레포트 능력은 철저한 재능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고, 같은 텔레포트 능력자들이라도 뇌의 발달에 따라 그 쓰임새와 컨트롤이 천차만별이다.
워프 마법도 마찬가지, 일반 마법과는 아예 다른 분야다.
마법적 지식과 감각이 없어도, 5층 차원관의 관리자는 공간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맡는 게 낫다. 나와 에아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뇌를 다치기 이전의 전성기 시절, 사미아는 손에 쥔 성냥개비를 컨트롤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에 모형을 쌓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컨트롤의 대가였다.
거기에 신데렐라의 마법과도 같은 관리자 Lv.10 특성이 세 개 달라붙는다면? 그녀는 전성기 이상의 대활약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미 3급 헌터로서 완성된 인물이고, 인성이나 다른 외적인 부분에도 모자람이 없다. 그녀만큼 5층 관리자의 적합한 인물은 없다.
"부탁드립니다. 사미아 헌터."
"……."
사미아는 고민스러운 듯 눈을 꾹감았다.
그녀의 목표 의식. 그녀의 상실감.
그녀가 은퇴를 결심한 이유 두 가지를 나는 모두 채워줄 수 있다.
"김 대표님!"
"사미아 헌터님도 계셨군요!"
그때 마침 우리가 있는 곳으로 로브를 입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대들은……"
그들 모두 킬킬 웃으며 후드를 벗었다. 4층팀의 나대용, 차도연, 김사랑, 소심희, 조용희다.
"반가워요!"
"셀레그마 전에서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녀는 나와 4층팀을 번갈아 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한패였군."
"하하하! 넵, 모두 제 휘하 마법사들입니다."
"오호! 스승님! 설마 스카우트 제의 중이었슴까!"
"사미아 헌터님도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직 고민 중일 텐데. 4층팀은 벌써 사미아가 들어오는 것처럼 손바닥을 마주 부딪치며 좋아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쾌하고 잠재력 넘치는 친구들이었지."
사미아도 싫지 않은 듯 웃었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김유신 헌터. 그대는 정체가 뭔가? 이런 사람들을 모으는 목적이 뭐지?"
나는 옅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사실 저는 대마도사 같은 게 아니라 마탑주입니다."
"……?"
"최종적인 목적은 세계 정복? 대충 그런 느낌이지만…… 그전에 일단 세계를 지키고 보죠, 뭐."
사미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소리 내어 웃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다오."
"물론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이 다시 빛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미아 헌터.'
* * *
이것으로 아프리카 파견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우리는 한국으로 갈 일만 남아 있다. 4층 팀은 먼저 워프게이트로 돌려보냈고, 넉넉히 1주일 정도 유급휴가도 줬다.
나도 그냥 워프게이트로 가면 되지만, 홍연이 같이 있기도 하고 지금 인천 공항에는 벌써 기사들이 잔뜩 있다고 하니까. 괜한 의심받을 바엔 정상적인 출국 루트를 밟는 게 낫다.
탄자니아는 모든 공항이 무력화된 상황이라 윗동네인 케냐까지 올라가야 했다. 우리는 나이로비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우리를 마중하러 온 스콜피온, 마르타, 찰리를 비롯한 탄자니아 지휘부 헌터들이 왔다. 그동안 친해진 간부들과 병사들도 함께였다. 역시나 장웨이는 안 왔다.
우리는 모두와 한 명 한 명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Sir! 연맹 일병 헤렐드 로셀입니다!"
나는 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키소와에서 처음 무트와라로 갈 때, '마법을 익히면 저도 김유신 헌터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던 바로 그 젊은 병사다.
"헤렐드 일병! 잘 있었어요?"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실은 헌터님이 한국에 돌아가시기 전에 꼭 보여드리고 싶은게 있었습니다!"
그는 양손의 주먹을 허리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내 데바의 눈이 마력흐름을 감지했다.
깜짝 놀랐다. 그의 심장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마나의 고리. 서클이 돌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1서클! 해내셨군요!"
"틈틈이 서클 강의를 보고 준비했습니다! 전부 김유신 헌터님 덕분입니다!"
헤렐드가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김유신 헌터님은 제 영웅입니다! 언제나 지켜보고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재회할 때는 같은 마법사로서 뵙겠습니다!"
오오, 이거 어쩐지 가슴 뭉클하네.
"힘내세요. 헤렐드 일병."
홍연도 생긋 웃으며 응원했다. 헤렐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건 기본이었다.
"벌써 가는 거야?"
한윤정이 팔짱을 끼고 다가왔다.
그녀는 일상복 차림에 정체를 숨기기 위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올리며 말했다.
"아프리카 온 김에 이집트에서 좀 놀다 가지."
"미안. 나중에 시간 내서 한번 놀러 갈게. 지금은 한국에 일 쌓인 게 워낙 많아서."
"쯧, 알았어. 어제 했던 약속은 잊지 마라?"
"물론이지."
"약속?"
홍연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리고."
한윤정이 다가와 내게 포옹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가 얼어 있는 사이, 그녀는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잘가. 내 소중한 친구. 네가 어디에서 있든, 무슨 짓을 하든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그거 내가 예전에 너한테 해줬던 말 아냐?"
"닥쳐. 쫌."
"하하하!"
마음에 담아놓고 있었구나. 나는 쿡쿡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간다. 친구야."
"응."
"말해두지만 네 몸이 아니라고 자책할 필요 없어. 이번에 보니까 파라오 한윤정도 누구보다 빛나더라."
"아, 씨. 오글거리는 소리 하지 말라고. 묘기지들 앞에서 울면 안 된다고."
"키킥."
그녀와도 작별인사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한 스콜피온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장웨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미아 님이 안 온건 의외군. 우리 중에서 두 사람과 가장 친하게 지냈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사라졌대요."
그 말을 하기 무섭게, 허공에서 슈슉! 소리가 들리며, 반군 주둔지에서 봤던 그 거대한 왕좌에 앉은 사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미아 헌터!"
"그대들에게는 늦게 알려서 미안하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탄자니아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김유신 헌터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제 탄자니아의 최고 헌터도, 흑익도, 공주님도 없다."
그녀는 자유를 선언하는 해방민처럼 가슴을 펴고 말했다.
"나는 사미아. 그뿐이다!"
탄자니아 왕가의 가출 선언.
그야말로 파격 선언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담백했다. 사실 다들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잘 가십쇼, 공주님!"
"탄자니아에서 썩는 것보다야 대마도사 연줄 타는 게 낫지!"
"공주님 아니라니까!"
그녀는 발끈해서 소리 지르면서도 정들었던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