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51화
나도 세계연맹의 지원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연맹군 2만 명에 각종 마력 전차와 장갑차, 거기에 공인 헌터들까지.
심지어 헌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공인 3급이다.
나와 홍연, 그리고 다르에스살람을 해방한 자이언트급의 헌터가 한 명 더 탄자니아 전선에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홍연이 말했다.
"연맹에서는 우리 탄자니아 전선을 아프리카 해방의 첫 번째 '키'로 설정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뒤덮은 타베스계 몬스터들을 스스로 몰아내고, 안정적인 기반 영토를 되찾은 연맹 가맹국. 그 의미는 상당할 테니까요."
"흐음……"
다들 침음을 흘리며 서류를 바라볼뿐, 가타부타 말은 없었다.
남부와 북부의 공략 난이도는 차원이 다르다. 확실히 셀레그마 공략은 몇 단계의 절차를 대거 건너뛴, 상당한 무리가 있는 임무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임무를 거절해서 이 거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것도 아쉽다.
이런 찬스는 절대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김유신 3급."
홍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모두가 내게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치사하게 나한테 덮어씌우기냐.
홍연의 입이 달싹이고 있다. 남들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녀는 이 임무를 하고 싶어 미칠것 같은 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모두에게 공평해야 할 사령관이다. 그리고 그녀 다음으로 이 지휘부 회의에서 발언의 영향력이 센 건, 두 가지의 전략을 모두 성공시킨 나다.
"생각이고 뭐고 할 것도 없네요."
나는 서류를 테이블에 툭 던져놓으며 말했다.
"안 하는 게 바보 아닌가요? 이거."
"……."
회의실에 정적이 휩싸였다.
"우리 전선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탄자니아가 언제 막대한 이런 지원을 받아보겠습니까? 유럽 한복판에 고랭크 던전이 터져도 이 정도까진 아닐 겁니다."
"……으음. 하지만 김유신 헌터."
스콜피온이 말했다.
"지원은 좋지만 이 작전은 너무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하오. 전 병력이 북부를 관통해서 셀레그마의 주둔지까지 가야 하는데 이건 전형적인 세계 연맹의 보여주기식 무리수지. 굳이 이런 막무가내 작전에 휘말릴 이유가 있겠소?"
"그럼, 손해 보기 싫어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릴게요. 사실 우리는 별로 손해 볼 게 없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기든 지든 우리는 연맹군 화력을 등에 업습니다. 셀레그마를 잡으면 더할 나위가 없고, 작전에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 영토에 몬스터들의 수는 크게 줄어듭니다. 그건 맞잖아요? 지금 우리가 일시적으로 남부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결국 셀레그마와 북부 몬스터들과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어요. 미루는 게 만사가 아니에요. 지원해 준다고 했을 때 날름 먹어야죠."
"음."
"무엇보다 이 정도 규모의 파견은 연맹이 책임감을 느낄 숫자입니다. 일단 이 병력을 탄자니아 땅에 박아두기만 해도 무조건 이득이에요. 만에 하나 상황이 좀 나쁘게 풀린다고 해도, 과연 연맹군이 그 많은 언론의 비판과 굴욕을 감수하고 병력을 물릴까요? 아마도 어지간히 일이 꼬이지 않는 이상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고 하겠죠."
웅성웅성.
나는 여기까지만 말하고 회의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의견이 갈렸다. 스콜피온과 장웨이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 그리고 마르타와 찰리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
나는 모두를 위해 정리했다.
"첫째, 이건 무리한 전략이 맞습니다. 실패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하나 편다.
"둘째, 하지만 연맹에서 온 이번 제안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천운인 것도 맞습니다."
이건 연맹과의 이해관계가 기묘하게 맞아떨어진 하늘이 내린 기회다.
"셋째. 우리가 연맹의 제안을 거절했을 때 날아가는 병력과 물자, 그리고 이 병력과 물자를 가지고 셀레그마 소탕 작전에 실패했을 때의 병력과 물자 피해.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기회비용을 최소화하는 길일까요?"
"……."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한 셈이었다. 우리 병력만으로 탄자니아 북부를 공략해 셀레그마의 목숨을 가시권에 놓으려면 상당한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이번 지원은 그 노력을 전부 커버해 주는 것이다.
그때 홍연이 몸을 일으켰다.
"탄자니아 전선은 지금껏 머물러 있었습니다. 현상 유지에 바빴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성과는 언제나 우리가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녀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저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사령관이 결정을 내렸다. 이에 어거스트 장군 또한 동의를 표했다.
헌터들의 회의에서 손들어서 다수결로 정하고 이딴 거 없다. 여론이 어느 정도 비등비등하다면, 사령관의 결정이 가장 중요했다.
"그럼 탄자니아 전선은 연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홍연이 확실히 못을 박았다. 장웨이나 몇몇이 뚱한 표정이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왔다.
"격렬한 전투가 예상됩니다. 모두들 남은 기간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서 컨디션을 끌어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이제 마지막 결전이 이제 눈앞에 다가왔다.
* * *
홍연과 나는 지휘소 건물에서 빠져나와 숙소를 향해 걸었다.
"하아, 큰일 하나 저질렀네요."
홍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웬 한숨이야? 설마 이제 와서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갑자기 무겁게 느껴져서요."
"무겁다니?"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제 결정에 수만 명의 목숨이 달렸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좀 그래서요."
"오, 뭔가 사령관 같은 말하네."
"놀리지 마요!"
그녀가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였고, 나는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봤을 땐 넌, 사람의 목숨 어쩌고 하면서 내려야 할 결정을 망설이는 타입은 아니야. 결단할 땐 과감하게 결단하는 케이스지."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그 결정에 대한 무게감을 기억해. 인명을 파리목숨처럼 생각하고, 미사일 버튼만 꾹꾹 눌러대는 결정권자는, 나중엔 진짜 인간성이 결여된 괴물이 되거든."
"흐음. 뭔가 철학적인 이야기도 할 줄 아시네요?"
"그럼 그럼."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요."
"난 패스. 지금은 별 생각 없어."
연맹군의 제안을 승낙했다. 남부는 안정됐다. 연맹군이 오기 전까지 몇주 정도의 휴가를 얻었다.
이 시간을 소중히 이용해야겠다.
한국 가서 한식이나 먹어야지.
"……."
그런데 그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래?"
"선배. 무트와라에 와서 저랑 한 번도 같이 밥 먹은 적 없는 거 알아요?"
뜨끔.
"어. 그, 그랬나?"
"네, 그랬어요! 같이 밥 먹자고 하면 맨날 바쁘다느니, 생각 없다느니, 잘 거다느니! 숙소식당 아주머니한테 여쭤보면 나중에 딱히 밥 먹으러 내려온 것도 아니고. 혹시 뭐 저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시, 실수다.
홍연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엔 좀 부자연스럽게 행동했을 수도 있다.
"아니, 실은……"
나는 그녀의 표정을 힐긋 살폈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는 그녀에게서 여러 감정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그녀는 내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의심보다는 서운함 쪽이 더 짙은 것 같았다.
머리가 돌아간다. 두뇌가 맹렬히 가속한다.
일단 변명은 함부로 캐묻기 힘든 개인적인 사정으로 늘어놓자. 그리고 그녀가 서운함을 느낀 부분만 좀 해소하면 되지 않을까?
-탑주의 집중력은 그런 쪽에서도 발현되는군요.
'생존 본능이지.'
나는 무안한 표정을 꾸며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실은 좀 부끄럽지만……."
"……?"
"내가 아직 시차 적응때문에 고생하고 있거든. 늦게 일어나고 늦게자고. 새벽마다 뜬 눈으로 잠자리를 뒤척이고, 그래서 약간 너랑 생활패턴이 어긋났던 것뿐이야."
그녀의 표정에서 서운함이 사라지고 이내 걱정이 묻어났다.
"그, 그런가요. 시차 적응이 오래 걸리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어요."
"내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야. 심하면 6개월쯤 골골거려. 아직도 4시쯤되면 병든 닭처럼 지내고 있고."
"아, 죄송해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아냐. 내가 괜히 오해하게 행동했지."
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피곤하시잖아요."
"별 생각 없었는데, 잠 좀 깨니까 배고파졌어. 가자."
"네!"
* * *
그러나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식당을 찾아서 메뉴를 시키고 몇 숟가락 떠먹자마자 통신기에서 '사령관님! 연맹에서 영상 회의를 요청해 왔습니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며 고개를 몇 번이고 꾸벅꾸벅 숙였다. 뭐, 내게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녀가 사령관을 맡아준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가 할 일의 배 이상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히려 미안해야 할 사람은 나다.
그녀와 헤어지고 밥을 다 먹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하늘이 거뭇거뭇한 저녁이 되어 있었다. 해가 지니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퍽 만족스럽다.
그러고 보니 쉴 틈만 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탄자니아와 무트와라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연맹군들이 주로 들락날락하는 일명 군인촌이다. 식당도 있고, 펍도 있다. 펍에서는 귀에 익은 올드팝의 멜로디가 선선하게 깔린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 보면 군인촌주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노점으로 이루어진 현지인들의 야시장이 보인다.
보통 이런데 와보면 맛있는 것도 많이 팔고 온갖 기념품과 잡동사니를 다 파는 게 보통이지만, 그런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전쟁 중이었지.'
낡은 옷, 이불,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빵이나 말라붙은 옥수수 반죽등 을 팔았다. 뭐 한가하게 아이스크림이나 팔고 있는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리고 이 노점상 뒤를 보면 무수히 깔린 판자촌이 있다. 빈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거의 쓰레기 더미를 모아다가 집이라고 만든 수준, 전국 각지에서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으니 이 모양이다.
역시 전쟁이 나면 뭐, 민간인들이 제일 힘들고 제일 먼저 죽어난다.
그래도 연맹의 협력을 받기로 했으니 대규모 구호물자가 들어와서 상황이 좀 나가지기를 기대한다.
나는 숙소로 가기 위해 다시 군인촌을 통과해 걸었다.
그러다.
'응?'
한쪽 펍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긴가민가해서 걸음을 멈추고 보고 있자 저쪽과 눈이 마주쳤다.
"오, 김유신 헌터!"
"이쪽이에요!"
사미아와 카림이었다.
급수는 차이가 나지만 둘이 친한 모양이다. 하긴 같은 탄자니아 국적의 여성 헌터니까 통하는 부분도 많겠지. 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적적해서 맥주나 한잔하고 있었다. 김유신 헌터도 한잔하지 않겠나?"
그녀가 옆자리 원형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좋죠."
나는 바로 착석했다. 그렇지 않아도 사미아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사실 그녀는 이번 파견에서 내 새로운 목표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