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44화
반군 주둔지에서 뒷정리를 마치고, 무트와라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10시 즈음이었다.
나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빠르게 씻고 마탑에 돌아갈 것도 없이 그대로 매트릭스에 쓰러지듯 잠들었다.
거의 기절했다. 꿈 한 번 안 꾸고 진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잤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탑주. 지금 시각은 16시입니다.
'아직 안 일어났어.'
아무리 자도 잠이 모자라다. 내가 이불을 머리 위로 끌어 올리자 다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저예요 선배. 아직 안 일어나셨죠?"
"아, 홍연이구나. 들어와."
일어나기가 무척 싫었던 나는 <윈드 포트>를 일으켜 문 걸쇠를 움직였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자, 홍연이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손만 흔들어 보였다.
"잘 자고 있는 거 확인했지? 그럼 계속 잘게."
"이럴 줄 알고 왔어요. 조금 있으면 지휘부 회의입니다. 선배도 참석하셔야죠."
"으으. 싫어. 난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 주면 안 될까?"
"저 혼자 회의실에서 그 사람들을 상대하라고요? 저를 사령관에 앉히셨으면 착실히 도와주셔야죠!"
나는 뒤로 돌아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싫거등."
"귀여운 척해도 소용없어요! 그리고 소름 끼치니까 하지 마요!"
"소름? 말이 심하네. 기분 상해서 잘 거야."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 졸리면 사람이 유치해진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졸린걸.
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완강한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홍연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가 덮고 있는 이불을 확 걷어냈다.
"다 큰 어른이 응석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말을 멈춘 홍연의 얼굴이 어느새 귀 끝까지 시벌게져 있었다.
"아, 아아, 아아……!"
반응이 왜 저래? 나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상체는 누드, 하체는 트렁크 팬티만 달랑 입은 차림이었다. 더운 지방이라 이불 밑에 팬티 하나만 입고 자고 있었다.
"시, 시, 시, 실례했습니다!"
당황한 그녀가 등을 돌려 도망치려는 순간, 나는 팔을 확 뻗었다. 아까 지속시간이 조금 남아 있던 윈드포트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홍연은 화들짝 놀라며 굳어졌다.
"사람 잠 깨워놓곤 어딜 도망쳐?"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강 옆으로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홍연은 삐그덕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하면 다야? 응?"
나는 눈이 풀린 채로 그녀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가, 가, 가까이 오지 마요! 경고 했어요!"
그녀가 버릇처럼 검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했지만 아쉽게도 검은 차고 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우위다. 그녀에게 당당히 다가갔다.
아 뭐 사실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장난기가 발동해서 하는 짓이다. 지금 그만두기도 좀 그러니 이대로 골려 줄 생각이었다.
"오, 오, 오지 말라고요!"
기겁한 표정의 그녀가 눈을 질끈감으며 소리쳤다.
"땀 냄새 나아아아아아!"
"……."
아.
갑자기 정신이 확 들어버렸다.
고개를 숙여 다시 한번 내 몸을 바라보았다. 진짜였다. 더운 날씨에 이불을 덮고 자다 보니 온몸이 찐득찐득 땀투성이였다. 뒤를 돌아보니 매트릭스도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빨리 씻고 나와요! 바보!"
불의의 일격을 맞고 방심한 틈에, 홍연은 얼른 밖으로 도망치며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갑자기 자괴감이 밀려든다. 부끄러워 하는 게 아니라 땀 때문에 기겁하는 거였냐.
-자업자득입니다. 탑주. 장난치곤 심했습니다.
'으으, 졸리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나는 터덜터덜 화장실로 들어갔다.
* * *
찬물로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왔다.
냉수 마시고 정신을 차리니 내가 잠결에 미친 짓을 했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
반응은 없었지만, 그녀가 안에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나는 문 앞에서 줄줄 사과했다. 미안하다. 이상한 의도는 아니었다. 잠결에 내가 미쳤던 것 같다 등등.
잠시 후, 끼이익 하고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홍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저야말로 미안했습니다. 함부로 이불을 들치는 게 아니었는데."
"……회의실이나 가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지휘부 건물로 들어갔다.
"사령관님이다!"
"탄자니아의 영웅!"
수년간 어쩌지 못한 반군을 한 번에 처치한 이번 성과로, 새로 부임한 사령관 홍연을 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방에서 경례와 인사가 밀려 들었고, 그녀도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일일이 받아주며 젊은 사령관다운 모습을 보였다.
"적성 있는데?"
불편한 곳은 없냐고 병사들에게 물어보는 그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옆구리를 찌른다. 놀리지 말란 소리였다.
그런데 인사를 받는 것도 고생이다. 일찍 출발했지만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지휘부 회의실에 도착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홍연에게 인사했다. 그녀가 가장 상석인 중앙에 앉고, 나는 그녀의 옆 자리에 앉았다.
내 옆에는 4급 헌터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스콜피온이, 반대편에는 어거스틴 장군이 앉았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방에서 내 몸을 보고 도망치려던 쑥스러움 많은 아가씨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확실히 그녀는 사람을 이끄는 리더의 자질이 있었다. 선천적인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특유의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도 한몫했다.
게다가 이번 성과로 확실히 권력기반을 잡았으니 연차 높은 4급 헌터들도 대우해 주는 분위기였다.
스콜피온이 그 부분에서 따로 후배들에게 이야기해두는 등, 미리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
"찰리 4급, B1 지점은 어떻습니까?"
"몬스터들이 진군을 시작하며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습니다."
"이 방어선은 반드시 사수해야 합니다. 가용한 5급 세 명을 더 붙여드릴게요. 어거스틴 장군. 산악 방어선에 추가 지원 병력을 보내줄 수 있겠습니까?"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긴급한 사항이라서 오늘 20시까지 구체적인 지원 병력을 추려서 보고해 줄 수 있을까요? 아니, 제가 직접 군으로 찾아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
홍연은 사소한 것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경우가 없었다. 그녀가 회의 분위기를 바짝 조이자 다른 헌터들도 긴장감을 가지고 대답했다. 이제 좀 회의가 회의다워진다.
"방어루트 점검은 이 정도면 됐습니다. 김유신 3급."
홍연이 빨간 머리를 찰랑거리며 나를 돌아본다.
"네, 사령관."
"이번 반군 축출은 김유신 3급의 공이 컸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연맹의 지시 사항은 주요 도시 린다의 점령이고, 우리도 이제 공세에 힘을 실어서 치고 나가고 싶은데,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다.
"아시다시피 전 탄자니아에 파견온 지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공부를 많이 했죠. 타베스계 몬스터들에겐 세 가지 강점이 있습니다. 플랜트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몬스터들의 물량 공세, 군단장을 중심으로 혼선이 없는 지휘체계, 그리고 인간의 무기에 대응하여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진화. 이 세 가지죠. 그리고 그 외에 나머지는……."
나는 가뿐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 약점투성입니다. 타베스들은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하며, 공략하기 어렵지 않죠."
나는 헌터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PC에 USB를 꽂고 자료화면을 스크린에 띄웠다.
"이건 미국 측의 협력으로 받아온 위성사진입니다."
에아의 해킹이 협력이라면 협력이긴 하다.
"많은 분들이 탄자니아 전역이 '리빙필드'에 뒤덮여 있다고 표현하시지만,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군단의 공세가 처음 시작된 북부 쪽은 리빙필드로 빈틈이 없지만 중부로 내려 올수록 비어 있는 공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집니다."
모두가 내 위성사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성사진의 북쪽은 온통 보랏빛인데, 내려 올수록 녹색이나 흙색이 더 많다.
"리빙필드는 몬스터의 일종이고, 반드시 '살점'을 필요로 합니다. 무한으로 퍼트릴 수 있는 게 아니란 겁니다. 실제로 군단장도 초반과는 달리 살점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지, 중부로 내려 올수록 리빙필드를 효율적으로 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영토를 무질서하게 확장하는 게 아니라, 타베스 몬스터들이 진군할 '길'을 만들어 영토를 연결하는 식이죠. 바로 이 허점을 찌르는 겁니다."
내가 장기 말을 옮기며 말했다.
"지금 린다 같은 작은 도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탄자니아 제1도시, 다르에스살람을 탈환합니다."
다르에스살람은 인도양을 낀 항구도시다. 연맹의 지원을 받아 착륙작전을 펼쳐 이곳을 점령한 후, 다르에스살람에서 서쪽으로, 일자로 쭉 병력을 투입해 리빙필드의 길을 끊는다.
마치 휴전선을 긋는 것처럼 길목이 되는 리빙필드를 차단하는 것이다.
"보이세요? 북부 전선과 남부 전선을 잇는 건 딱 이 네 개의 길뿐입니다."
나는 중부와 남부를 연결한 네 군데에 X자 표시를 그렸다.
"딱 이 네 개의 길만 차단하면, 북부와 남부의 연결이 끊겨 버립니다."
"……으으음 "
"리빙필드가 끊기면 타베스계 몬스터들은 넘어오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북부에 있는 군단장 셀레그마의 통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남부 전체가 강점인 지휘체계에 혼선이 생기는 거죠. 우리는 이때 셀레그마의 남부 전선 핵심, 무려 플랜트가 서른 개 이상 발견된 '이링가' 를 공략합니다."
나는 이링가에 X 표시를 친다.
"이후, 병력 증원을 잃고, 군단장의 통제도 받지 못하는 고립된 오합지졸 몬스터들을 지상군의 화력으로 정리하면 끝입니다. 이걸로 우리는 탄자니아의 국토 절반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장웨이가 손을 들었다.
"김유신 3급. 저번 반군 작전은 운이 좋았다고 쳐도, 이번 작전은 너무 꿈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말이 좋아서 북부와 남부의 연결을 끊는다는 거지. 사실상 적진 한복판을 일직선으로 돌파하는 미친 짓입니다. 군단장은 그냥 손 놓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북부의 병력을 보내서 우릴 공격하겠지."
말투가 좀 아니꼽긴 하지만 그럭저럭 좋은 지적이다.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첫째, 셀레그마의 북부 몬스터들은 끊어진 리빙필드를 넘어오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원거리 공격만 날리면서 리빙필드를 이으려는 시도를 하는 게 전부겠죠. 차단선을 지키는 병력이 할 일은 간단합니다. 포인트에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가, 몬스터들이 리빙필드를 이으려고 토사물을 깔기 시작하면 그곳에 화력을 쏟아부어서 리빙필드만 제거하는 겁니다."
가타부타할 것 없이 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몬스터들이 리빙필드를 까는 모습이다.
몬스터들은 살점을 먹고 그것을 자리에 토해내서 점액을 퍼뜨린다. 한 참을 그렇게 몇 번 반복하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리빙필드가 완성이다.
리빙필드는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가다가 멈춘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죠? 우리는 구경하고 있다가, 저것들이 차단선의 절반쯤 넘어왔을 때 화력을 퍼부어서 리빙필드를 제거하면 됩니다."
두 번째 손가락을 들었다.
"둘째, 군단장의 통제를 받지 않는 백부장, 천부장들의 기본 임무는 지역 방업니다. 즉, 우리가 네 개 포인트를 파괴하면 군단장의 통제가 사라진 놈들은 그냥 자기 구역을 방어하는 행위가 전부겠죠. 원래는 이링가 같은 핵심지역을 공략하려면 근방의 몬스터들이 전부 몰려들어서 방어하려 들겠지만, 군단장의 지시가 끊기면 그런 것도 없습니다."
다들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뭐, 장웨이 4급 말대로 적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른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편견을 뒤집고 보면 너무 쉽게 보이지 않나요? 그냥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주머니에서 수정테이프를 꺼냈다.
"이 네 좁다란 길목의 리빙필드만 제거하면."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네 개의 길목을 수정테이프로 하얗게 칠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길목 아래의 방대한 땅덩어리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이 방대한 남부 전체를 얻게 되는 겁니다. 이래도 작전이 복잡하나요? 그냥 심플한 전술입니다. 모험을 거는 건 맞지만 얻을 수 있는 대가가 크죠."
"……."
"아마 셀레그마도 남부에서 추가적인 살점을 확보하면 리빙필드 길목을 더 늘리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기습으로는 놈들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나는 팔짱을 꼈다.
"판단은 여러분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