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42화
탄자니아의 기둥이라 불리던 여인이 바닥에 엎드려 좌절하고 있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잃는다는 상실감이란 얼마나 지독한가. 그것이 헌터의 가치를 상징하는 고유 능력이라면 고통은 몇 배나 더 할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제대로 걷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김유신, 이라고 했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부탁이 있다. 지금 나를 이 자리에서 끝내줬으면 한다."
"……."
"감옥에 갔을 때, 흑익은 이미 죽어 있었다고 보고해다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에 빛이 사라진 그녀는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사미아 헌터."
하지만 아직은 당신이 퇴장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더 이상……"
"훌리안 사령관이 죽었습니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백익이라는 자에 손에요. 탄자니아는 현재 대부분의 영토를 군단장에게 넘겨주고 무트와라만 간신히 남겨놓고 있습니다. 상황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최악입니다."
"……."
"이번 작전에 탄자니아의 명운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작전의 핵심이죠. 우리가 당신을 구하러 여기 들어오는데 어떤 대가를 치렀을 것 같습니까?"
사실 별 대가를 치른 건 아니다.
"그러니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한탄 같은 침음을 흘렸다.
"훌리안이, 죽었다고."
"예."
"그는 진정한 전사였지. 병들고 노쇠했음에도, 조국에 버림당해 타지에 왔음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국민들을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다."
그녀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좋다. 이런 몸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다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홍연을 주둔지 한복판에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해졌지만, 다른 플랜이 있으니 상관없다.
'에아. 홍연한테 현재 위치 좌표 보내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적진 한복판에서의 무전은 도청당할 우려가 있으니까. 에아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면 깔끔하다.
곧바로 에아로부터 홍연의 답변에 대해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사미아에게 좌표를 불러주었다.
"갈 수 있겠죠?"
"한번에는 아니지만, 연이어 사용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연에게 가서 물건을 받으세요. 이후엔 그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시면 됩니다."
"알겠다."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감옥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선택 미션을 클리어한 나는, 우선 위층으로 올라가 붙잡힌 정규군과 민간인들을 풀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가지 마세요. 탈옥한답시고 올라갔다간 떼죽음 당할 겁니다."
다행히 내가 간수들을 박살 내는 퍼포먼스가 인상적이었는지, 모두가 내 통제에 잘 따라주었다. 지나가는 길마다 포로들은 큰 은혜를 얻었다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혹시 여기서 헌터이신 분?"
내 물음에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5급 아홉 명, 4급 한 명.
"맡겨 주십시오! 장비는 없지만 싸울 수 있습니다!"
"저흰 뭘 하면 됩니까?"
"앞으로 벌어질 충격에 대비하면서 여기 민간인들 지켜주시고, 혹시나 감옥으로 들어오는 반군들을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 그것뿐? 그럼 당신은……"
나는 슈트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눌러쓰며 대답했다.
"싸우러 가야죠."
나는 홀로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열린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식당 내부로 올라와도 특별히 바뀐 점은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파앗!
팟!
사방에서 눈부신 조명이 쏟아진다.
눈이 부셔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렸다.
-당신은 포위됐다 침입자!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항복해.
마력소총을 든 반군 병사들이 사방에 쫙 깔려서 총을 겨누고 있다. 물론 보병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3급 헌터라는 사실을 보고 받았는지, 무수히 많은 전차들의 포문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스나이퍼도 있는 것 같다. 내 머리를 빨간 점들 몇 개가 조준하고 있다. 허튼짓을 하면 바로 머리를 날려 버리겠다는 뜻이리라.
'흐음. 뭐, 바로 쏠 생각은 없나?'
저들도 내가 한국에서 파견된 공인3급 헌터라는 사실까지는 추측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나를 붙잡아 인질로 삼는 것. 그렇게 되면 또 다른 3급인 홍연은 물론, 탄자니아에 와 있는 한국인 파견군들의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 가람과 정부로부터 몸값도 상당히 뜯어낼 수 있을 테고.
-저항하지 말고 무기를 버려라!
그리고 손을 머리 뒤로 넘겨라.
조명에 눈이 적응됐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싫은데."
철컥! 철컥!
수 많은 총구와 포문이 나 하나를 겨누고 있다. 이곳에 있는 반군 모두가 나를 노린다.
나쁘지 않은 긴장감이다. 기분 좋은 떨림이 몸을 타고 흐르며 잠들어 있던 세포를 깨우고 마나를 활성화시킨다.
거대한 위협에 홀로 맞서고 있는 것만으로도 피가 끓고 시동이 걸린다.
-이것이 마지막 경고다. 항복해라. 무기와 슈트를 버…….
까지 듣고, 나는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가이아>
내 발밑의 마법진이 발동하며, 동시에 미리 깔아두었던 감옥 근처의 네 개의 마법진이 빛을 뿜는다.
<가이아>×4
경고는 없었다. 반군들의 총구가 즉각 불을 뿜는다. 하지만 내 앞으로 지면이 통째로 벽처럼 솟아올라 총탄을 쿠션처럼 막아낸다.
-총격이 안 먹힌다!
-전차부대! 포격 개시!
내가 준비한 건 무려 가이아 다섯장. 이 일대의 대지는 전부 내 통제하에 들어와 있다. 나는 발을 한 번 더 굴렀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전차들이 딛고 있는 지면이 움푹들어간다. 차체가 아래로 쏠리거나, 위로 내려간다. 정면을 향하고 있던 포대의 방향이 하늘이나 지면으로 쏠린다.
"이게 무슨!"
수십 대의 전차들이 단번에 무력화되었다.
끼이이이이이!
그때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애매한 깊이의 구덩이에 빠진 전차가 최대한으로 포탑을 올려 나를 조준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어림없지.'
나는 지면을 컨트롤해서 차체를 그냥 옆으로 돌려 버렸다. 포탄이 발사됐고 그것은 옆에 있는 아군 전차에 명중하고 말았다. 무전에서 욕이 실시간으로 울려 퍼졌다.
'재밌는데?'
이런 식으로 전차를 몇 대 가지고 놀았다. 오인 사격이 연이어 일어나며 혼란은 점점 가중된다.
나는 블루 엘릭서를 들이켜며 계속해서 전차들을 더 깊은 구덩이에 처박았다.
저 상태로 아무리 시동을 걸어봐야 캐터필러가 헛돌 뿐. 구식 전차와 재래식 군대로 나를 촘촘하게 둘러싼 것부터가 패착이다.
-탑주! 반군이 화력 공격을 포기하고 헌터 부대를 돌입시키고 있습니다!
'그래?'
헌터는 무서우니까. 나는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철문으로 달려가서 일대일을 노리……'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내 앞으로 나타났다. 그가 즉시 소드 디바이스로 찔러 들어왔다.
"읏차차."
나는 고개를 젖혀 피하며 물러섰다.
"목을 노리네. 날 생포하라는 지침 아니었어요?"
"……."
꽈득!
바로 등 뒤에서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바닥에서 새하얗고 마른 악마의 팔 같은 것이 솟아 나와 휘둘러진다.
다급히 몸을 굴려 피하자 이번에는 벽을 부수고 중갑옷으로 무장한 헌터가 뛰어나와 해머를 휘두른다.
부우우우웅!
나는 공중에 켠 쉴드를 딛고, 뒤로 텀블링하며 빠져나갔다.
-원거리 공격 감지. 가드하겠습니다.
내 측면으로 쉴드가 촤르르륵 펼쳐 지며 총탄이 연달아 박힌다.
고개를 들어보자 마력소총을 허공에 여섯 자루 띄워놓은 채 다가오는 헌터가 보인다.
'벌써 포위당했네.'
나는 빠르게 눈을 굴려 상대를 살폈다.
체술계 둘. 검사와 망치.
이상한 팔을 솟구치게 하는 홀딩 능력자 하나.
염력계 하나.
이 중에서 검사만 4급이고 나머지는 5급이다.
"이거 기분 나쁘네."
나는 발을 들어 신발 밑창을 터치했다. 거구의 중갑전사가 달려들어 망치를 내려치고, 나는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하며 다리를 뻗었다.
콰드드드드드득!
망치와 다리가 격돌하자 시커먼 해골 이팩트가 터져 나오며 망치 디바이스가 역으로 박살이 난다.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진짜 이 멤버로 날 잡으려고?"
"크흡!"
회전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오른발에 데바스타를 덧씌운다.
"얕보지 마라!"
망치가 박살 난 중갑남이 맨주먹을 휘둘러 오고, 홀딩계 능력자가 사용한 마나 팔이 내 뒤에서 올라온다.
<아이스 필드>
나는 자세를 낮추며 바닥에 빙판을 깔았다. 덩치의 오른발이 미끄러지며 주먹이 허공을 헛돈다.
고개 숙여 피해낸 내가 놈의 품으로 파고들며 상대의 복부에 데바스타를 발동한다.
투콰아앙!
디귿 자로 꺾인 남자의 몸뚱이가 식당 벽을 뚫고 날아가 방 뒤에 숨어 있던 홀딩계 능력자에게 부딪혀 날아간다. 시원한 스트라이크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측면에서 염력계 능력자가 띄운 소총이 불을 뿜었지만 에아가 쉴드를 펼쳐서 막아낸다.
<아이스 자벨린>
나도 기꺼이 원거리 공격으로 응수했다.
얼음의 창이 냉기를 흩뿌리며 날아가자 염력계는 총을 떨어뜨리고 등뒤에 대기시켜 뒀던 디바이스 방패 네 개를 염력으로 들어 올려 막아낸다. 얼음창들이 방패에 부딪혀 얼어붙는다.
"계속해 봐."
<아이스 자벨린>×20
수십 개의 얼음 창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간다. 방패는 버틴다.
하지만 방패에 계속해서 얼음창이 얼어붙으며 고슴도치와 같은 모양새가 됐고, 결국 염력 능력자는 얼음이 더해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결국 방패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서리의 창이 연달아 염력술사의 몸에 작렬한다.
"네놈!"
후우우우우우웅!
마지막으로 남은 4급 검사가 내게 바짝 접근해 와 검을 휘두른다. 나는 직접 오른팔을 뻗어 고강도 쉴드를 펼친다.
카가각!
나와 헌터는 쉴드와 검을 맞대고 섰다.
"이건 탄자니아 내부의 일이다! 끼어들지 마라, 이방인!"
"나도 몬스터랑만 싸우고 싶었어."
소드 디바이스가 눈부신 빛을 발했다. 내 쉴드가 점점 갈라지고 있다.
"근데 니들이 방해하는 걸 어쩌냐?"
한 줄기 바람이 흘러들며 헌터의 목을 휘감자, 헌터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스륵.
"……!"
아까 깔아둔 얼음 필드에 그의 다리가 미끄러진다. 동시에 측면으로 날카로운 지면검을 올라오게 했다.
"크으!"
헌터는 넘어지면서도 검을 휘둘러 어스 클레이모어를 베어냈다. 4급이라 그런지 반응이 좋다.
바로 측면으로 아이스 자벨린을 날리자 녀석은 풍압으로 창의 방향을 흩트린다.
그의 허리와 팔의 방향이 쏠린 사이, 결정타로 준비한 파이어 캐논을 그의 등 뒤에서 발사한다.
"이게……!"
그는 억지로 검이 휘둘러지는 방향을 수정해 반대쪽으로 길게 긋는다.
파이어 캐논이 갈라졌지만 폭발은 막지 못했다. 그의 몸이 후폭풍에 밀려나 바닥을 구른다.
"제기랄! 나를 가지고 노는 거냐!"
그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어, 들켰네."
"네놈도 명색이 전사라면 제대로 상대해라!"
"진짜? 그러지 뭐."
나는 바로 오른발을 들어 데바스타를 켠 다음, 자세를 낮추고 돌진 자세를 취했다.
"……큭!"
검사가 움찔하며 전투자세를 취한다. 내가 앞으로 쏘아져 나가는 동시에 검사는 풀스윙으로 검을 휘두른다.
스릉!
뛰어든 내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휘두르는 자세를 취한 그의 표정이 거의 체념한 표정이 된다.
"이게 끝까지……"
퍽! 꽈득!
헌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네 개의 어스클레이 모어가 네 방향에서 솟아와 그의 몸을 찌르고 들어갔다.
나는 철문 뒤에 몸을 숨긴 채, 느긋하게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에아. 홍연과 정규군은?'
-홍연 사령관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제 곧 도착했습니다.
'오케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슬슬 시작이다.
-10초 후 EMP 디바이스가 폭발합니다.
오, 뭔가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데바의 눈을 확장해 보니, 어느새 반군의 주둔지는 암흑에 휩싸여 있었다. 통신도 모두 끊기고 전자장비들이 먹통이 됐다.
'효과는 확실하네.'
영화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EMP 디바이스는 특별히 뭔가가 체감되지 않았다. 전자기 펄스는 인간이 느끼기 어렵다곤 하니까.
그리고.
콰쾅!
쿵!
드디어 홍연이 이끄는 정규군의 총 공격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