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34화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04: 57]
정말로, 5분이면 충분했다.
바닥에는 반으로 갈라진 플랜트와 무수히 많은 시체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피묻은 검을 들고 고독하게 서 있는 홍연의 모습이 보인다.
'……인정이다. 인정.'
이후에는 스콜의 특공대원들이 잔당들을 처치하고, 포대에 담긴 흰가루 같은 것을 뿌리고 다녔다.
제초제 비슷한 성분의 화학품이라는데, 그것을 살살 뿌리자 리빙필드가 빠르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5분간 정신없이 날뛰었던 홍연은 돌아와서 수분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애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홍연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얘도 뭔가 봤나 보네.'
사실 나도 A플랜트에서 싸우다가 리빙필드를 봐버렸다.
왜 프레드릭 대령이 그토록 아래를 내려다 보지 말라고 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리빙필드는 타베스계 몬스터들의 토사물이다. 그리고 주재료는 살점.
아프리카에 살점이라고 해봐야 뭐가 있겠는가? 초원에 사는 동물들, 그리고 사람이다.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제일 먼저 눈을 감은 기린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커서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듯 덩어리 채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이한 방향으로 꺾인 사람의 팔, 분질러진 다리도 보였다.
완전히 소화되지 못한 덩어리들이 리빙필드를 이루어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났다.
"괜찮아?"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얼굴빛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고는 스콜에게 다가갔다. 그는 무전기로 통신 중이었다.
"스콜 대위. 어떻게 됐습니까?"
"방금 B플랜트를 제거했다고 본부에 보고 했습니다. 본부에서는 바로 방호벽이 있는 키소와 시가지로 와줄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스콜이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천부장까지 합류해 공세를 퍼부어 방호벽이 뚫리기 직전이고, 이미 몇몇곳은 뚫렸다고 합니다. 이대로 두면 키소와의 수 많은 민간인들이 리빙필드가 되어 바닥에 깔릴 겁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이럴 시간 없습니다. 출발하죠."
홍연도 같은 생각인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콜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저와 홍연은 둘이서 최고속도로 키소와로 이동하겠습니다. 스콜 대위님은 팀원들을 이끌고 따로 와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군인답게 질문은 없었다. 스콜은 바로 팀원들을 데리고 숲으로 이동했다. 이제 나와 홍연 둘만 남았다.
"달릴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 날아갈 거야."
나는 윙 골렘을 작동시켰다. 세 갈래로 이루어진 마나 날개 한 쌍이 펼쳐진다.
"1인용으로 보이네요."
"2인용으로도 쓸 수 있어."
나는 그녀의 앞에 섰다. 여전히 감이 안 오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홍연을 위해, 두 팔을 앞으로 뻗고 무릎을 살짝 굽힌 자세를 취해보였다.
"……?"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말 없이 자세를 유지한 채로 팔을 위아래로 살짝 흔들어 보았다.
멍해 있던 그녀의 얼굴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모, 모, 모, 못해요! 죽어도 싫어!"
"……죽어도 싫어는 좀 너무하네."
내가 손목 스냅을 움직이며 '이렇게 이렇게'하고 시범을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근처에 있는 나무를 끌어안고 소리쳤다.
"싫어!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을거야!"
……역효과다.
"너 혹시 뭐 그런 거 있어? 남성공포증? 스킨십 혐오증?"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근데 왜?"
"어, 어떻게 그런 그……! 그런 자세로……! 다, 당신한테……! 상상도 하기 싫어요!"
이거 거부 반응이 너무 격렬하네.
그녀의 멘탈은 유리창 못지 않게 연약하고, 협회장의 부탁을 받아 온나는 그것을 케어할 의무가 있다.
대안을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업는 자세는 지금 윙골렘의 구조 때문에 안 된다. 어떻게든 그녀가 부끄러워 하는 그 모종의 자세를 시도해야 한다.
'에아 어떻게 하지?'
-포털사이트 검색. '공주님처럼 안아 올리기'를 검색합니다. 검색 완료. 소녀의 로망 중 하나. 즉, 홍연은 소녀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말을 말자.'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보았다.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
이라고 말하며 번개처럼 달려들어, 방심한 그녀의 다리 뒤로 왼팔을 넣었다. 일단 내 태평양 같은 품에 한 번 안겨보면 생각이 달라질…….
"정지."
처억
나는 순식간에 내 얼굴 앞에 와 있는 칼끝을 보고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진짜로 찌를 겁니다."
실패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부끄러워 하는 소녀의 반응을 넘어, 길거리에서 치한을 만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싫다는데 거기서 그렇게 달려들다니. 탑주도 정상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야. 넌 누구 편이야!'
홍연이 붉어진 뺨을 탁탁 치더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더 이상 노닥거릴 시간 없습니다."
"잘 아네! 그러니까 이제 좀……!"
"이걸 쓰죠."
그녀가 자신의 아공간주머니에서 푸른 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사슬 같은 것을 꺼냈다.
"마인 생포용 마력 장악 쇠사슬입니다."
"그래서 그걸로 어쩌려고?"
* * *
치직!
-여기는 HQ-7! 긴급 지원을 요청!
-거리에 몬스터 세 마리가 빠져나갔다!
시가지 방호벽은 병력이 증원되어 꾸역꾸역 버티고는 있었다.
하지만 저쪽도 천부장이 병력을 이끌고 오는 바람에 다시 병력 차가 늘어나 버렸고, 결국 뚫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와 홍연은 윙 골렘을 켜고 빠르게 키소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근데 참."
나는 윙 골렘을 작동시키고 비행하면서 양손으로는 쇠사슬을 붙잡고 있었다. 홍연은 쇠사슬을 붙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게 최선이야?"
"네. 최선입니다."
그녀가 단호히 말했다.
"우리 꼴이 좀 웃기지 않냐?"
"외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장을 향해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미치겠다. 진짜."
산을 넘어, 어느새 키소와 시가지가 보인다.
나는 입을 벌렸다. 아까 헬기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도시 방호벽 위로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쏴대고, 달려드는 몬스터의 몸에 총검을 쑤셔 박으며 저항하고 있다. 무척이나 위험천만한 광경이다.
이제 몬스터들이 저 벽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도시에 있는 수 많은 민간인들이 토사물에 뒤섞여 바닥에 깔리게 될 것은 자명했다.
나는 이어마이크의 통신 기능을 작동시켰다.
"여기는 김유신 3급. 홍연 3급과 함께 HQ에 도착했다."
-여기는 본부. 수고했습니다. 특공1팀이 퇴각로를 준비하고 있으니 두분도 퇴각 준비를…….
"아니요, 퇴각 준비와는 별개로 우리는 방호벽에 가서 몬스터들을 막을 겁니다."
나는 양손에 쥔 쇠사슬을 시계추처럼 흔들기 시작했다. 아이올로스까지 사용하자 홍연의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놈들의 적진에 폭탄을 떨어뜨리겠습니다."
나는 데바의 눈으로 거리를 계산했다. 슬슬 몬스터들이 이쪽을 봤는지 원거리 공격을 가할 준비를 한다.
"준비됐어?"
"네!"
"명심해. 네 목적은 오로지 천부장뿐이야. 도시의 방어랑 쫄들 처리는 내게 맡겨."
무모하다면 무모한 전략. 하지만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나는 힘껏 쇠사슬을 던졌고 동시에 그녀의 몸이 적진 한복판으로 떨어진다.
-여기는 본부! 폭탄이라는 건 대체 무엇을 말하는……!
나는 그저 웃었다. 저게 폭탄이 아니라면 뭐겠는가.
몬스터들이 무수한 전장 한복판, 천부장을 향해 날아가는 홍연의 몸에서 거대한 붉은 파문이 퍼져 나간다.
콰아아아아아아아!
방대한 범위의 마력 폭풍에 휘말린 몬스터들의 몸뚱이가 그대로 하늘을 날아다닌다.
그녀는 힘을 아끼지 않고 모든 마력을 방출하며 천부장에게 달려 들었다.
-캬아아아악!
-키이익!
저랭크의 양산형 몬스터들은 그냥 그녀의 몸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하늘에서 보면 시커먼 몬스터의 바다에 불쑥 솟아오른 붉은 상어 지느러미가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듯 한 모습이다.
역시 홍연의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
혼자가 된 나는 윙 골렘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지상에서의 대공 공격이 날아왔지만 이쪽은 5층 시련도 클리어한 몸이다. 가뿐히 고속 비행으로 피해내며 시가지 방호벽의 오른쪽 끝으로 이동한다.
찰칵! 찰칵!
양팔을 좌우로 뻗고는, 방호벽 위를 빠르게 비행했다. 내가 지나가는 지점마다 골렘볼들이 바닥에 데굴데 굴 떨어진다.
-사출과 동시에 골렘 작동 명령삽입.
-최근 업데이트된 기능을 사용합니다. 자율 전투 프로토콜 발동.
골렘볼이 터지고, 골렘 도면과 마정석, 압축 진흙이 머드 골렘이 형태를 이룩한다. 머드 골렘들은 모습을 일으키기 무섭게 방호벽을 기어오르려는 몬스터들을 무참히 짓이기기 시작했다.
"뭐야, 깜짝이야!"
"저거 우리 편인가?"
치직!
-여기는 본부. 아군 헌터의 능력이다! 놀라지 말고 저 진흙 괴물을 보호하라!
진흙 괴물이라니, 은솔이 들으면 상처받겠네.
나는 빠르게 비행하며 오른쪽에서부터 왼쪽 끝까지 모든 방호선에 골렘볼들을 깔아두었다.
이걸로 한숨 덜었다. 골렘들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으리라.
다시 방호선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후우우우."
많았다. 정말 몬스터가 진절머리나게 많았다. 홍연이 몬스터 떼를 헤집고 다니며 천부장과 싸우고 있었지만, 주위에 머릿수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직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천부장을 처치해도, 이 몬스터들을 어떻게든 해야 해.'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탑주.
'그걸 써보자.'
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깨에 장치를 눌러 윙 골렘을 정지 비행상태로 유지했다. 일말의 집중력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몸은 풀렸고 시동도 걸린 상태.
빠르게 마나 몰입 단계로 넘어간다.
시끄러운 잡음들이 사라지며 점점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혹자는 5공정 원소마법을 무의미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유지력에 강점이 있는 3공정 마법이 2공정에 밀려 안 좋은 취급을 받고 있다면, 5공정 마법은 효율 이전에 현실성이 없는 마법이라고 치부 당한다.]
[5공정 생태계의 기본은 '폭주'다. 위력은 있지만 효율이나 안정성, 그리고 술자의 멘탈에 치명적인 리스크를 유발하는 단점이 있기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장되고 있다.]
'마법의 정석'마저도 5공정 원소마법의 비효율성에 대해 언급한다.
효율성과 안정성을 등한시하고, 위력에만 집중한 시대에 뒤떨어진 마법이라는 소리다.
그래도 살다 보면, 무리를 해서라도 이 흉악한 힘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오는 법이다.
'메인 마법진을 깐다.'
나는 데바의 눈을 이용해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바닥 아래에 가완성 마법진을 깔았다.
'이와 연동된 네 개의 서브 마법진을 주위에 설치.'
메인 마법진은 발동을 위한 장치이자, 마법이 발현하는 '문'일 뿐이다.
주요한 수식의 처리는 이 네 개의 서브 마법진에서 돌아간다.
-5공정 마법진 발동 준비 완료.
'폭주 단계로 넘어가자.'
-네, 탑주.
네 개의 서브 마법진이 흔들리며 메인 마법진을 폭주시키기 시작한다. 이건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브 마법진이 흔들릴 때마다, 마법진과 언동된 내가 느끼고 인식하는 주위도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한다.
'큭!'
흔들림이 점점 심해진다. 이건 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계속 흔들린다. 속이 뒤집힌다. 눈이 팽팽 돈다.
자이로드롭을 타고 최고속도로 내려갔다가, 뒤집고 다시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같다.
나는 분명 수백 미터 상공에 둥둥떠 있을 뿐인데, 저 멀리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의 몸이 훅 다가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탑주! 집중력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으으으, 아직 버틸 수 있어! 대책을 마련해 줘 빨리!'
에아가 다중 영창을 극단으로 실행시킨다. 네 개의 서브 마법진 각각에 4종 보조 마법진을 매달아 수식처리량을 분산시키지만, 이 미칠듯한 진동은 어쩌지 못한다.
'끄으으으으! 씹! 이건 진짜 좀 아니잖아!'
마법의 정석 저자에게 따지고 싶다. 이건 현실성이 없는 마법 수준이 아니다. 그냥 자살 마법이다!
정말이지, 마법진이 날 죽이려 드는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온몸의 마나가 진동하며 정신 자체가 무너지려 하고 있다.
-탑주! 마법을 중지해야 합니다!
'안돼!'
이제 와서 멈춰봐야 마나 역류만 올 뿐이다.
이봐. 대체 언제까지 버티라고? 이제 나올 때 안 됐냐? 응? 제발!
[폭주 내성 특성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떴다! 이 빌어먹을 특성!
한계까지 치달았던 마력의 흔들림이 살짝 줄어든다.
[폭주 내성 특성이 Lv.2에 도달했습니다.]
조금은 편해졌다. 몸이 가루 단위로 분해되는 느낌에서, 조각 단위로 잘리는 느낌으로.
맞다. 여전히 더럽게 힘들다는 소리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한 톨의 집중력까지 쥐어 짜내서 남은 수식을 마무리 한다.
"조심해!"
"땅이 흔들린다!"
밑에 있는 군인들이 갑자기 난리다. 진짜로 흔들리는 건가? 아니면 갑자기 내 어지럼증이 주위로 전염된 건가? 나는 메인 마법진이 있는 자리로 시선을 움직였다.
지반이, 융기하고 있었다.
"허, 허억!"
"이게 뭐야!"
몬스터들이 밟고 있는 바닥이 산처럼 솟구쳐 오르며, 몬스터들이 와르르 굴러 떨어진다. 융기된 지반의 곳곳에 난 금에서 시뻘건 빛이 번뜩인다.
모두가 지반 융기에 입을 벌리고 있는 가운데, 나는 반쯤 놓은 정신으로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성공했다. 악명 높은 5공정 중에서도 최강의 화력으로 손꼽히는 대재해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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