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33화
"내 신호에 맞춰서 가."
4공정 마법<가이아>가 완성됐다.
지면에 균열이 일어나며 내 손바닥을 중심으로 마나가 지면을 타고 퍼져나간다.
"지금!"
터엉!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지면을 짓밟은 그녀가 바닥을 산산조각내며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뒤이어 붉은 마력이 지직거리는 전격 형상으로 허공에 번진다.
그녀는 밀려드는 몬스터의 파도를 향해 단신으로 전진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진행 방향을 계산하고는 가이아를 이용해 대지를 재구축한다.
그녀가 달리고 있는 지면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 속도 그대로 일정하게 유지해!"
-네!
층을 나눈다. 그녀는 혼자서 좁은 지하 1층에서 내달리는 격이 되었다. 벽은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며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캬르르륵!
-케에에!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은 지형 때문에 홍연을 공격하는 게 여의치 않았고, 포위도 불가능하다.
그녀는 달리면서 정면의 적만 처치하면 되었다. 몬스터들이 지하로 뛰어 내려와도 진작에 홍연은 저만치 앞서나가 있다.
쿠웅! 쿵!
그때였다. 다른 개체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덩치의 대형 몬스터가 주위 몬스터들을 짓밟고 뛰어와 한 번에 팔을 쭉 뻗는다.
-에스코트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녀가 제자리에서 점프해 몬스터의 팔을 타고 올라가더니 그대로 대형 몬스터의 머리를 베어떨어뜨렸다.
"흐읍!"
지면으로 내려온 그녀의 몸이 불똥을 튀기며 전진한다. 붉은 마력을 휘감은 장검이 세상을 갈랐고, 그사이에 낀 몬스터들도 갈랐다.
두 발은 쉬지 않고 앞으로. 구불구불한 뱀이 장애물을 피해 전진하듯, 그녀에게는 최소한의 공간도 돌파구가 된다.
필요할 때는 참격으로 길을 만들고, 몬스터들의 몸통을 타거나 머리를 밟고 달리기도 했다.
힘으로 막 뚫고 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효율의 극의를 보여주는 돌파다. 그리고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섬광이 번뜩이며 몬스터들의 몸이 쩍쩍 벌어진다.
'덕분에 이쪽은 프리패스지.'
그리고 나는 가이아를 사용해 지면 아래에 좁은 굴을 만들어가며 달리고 있다.
나 혼자였다면 소리도 크고 흔적도 남아서 몬스터들에게 발각당했겠지만, 지금 홍연이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어주고 있다.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지면이 울리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하늘이 울부짖는다.
-탑주! 조심하십시오!
땅굴 천장에서 구멍이 뚫리며 몬스터들의 손톱 같은 것들이 내려온다.
눈치 빠른 녀석들은 반응하는 모양.
나는 고개를 움직여 피해가며 계속 전진했다.
데바의 눈이 극대화되어 지면 위의 시야를 제공한다. 홍연은 여전히 단신으로 돌파하고 있지만 몬스터들의 물량 공세에 슬슬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다. 그사이 내가 그녀를 따라잡았다.
-탑주. 이제 4공정 가이아의 범위 최대거리까지 도달했습니다.
'오케이.'
바로 위에서 홍연이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다. 나는 이어마이크에 손을 올렸다.
"홍연. 밑에서 올라올 거니까 놀라지 마."
-네?
가이아 마법진의 화력을 일순 최대한으로 올렸다.
퍼어어어어엉!
지면이 통째로 터져 나오며 그 흙들이 산사태가 되어 몬스터들을 밀어낸다. 지면의 중앙에는 초대형 어스 클레이모어가 올라와 나와 홍연의 몸을 위로 붕 밀어낸다.
"홍연! 그대로 내려와!"
나는 지면검에 등을 붙이고, 두 무릎을 가슴 위에 붙인 채 발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홍연이 그 모습을 보고 내려왔다.
서로의 신발 밑창이 맞닿는 순간, 나는 마법을 발동했다.
<데바스타 라이트>
양발에서 검은 마력이 폭발하는 동시에 다리를 뻗는다. 굉음과 함께, 그녀의 몸이 레일건처럼 한 줄기 빛을 그리며 쏘아져 나간다.
나는 몰아치는 후폭풍을 느끼며 정면을 응시한다. 쏘아져 나간 홍연의 몸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쩌엉!
저 커다란 플랜트가 통째로 두 동강 났다.
세상에, 일격이라니.
-플랜트 다운 확인!
-주위 몬스터들의 전력이 급감합니다!
플랜트는 몬스터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주위 몬스터들에게 영양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여 일종의 버프 효과를 제공한다. 하지만 플랜트가 사라진 것으로 그 효과도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나는 그대로 대자로 뻗어버렸다.
'으, 힘들어. 4공정은 역시 마나 소모가 너무 심해.'
-탑주!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바닥에 떨어진 나를 향해 몬스터들이 이빨과 발톱을 들이밀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누운 자세에서 검지를 위로 향하게 움직였다. 곧 좌우 사방으로 어스 클레이모어들이 일어나 몬스터들을 꼬챙이로 만든다.
'방심 안 해.'
블루 엘릭서를 꺼내 들이켜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가락은 여전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다.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족족 꼬챙이가 되어 올라가며 어느새 내 주위는 어스 클레이모어와 시체들로 언덕이 만들어졌다.
"홍연. 살아 있어?"
내가 그렇게 묻자 저 멀리서 붉은 마력이 폭발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린다. 몬스터들이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날아다니고 있다.
-선배 걱정이나 하시죠.
"예이, 예이."
나는 주먹을 꾹 쥔 팔을 옆으로 젖혔다.
<파이어 캐논>×20
하늘에서 무수히 많은 마법진들이 꽃밭처럼 흐드러지게 펼쳐지고, 몬스터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위를 응시한다. 이글거리는 화염구들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들 준비를 한다.
'사출 개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는 것으로, 불의 징벌이 밀집한 몬스터 진형에 떨어진다. 순식간에 지상이 화마에 휩싸인다.
<파이어 캐논>×10
<파이어 캐논>×10
<파이어 캐논>×10
사용된 마법진이 있던 자리에 다시 새로운 마법진이 떠오른다. 화염구는 끊이지 않고 계속 공급되어 지상을 폭격한다.
지독한 악취가 불에 의해 정화된다. 불은 몬스터를 태우고, 이어 바닥에 있는 리빙필드도 태운다.
꿈틀거리는 생체 바닥이 점점 사라지더니 원래 탄자니아의 토양이 드러 난다.
자욱한 연기에 눈이 맵고, 탄내가 코를 찌르지만, 그래도 오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탄내가 마음에 들었다.
'계속 하자. 에아.'
-탑주의 명을 따릅니다.
오랜만에 퍼붓는 기분을 만끽하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마다 불길이 치솟고 몬스터들이 잿더미가 된다.
* * *
플랜트가 파괴되자 전투는 할 만해졌다. 특별히 강한 개체도 없었고, 숫자만 많은 2~4랭크 몬스터들이 대부분이다.
백부장도 두 마리 정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전부 홍연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
수백의 몬스터들이 깔끔히 정리되는 모습을 본 스콜과 특공대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콜 대장."
"음?"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싸움은 뭘까요?"
스콜은 피식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내의 싸움이지. 버티고 또 버티다 보면, 가끔 이런 기적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곤 하는 거야."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위에 앉아 블루 엘릭서를 연이어 들이켜고 있었다.
"선배."
홍연이 바람같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몬스터들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 싸웠으면서도, 그녀는 처음과 비교해 그리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몸에 튀었던 괴수들의 피도 마력을 일으켜 가볍게 날려 버렸다.
"왜?"
"저건 뭔가요?"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섬처럼 남은 좁은 리빙필드 위에 10기 정도의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아, 몇 가지 실험하고 있었어."
"이런 상황에 실험?"
그녀가 탐탁지 않은 듯 노려보았지만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안 들을 거야?"
"……말해주세요."
"타베스계 몬스터들은 리빙필드 밖으로는 나가지 못한다고 했잖아? 정확히는 아니었어. 불로 지져서 놈들이 밟고 있는 리빙필드를 먼저 태워봤는데 여전히 잘만 움직이면서 덤벼들더라고."
그런데 이상한 건, 홍연을 돌파시키느라 일직선으로 땅을 쭉 뒤집어 엎었는데, 몬스터들은 그곳을 바로 통과하지 못하고 빙 둘러서 이동했다.
분명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통제구역 몬스터 특유의 법칙은 제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이번엔 날뛰는 타베스계 놈들을 대지계 마법을 가두어 놓고, 놈들이 밟고 있는 것 외에 주위의 리빙필드만 모조리 태워버리고 벽을 해제해 봤다.
그러자 놈들은 바로 지금처럼, 리빙필드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됐다.
"그러니까 이거야. 놈들은 원래 리빙필드 밖에 있어도 힘이 좀 빠질 뿐, 원래는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놈들이 바닥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 리빙필드 밖으로 못 나간다."
"흐음, 뭔가 부자연스러운데요?"
"그렇지? 자연스러운 생리는 아니야. 오래된 몬스터는 확실히 아니고, 비교적 최근에 새롭게 만들어진 개체 같은데. 일단 좀 더 조사해 보려고."
나는 고개를 돌려 리빙필드 위에서 있는 몬스터 무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파이어캐논으로 바닥만 불태우면, 놈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들것이다.
그 대신 나는 아이스자벨린으로 밖에 나오지 못하는 놈들을 관통상으로 정리했다. 이후 파이어캐논을 떨어뜨려 깔끔하게 남은 리빙필드까지 제거했다.
뒤처리까지 모두 끝낸 내가 스콜을 바라보았다.
"다음으로 가시죠. B플랜트까지 제거해야 우리 임무가 끝나는 거잖아요?"
"아, 넵 모시겠습니다."
스콜이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3팀. 톰캣-2를 잃었지만 A플랜트를 제거했다. 헌터들을 데리고 B플랜트로 이동하겠다 이상.
-여기는 본부. 수고했다. B플랜트로 이동해 주길 바란다.
지직!
그때 무전기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여기는 찰스 4급이다. 신참들 실력은 어때?
스콜은 말을 멈추고 우리를 보더니 씩 웃어 보였다.
-탄자니아의 전황을 통째로 뒤바꿀 정돕니다.
* * *
A플랜트를 파괴한 우리는 신속히 B플랜트를 향해 이동했다.
B 플랜트야말로 천부장이 지키고 있는 핵심 중의 핵심. 다섯 개 중 네 개의 플랜트가 무력화된 만큼, 이제 우리가 마지막 플랜트만 끊으면 전황이 크게 바뀔 것이다.
스콜과 특공대원들도 전원이 비전투계 플레이어 출신이었다. 마나를 사용해 빠르게 달리는 것 정도는 가능했기에, 우리는 그들과 호흡을 맞추며 정글을 가로질렀다.
"후욱! 후우우!"
스콜은 거친 숨을 내쉬며 무전기를 입에 댔다.
"여기는 특공3팀. B플랜트 지점에 도착했다."
-잘 했다, 특공3팀. 다른 지원 병력도 그쪽으로 가고 있다. 상황은?
나와 스콜은 앞을 바라보았다.
"……비었다."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는 B플랜트의 주위로는 약 50기의 몬스터들이 전부, 아까 수백 기의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던 A플랜트에 비하면 경비가 허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부장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무전기가 치직거리며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기는 DF-1! 대규모 병력이 시가지로 밀려들고 있다! 처, 천부장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이쪽으로 왔다!
흐음.
몬스터들 쪽에서 먼저 B플랜트를 버리고 승부수를 던졌다. 전 병력이 우리 본진을 공격하고 있다. 지능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스콜이 재차 통신했다.
"여기는 특공3팀. B플랜트를 빠르게 제거하고 DF-1로 향하겠다. 이상."
-허가한다.
-3팀을 제외한 전 병력 DF-1 로 신속히 이동 바람.
지침이 정해졌다. 무전 내용을 듣고 있던 홍연이 몸을 일으켰다.
스릉!
그녀의 검집에서 눈부신 검이 태양광을 반사시키며 뽑혀 나왔다.
"5분."
"예?"
"5분 안에 정리하겠습니다."
"예, 예?"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는 적진을 향해 쏜살같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