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29화
-너 출장 한번 갈 생각 없냐?
협회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해외 파견.
헌터라는 직업상 빠질 수 없는 숙명이다. 무엇보다 공인 2급 헌터가 되기 위해 쌓아야 하는 가장 필수적인 커리어 중 하나다.
'2급을 찍긴 찍어야지.'
공인 2급 헌터가 되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부터는 임남진, 마르첼로, 메네스 같은 세계적인 괴물들이 속해 있는 단계.
2급부터는 헌터 한 사람의 가치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세계 헌터 연맹'에서 직접 관리한다.
전처럼 국가에서 자격을 주는 게 아니라, 오로지 세계 연맹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만이 2급으로 승진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모든 헌터들의 꿈이자 종착지라고 할 수 있는 레벨.
그렇기에 해외 파견은, 언젠가 한 번은 꼭 넘어야 할 산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협회장에게 물었다.
"파견에 대해서는 알겠는데요. 홍연에 대한 일이라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무슨 말씀이겠냐? 너랑 연이랑 둘이서 오붓하게 다녀오라고.
"넵?"
-언니 된 마음으로 동생 혼자 파견 보내기 걱정되잖냐. 괜히 또 이상한 시커먼스들이랑 붙여 보내면 찝쩍대거나 할까 봐 기분 뒤숭숭하고.
아니, 누가 걔한테 찝쩍댄답니까.
맞아 죽으려고.
-그리고 너도 나쁘지 않잖아? 언젠가 한 번은 갈 거, 연이랑 같이 가서 걔 실컷 굴려 먹으면 임무도 빨리 끝내고 편하지.
……음, 이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리네?
-물론 연이도 너랑 같이 가면 의욕도 생기고 자극도 많이 될 테니까 더할 나위 없고!
그래, 이게 본의겠지.
"그래서, 파견지는 어딥니까?"
협회장이 아끼지 마지 않는 여동생이니까, 위험한 곳보다는 대충 북유럽전선 같은 곳에서 꿀 빨다 오지 않을까 싶다.
-아프리카야.
이런 미친!
-걔가 워낙 고집을 부려서 말이야. 해외 파견은 인류가 가장 헌터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뛰고 싶다고.
"……알 만 하네요."
-그래서, 어쩔래?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가 정 싫다면 연이 보디가 드로 붙여줄 다른 사람 찾아 봐야지 뭐. 저-엉 싫다면 말이야.
고민된다. 홍율은 강요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말투로 보면 은근히 그때의 계약을 언급하고 있다.
홍연과 관련된 부탁을 할 경우, 웬만해선 들어줄 것.
알케미아가 협회 연구 재단에 들어가는 대신, 그녀가 내세웠던 조건중 하나다.
그녀는 철저히 나를 앞세워 홍연을 컨트롤하고자 했고, 이번 파견도 그 일환 중 하나일 것이다.
'자, 그럼 계산기 한번 굴려볼까.'
협회장이 이례적으로 부탁을 해왔다. 대한민국에서 못하는 게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바로 여동생 문제. 홍연의 컨트롤러 역할은 전 세계에서 나만이 쥐고 있는 포지션이다.
물론 보상 쪽을 생각해 봐도 만족스러우리라 예상된다. 그동안의 행적을 미루어봐도, 그녀가 내게 섭섭하게 대우해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부 다 파격적이고,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홍연과 함께 이번 임무를 클리어해낸다면, 그 보상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 대신.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오, 할 생각은 있다는 거네? 말해봐.
"첫째, 홍연의 경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제 경우는 비공개 파견으로 해주십시오."
-흠.
그녀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오케이'를 외쳤다.
"그리고 둘째, 저한테 직통으로 오더 내리지 말아주시고, 가람의 신나라 대표를 통해서 해주십시오."
-어엉? 그건 왜?
"겸사겸사 할 일을 해두려고요. 오더 내용은 '소속 공인 3급 중 한 사람' 파견으로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뽑힐 겁니다."
스피커 너머에서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니 대가리 굴러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얘가 사업물 먹더니 이쪽도 머리 잘 굴리네?
후후, 그러는 협회장님도 사실 저한테 한번 당했습죠.
-좋아, 좋아. 네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겠어. 출장은 바로 준비해도 괜찮지? 그 동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이야.
"넵.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수화기에서 '읏차차'하고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났다.
-분명 재미있을 거야. 아프리카가 어떤 상황인지는 알지?
"몬스터들과 전면전 중이죠."
-맞아. 새로운 환경에서 헌팅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있을 거야! 사실 그런 동네만큼 헌터 대우받을 수 있는 곳도 별로 없거든. 가서 영웅노릇도 쫌 하고! 우리 연이도 잘 지켜주고!
사실 지켜지는 쪽은 저라고 생각합니다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 노파심에 말하는데, 막 또 젊은 남녀 둘이서 갔다고 이상한 짓하고 그러면.
"안 합니……!"
-이 누나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네?
-대신 책임만 지면 돼. 책임만!
"이상한 소리 하지 마세요!"
협회장이 한 차례 크게 웃었다.
-근데 함 해볼라고 해도 걔가 워낙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서, 공 많이 들여야 할 거다?
"……하하."
그녀는 한시름 놨다는 듯 이런 저런 하소연을 했다.
-암튼 뭐, 연이 문제를 떠나서 출장 가주는 건 고맙다! 요즘 지원만 받고 파견은 안 보낸다고 연맹에서 지랄지랄하고 있었거든.
"연맹에서 그랬어요? 제가 가서 협회장님 어깨 펼 건수 만들어놓고 오겠습니다."
깔깔깔깔! 수화기에서 요란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요즘 너 때문에 산다 진짜! 기대하고 있을게? 아,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진 마. 건강이랑 안전이 최곤 거 알지?
"옙!"
-끊는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협회장과의 통화를 종료하고는 의자 등받이 등을 깊게 기댔다.
"탑주."
허공에서 빛무리가 모여들며 에아가 나타났다.
"정말로 가실 겁니까?"
"응, 한번 가보려고."
내가 기지개를 쭉 켜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스럽게 생각하지 마. 남들이야 뭐 거창하게 해외 파견이겠지만, 나는 그냥 출퇴근이잖아?"
"……아."
걱정스러워하던 에아의 표정이 약간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그렇긴 합니다."
내게는 5층의 워프게이트가 있다.
얼마든지 아프리카와 한국을 왔다갔다 할 수 있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냥 출퇴근이다.
일과 시간에는 저쪽에서 일하다가, 일과 끝나면 평소처럼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식 먹고 마탑에서 애들이랑 빈둥거리다가 일터로 복귀하면 된다. 벌써부터 꿀 빨 생각에 기분 좋네.
"애들은 어때?"
"아직도 열심히 마시고 있더군요."
협회장과의 긴 통화를 마친 나는, 에아와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뭐야, 이건."
난리가 났다. 테이블의 음식이 엎질러져 있고 한쪽에 쏟은 음료수도 아무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깔깔깔!
와하하!
몇몇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있고, 몇몇은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솔이는 어딨어? 누가 챙긴 거야?"
"9층에 올라오기 전에 잠들어서 제가 방에 데려다주고 왔습니다."
"다행이네."
나는 모두에게 다가가 손뼉을 짝짝 쳤다.
"자아, 다들 이제 그만 하고……"
"김유신 스승니이이임!"
술에 취한 나대용이 나를 척 가리켰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다.
"……왜 그래요?"
"일동 차려엇!"
그의 외침에 어디선가 나타난 김사랑과 소심희가 양옆으로 착 기립했다.
"경례!"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아아아!"
그러고는 내 방향으로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스승님의! 딸꾹! 하해와 같은 은혜를! 딸꾹! 어떻게 보답해야……!"
"으헝헝!"
김사랑 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기어와서 내 오른 다리를 붙잡았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사, 사랑씨……!"
"어, 뭐야? 이거 김 대표님이 아니라 나무잖아? 나뭇잎이 무성하게 났네."
그녀가 내 다리를 슥슥 문지르다가 급기야 자기 뺨을 비볐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른 내가 얼른 그녀를 떼어놓으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허리를 당기는 손길에 바닥에 넘어졌다.
"김 대표님 잡았다아."
"도연 씨!"
그 차분하고 냉정했던 차도연이 요염하게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고혹적으로 웃고 있었다.
"김 대표니임? 아니, 유신아아. 누나는 너어어무우우 가슴이 아파아아."
"죄송합니다 누나. 제게 불만이 있으시면 말로, 말로 해요. 으악!"
"도연 언니! 내 나무 뺏어가지 마!"
김사랑 이 대뜸 달려들어 내 다리를 끌어안았다.
"내 나무야 내 나무! 나무? 아, 오늘 식목일이구나? 나무 심어야 해! 이렇게 모종삽으로 얍얍!"
그녀가 대뜸 일어나 내 신발을 흙에 묻는 시늉을 했다.
"나무르을- 심으며언- 이산화탄소를 냠냠 해줘여어- 아니! 이산화탄소? 오존층의 적! 용서할 수 없어요! 헤어드라이기 너도 마찬가지야!"
그러고는 내 가슴을 투닥투닥 때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의식의 흐름을 따라 갈 수 없다. 얼른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다들 지금 문란하게 뭐 하는 짓이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진보라가 달려와서 괴물 같은 힘으로 차도연과 김사랑을 내게서 떼어냈다.
힘에 밀린 두 사람이 형편없이 나가떨어져 바닥을 구르더니, 그대로 뻗어서 잠들었다.
"보라야 고맙……"
"선배뉨은 내 꼬야 이뇬드라아!"
그러곤 일어나려는 내 품에 와락 안겼다. 나는 도망치지 못하고 그대로 붙들려 다시 바닥에 눕고 말았다.
"헤헤, 선배뉘임."
그러고는 평소보다 더 과격하게 앙탈을 부리기 시작했다.
"보라야! 대체 너희 몇 병 마신 거야?"
"응? 몰라요오! 인당 쏘주 두 병에 와인 한 병에 양주 한 병은 처리했쬬오! 헤헤!"
총체적 난국이다. 나는 나대용 쪽을 바라보았다.
"대용 씨! 여성분들 좀 부축해서 침실로 데리고……"
나는 말을 멈추고 헛웃음을 흘렸다. 나대용은 아까 나한테 큰절한 그 자세에서 굳어진 채 드르렁거리며 코를 골고 있었다. 다른 남자 멤버인 조용희는 소파 뒤에 두 다리만 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완전히 뻗었다.
"선배뉘이이임! 너무 해요오오!"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윽, 너무 가깝다.
"왜 쩌런 남자를 보는 거예요오오? 선배님 게이에요오오? 저한테 집쭝해달라꼬요오오!"
워낙 가까이라서 숨결마저 느껴진다. 그녀에게서 과일 칵테일 향이 난다.
미치겠다. 안 그래도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데.
"보라야. 미안."
"꺄악?"
나는 힘으로 그녀를 밀어내고는 어깨를 껴안고 무릎 사이에 팔을 넣어안아 들었다.
"야! 정서진! 어딨냐? 너까지 뻗은건 아니겠지?"
"선배뉘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술기운으로 뺨이 붉게 달아오른 진보라가 아기처럼 엄지손가락을 살짝 입술에 넣은 채 쑥스럽게 말했다.
"져 납치하쉬는 고예요?"
"……."
인내심.
참을성.
지구력.
절제심.
참자. 참아야 한다. 새로운 식구들온 이 기분 좋은 첫날부터 사고 칠수는 없다.
"선배뉘임 옴냐옴냐……"
결국 진보라는 취기를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고개가 젖혀지면서 목덜미가 강조되어 오히려 더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나는 필사적으로 아래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일단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스승니이이임!"
그때 나대용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도 돕겠습……!"
우당탕탕.
"……대용 씨는 그냥 거기 누워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은데요."
"이런."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정서진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한심하군요."
난장판이 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그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무리 기분 좋은 날이라고 해도, 감당이 안 되는 음주는 삼가야 합니다."
"오오! 역시 넌 무사했구나!"
"당연합니다. 전 일 미리 만큼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탑주."
에아가 청소도구를 들고 허공에서 나타났다.
"쓰러진 분들을 침실로 데리고 가주십시오. 그사이에 저는 주변 정리를……"
투둑.
정서진의 안경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 하하…
"야, 서진아? 너 눈이 맛탱이가 갔……"
"에아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임!"
정서진이 두 팔을 벌리고 에아에게 돌진했다.
<라이트 데바스타>
그리고 나는 즉시 데바스타를 켜고 날아올라 정서진의 뒤통수를 가볍게 후려쳤다.
녀석의 몸이 휘익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주위의 도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헤헤헹."
정서진은 괴상한 소리와 함께 늘어졌다.
"어후, 진짜. 한 명도 정상이 없냐."
"고맙습니다 탑주. 하지만 저건 좀 심한 게 아닐는지……"
"살살 찼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철인은 저 정도론 안 죽어."
나는 골골거리며 쓰러져 있는 차도연의 몸을 안아 들었다.
'이거 다 어느 세월에 정리하냐.'
그래도 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마시겠는가.
나는 꿋꿋이 모두를 방으로 옮겼다.
'홍연과의 출장이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