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28화
드디어 대한민국 5급 공인 시험결과가 나왔다.
1위. 하연우 - 유닉스 길드.
…….
5위. 진보라 - 한국 헌터 아카데미.
…….
12위. 은솔 - 무소속.
14위. 나대용 - 무소속.
…….
21위. 김사랑 - 무소속.
…….
40위. 조용희 - 무소속.
47위. 차도연 - 무소속.
52위. 소심희 - 무소속.
…….
121위. 정서진 - 무소속.
관리자 세 사람은 물론, 4층팀 5인전원 합격이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어디 있을까.
특히 나대용은 비전투계 출신으로서 경쟁력 넘치는 미궁 세대를 제치고 10위대 반열에 올라섰다.
관리자들이 거둔 성적은 그리 놀랍진 않았다. 진보라는 마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학생회에 들어갈 만큼의 실력자였고, 은솔은 골렘이라는 파격적인 장비를 보유한 데다가 헌팅관련 경험이 워낙 풍부했다.
특히 정서진은 마음만 먹으면 최대유망주 하연우를 제외하고 2~3위까지 노려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지만, 자신이 이슈화되면 곤란하다며 탈락이 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반칙'을 범해서 순위가 급락했다.
가람이 밀어주던 라이벌 X-1 팀은 팀장 추형석이 22위의 성적으로 합격했고, 두 명이 떨어졌다.
전면전까지 올라온다면 살아남을 실력은 충분했겠지만, 예선에서 극한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를 버티지 못하고 아웃된 모양이다. 역시 문제는 멘탈이었다.
5급 시험 리뷰 기사에서도, 4층 멤버들이 이번 공인 5급 시험 주요이슈 중 하나로 선정됐다.
-마도사 김유신이 이끄는 직속 마법사 멤버 5인, 공인 5급 시험 전원합격!
-비전투계 능력자들이 낸 성적으로는 이례적! 김유신은 무슨 마법을 부렸나?
괜찮게 이슈화됐다. 덕분에 여러모로 피곤해지게 됐는데, 내 스케쥴을 담당하던 신나라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유신 씨! 엘리제 궁에서 초대가…….
-유신 씨! 김지희 원내대표가 연락을…….
-유신 씨! BBC에서 취재 요청이….
-유신 씨! 캠버리지에서 강연 요청이…….
수 많은 대학 강연 요청에, 면담 요청에, 행사 초대까지. 이제는 전 세계가 마법에 주목하고 있다. 나는 꾹꾹 액정을 눌러 답장을 보냈다.
-괜찮습니다. 평소 해주셨던 대로 정중히 거절해 주세요.
-앗, 이번엔 정말 아까운 제안들이 많이 왔는데 정말 괜찮아요? 유신씨의 인지도는 물론, 마법도 세계에 더 알릴 기회인데요.
굳이 그런 홍보 수단을 취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 너무 급해도 좋지 않고, 너무 느려도 좋지 않다.
딱 이 정도 속도가 좋다.
나는 거절해달라는 답장은 다시 보낸 다음,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상계동 역으로 향했다.
"저기 오셨다!"
그리고 내가 시험을 치른 4층팀을 만났을 때. 다들 엉겨 붙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다.
"김 대표니임! 으흐흐흑!"
"붙었어요! 진짜로 붙었다고요!"
"하하하! 진정하세요. 제가 어떻게 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 해낸 일이에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들 달래느라 한참을 진을 뺐다. 엎드려 있는 나대용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들어 모두를 보는 순간.
'…….'
나는 침음을 삼켰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는 눈빛에는 존경심 같은 게 아니라, 어떤 신앙과도 같은 뭔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은 부담스럽다.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감내하셔야 합니다. 탑주.
에아가 말했다.
-에렌델에서의 마탑주는 권력의 정점이자 별. 만민이 마탑주를 우러러보고 존경했습니다.
'하하, 또 그 소리야?'
-인간이라는 종족은 무언가에 종속되고, 소속되어야 안정감을 취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왕권이든, 기업이든, 애국심이든, 종교 혹은 이념과 사상이든, 인간은 홀로서기에는 한없이 나약하기에 기댈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여긴 에렌델이 아니야 에아. 나보고 신이라도 되라는 소리야?'
-아닙니다.
에아가 말했다.
-누군가 탑주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할 때,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기대라.
나는 4층팀 모두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며 말했다.
"그럼, 장소를 바꿔볼까요?"
"어디로요?"
"말씀드렸잖아요? 전에 약속한 곳으로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아……!"
나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의 원천을 보여드리죠."
* * *
나는 4층팀을 데리고 통제구역으로 들어왔다.
"으스스하네요."
다들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풀이 무성한 숲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눈을 번뜩이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몬스터들은 결코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스승님!"
커다란 덩치를 움츠리고 걷던 나대용이 말했다.
"왜 놈들이 안 달려들죠? 아! 혹시 스승님이 또 뭔가 하신 겁니까?"
"그런 셈이네요. 정확히는 뭔가 한게 아니라 해둔 거지만요."
나는 옆에서 긴장감에 떨고 있는 소심희의 손을 놀라지 않게 부드럽게 잡았다.
"자, 여러분도 일렬로 서서 서로서로 손잡아요."
그들은 별 의문을 느끼지 않고 순순히 시키는 대로 손을 잡았다. 내가 가장 앞에서 모두를 이끌었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자욱하게 퍼져 있는 하얀 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손 놓치면 미아가 되니까 조심하세요."
그 말에 소심희가 내 손을 꽉 붙잡는 게 느껴진다. 다른 멤버들도 꼴깍 침을 삼켰다. 나는 모두를 데리고 안개 속을 걸었다.
그렇게 5분쯤 걷자 마침내 우리는 안개 미로를 빠져나왔다. 탁 트인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
"와아아."
우뚝 솟은 마탑이 모습이 바로 앞에 보였다.
"이게 그 서울의 흉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모두의 감상을 들으며 앞으로 나왔다.
"자, 지금부터 금제를 세기겠습니다."
금제에 대해서는 미리 설명을 해두었다. 다들 각자 원하는 신체 부위에 '마탑의 문장'을 받아갔다.
굳이 쇄골 아래에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김사랑 때문에 조금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지만,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자, 그럼 우리 대용 씨는?"
"남자는 장딴지 아니겠슴까!"
나대용이 바지를 걷어 올리자 짐승처럼 털이 무성한 다리가 드러났다.
나는 질색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다리에 문장을 새겼다.
다음부터는 그냥 선택의 자유를 주지 말고 팔이나 손목 둘 중에 하나 고르라고 해야겠다.
"그럼 들어가죠."
내가 먼저 마탑의 정문에 손을 올리며 시범을 올렸다.
"아, 참. 다칠지도 모르니까 한 사람이 들어간 뒤에 10초 간격으로 들어오세요."
"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 몸이 마탑의 문으로 쑥 빨려들어갔다. 시야가 바뀌며 익숙한 1층 로비가 드러났다.
"어머, 오셨어요?"
"오빠야다!"
"어서 오십시오, 탑주님."
로비에서 쉬고 있던 관리자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배님. 4층 팀은요? 같이 온다고 하셨잖아요."
"같이 왔어. 곧 들어올 거야."
"아, 이제 들어오는 거예요? 재밌겠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기라도 한 듯, 다들 정문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안 들어오는데요?"
"조금만 기다려봐."
우웅.
그때 마탑의 정문이 빛났다.
"우와아아악!"
제일 먼저 산만 한 덩치의 나대용이 허우적거리며 나타나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엎어졌다.
"엄마야아아악!"
뒤이어 도도한 차도연이 엄마를 애타게 찾으며 쓰러졌고.
"으아악!"
"끼야아아아악!"
뒤이어 한명 한명 인생 흑역사 표정을 남기며 바닥에 엉켜 엎어졌다.
"하하하하!"
"마탑에 오신 걸 환영해요!"
다들 왁자지껄 웃으며 새로운 식구들을 환영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지만, 마탑에 처음 들어올 때는 누구나 저렇게 볼품없이 넘어진다.
"와아아……"
4층 팀원들의 눈이 커지다 못해휘둥그레졌다. 번쩍번쩍한 1층의 황금 로비에, 마법 솥과 특수 관 등이 어우러진 마법 장비들.
"타, 탑 안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꿈만 같아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정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아. 나, 4층팀들 데리고 견학 다녀올게."
"네. 탑주님."
"에아도 같이 가자. 설명해 줘야지."
"예."
나와 에아는 네 사람을 데리고 다니며 각 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1층, 포션 조제국.
2층, 대서재.
3층, 골렘 공방.
에아가 층에 대한 설명을 할 때마다 다들 세상에 처음 나온 듯한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워낙 리액션이 대단해서 구경시켜주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4층, 기상설계국.
"여기가 앞으로 여러분이 일할 장소입니다."
"와……"
자신들이 일하게 될 장소라는 말에 가장 큰 호응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빠르게 흩어져서 주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벌써 여긴 내 자리라며 찜해두는 사람도 있었다.
뒤이어 에아가 기상설계국의 기능과 필드마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럼 이 층 하나를 통째로 저희에게 내어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죠. 여러분도 이제 마탑의 일원이니까요."
다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4층은 필드 마법을 제작하는 곳입니다. 아직은 수식을 건들기도 어렵겠지만, 제가 이론 수업을 보강해서 간단한 필드 마법부터 제작에 들어가도록 할 겁니다. 뭐어, 실전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던전도 돌고 하겠지만, 주된 업무는 여기에서 하게 될 것 같네요. 내일부터 10시까지 마탑으로 출근하셔서 4층에 올라오시면 되겠고요.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연봉은 지금의 3배로 올려 드리겠습니다."
"와……"
"세, 세 배면 얼마야?"
길드에 취업하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거의 5년간은 죽도록 굴려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쪽은 주 업무가 사냥이 아닌 마법 제작이고, 굳이 몬스터를 잡지 않더라도 탑 안에서 능력치를 올리고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거나 숙달할 수 있다.
그러면서 연봉은 일반 공인 5급 헌터의 몇 배를 챙겨간다. 내가 생각해도 조건 하난 좋다.
"이 모든 대우를 누리시면서 여러분이 주의하실 최우선 사항은 바로 보안입니다."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타 사항은 정서진이라는 친구가 이야기해 줄 거예요. 서진이든 보라든 저를 포함해서 다들 나이는 많지 않지만, 한 층의 관리자고 여러분의 선배뻘 되는 사람들이니까 대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야 물론이죠!"
이번 4층팀 사람들은 다들 워낙에 성격이 좋아서, 내부 불화 같은 부분은 전혀 우려스럽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려가죠."
"네!"
우리가 다시 1층으로 내려오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비의 테이블을 하나로 붙이고 그 위에 각종파티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맥주, 와인은 물론이고 떡볶이 같은 분식과 은솔이 좋아하는 과자들까지 있었다.
"어서 와서 앉아요!"
진보라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의 마탑 출입 기념, 그리고 모두의 5급 기념 축하 파티에요!"
"와아아!"
"감동입니다!"
다들 활짝 웃으며 테이블로 뛰어갔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나는 밀려나듯 상석에 앉게 됐다. 진보라가 얼른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마탑주님! 먼저 한 말씀 해주셔야죠!"
"흠흠. 그럴까."
내가 몸을 일으켜 잔을 들었다. 4층팀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를 기다렸다.
"다들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죠? 그렇게 느꼈다면 정상입니다. 저도 제가 빡세게 굴린 거 인정해요."
"우우우!"
4층 멤버들이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그래도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이 자리에 함께 있게 되어 너무 고맙고, 행복합니다."
나대용이 '스승님 저희가 더 고맙습니다!' 를 외치다가 눈치 없이 굴지 말라며 차도연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앞으로는 꽃길만 걸을……아, 이건 아니구나. 앞으로는 몇 배로 더 힘들겠지만요."
다들 장난이려니 웃어넘기고 있었지만, 먼저 겪은 진보라와 정서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적어도 이제 비관, 열등감, 자기혐오에서 빠져나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들 두 달 전의 자신이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이제 떳떳해지세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펼치고, 세상을 마주 바라보며 관조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을 비전투계라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잔을 들었다.
"건배하죠. 새로운 마탑 식구들을!"
"위하여!"
잔이 쨍!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튀어나온다. 다들 그간의 피로를 잊고 열렬히 현재를 즐겼다.
-띠로링.
나도 술을 마시고 있는데 메시지 알림음이 왔다. 옆자리의 나대용이 슬쩍 내 스마트폰을 보며 물었다.
"음? 누굽니까??"
"협회장님이네."
"네에에에에에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에서 전화 받고 올 테니까 놀고 있어요."
"우오오오! 헌터 협회장과 개인 통화라니! 스승님은 대체……!"
"대용 씨!"
나는 얼른 마법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으로 올라와서 전화를 받았다.
-어, 유신이냐?
"넵. 김유신입니다. 이 밤중에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저 협회장이 부탁이라니. 지금까지 도움을 줬으면 줬지 부탁을 한 적은 없었는데.
-연이에 대한 일이야.
그녀가 진지한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너 출장 한번 갈 생각 없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