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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23화 (123/337)

나 혼자만 마탑주 123화

드디어 제5층 시련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혐오스러운 시련이다. 난데 없이 플라이 마법을 쓰라니!]

안톤의 일기장에 나와 있는 대로, 5층은 마법사의 비행 능력을 평가하는 시련이었다.

밑을 내려다보면 아래는 아무것도 없이 까마득하다. 지면이 보이지 않는다. 저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 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중간중간에는 두 다리를 딛고 쉴수 있는 땅이 가끔 있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빼빼로 모양.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은 가늘고 긴 저 땅이 유일한 휴식 구간이다. 저걸 보면 아래가 얼마나 깊은지 대략적으로나마 추측할 수 있다.

이 시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왔다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4공정 플라이 마법을 알아도 난이도가 워낙 높아서 힘들었을 텐데, 시련에서 처음 플라이를 익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지옥이 따로 없었을 거라 장담한다.

-탑주. 다시 한번 '캔슬레이션'이 옵니다.

"오케이."

한 순간, 시련 속의 세계가 백색으로 점멸된다. 그러자 필드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이 해제되어 마나 상태로 돌아간다.

당연히 골렘 윙으로 비행하던 나도 날개를 잃고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마법진이 펼쳐지며 마나 에로우들이 날아든다.

본래라면 이건 상당히 어렵다. 플라이 마법이 기습적으로 풀리는 상황, 엄청난 속도로 낙하하는 도중에 일체의 흔들림 없이 플라이 마법을 재시전하고, 날아오는 모든 투사체를 피해야만 한다.

악독한 난이도다. 시련 설계자의 얼굴 좀 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근데 난 왜 이렇게 편안하냐?'

나는 그저, 마법을 영창할 필요도 없이 어깨에 달린 장비에 전원 버튼만 누르면 된다.

-윙 골렘 재부팅 완료.

내 등 뒤로 직관적인 형태의 마력날개가 솟구친다. 날개에 청색 원이 일어나더니 빠르게 위로 솟구쳐 오른다. 이제 데바의 눈으로 포착된 마나 에로우들을 피하는 건 일도 아니다.

[예측 회피 특성이 Lv.6에 도달했습니다.]

[의지가 3 올랐습니다.]

[순발이 1 올랐습니다.]

역시 시련은 시련. 특성과 능력치는 잘 올라준다.

-탑주.'빨간 선'이 옵니다.

007시리즈 같은 스파이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바로 그 레이저 비슷한 게 이 필드 전체에서 펼쳐져 다가온다.

뭐, 이 정도도 가뿐하다. 나는 윙골렘을 조작해 정지 비행 상태로 바꾼 다음, 허리를 젖히고 고개를 꺾으며 피해냈다.

-탑주. 투사체 3, 850개가 날아옵니다.

이건 이미 '클래식 게이트' 재앙에서 예습한 내용이다. 데바의 눈으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고속비행으로 피해낸다.

-캔슬레이션입니다!

아까와 똑같이, 날개가 사라지면 조금 기다렸다가 전원 버튼을 누른다.

-닿으면 전기 충격이 있는 마법진 입니다.

투사체의 업그레이드 버전. 물론 안 닿으면 그만이다.

-5초 후에 중력이 역전됩니다. 이후 날아오는 마나 에로우에 대비를.

섞어봐야 문제없다.

[비행 특성이 Lv.5에 도달했습니다.]

[순발이 15층가했습니다.]

[마력이 5층가했습니다.]

[집중이 3층가했습니다.]

"에아."

-네. 탑주.

"너무 편해."

-그래 보이십니다.

"후후, 내가 성장한 걸까? 시련이 싱거운 걸까?"

에아의 한심한 시선이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거 시련이잖아? 다른 시련들에 비해 난이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다.

물론 이 시련을 제작한 에렌델 측마법사들은 헌터 디바이스와 골렘공방의 기술이 융합한 '윙 골렘'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벌써 보스전이네."

시련의 끝은 커다란 암벽으로 막혀 있었고 그 중앙에 툭 튀어나온 지면이 있다. 저곳에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포탈이 보인다.

"아, 재밌었다."

나는 바닥에 안착하여 윙 골렘을 작동을 중지했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이동 마법진을 밟아보았다.

[시련의 마지막 보스룸으로 이동합니다.]

[보스룸을 클리어하면 마탑 제5층 '차원관'이 개방됩니다.]

[한번 보스룸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습니다.]

[보스룸에 들어가시겠습니까?]

나는 잠깐 마법진에서 발을 뗐다.

"자, 에아. 객관적으로 말해줘."

-예, 탑주.

"굳이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 번 더 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데이터 분석 완료. 지금 탑주의 페이스로 보면 다시 돌아도 능력치가 성장할 요소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네.

나는 마법진을 밟고 말했다.

"도전한다."

내 몸이 흔들리며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 * *

눈을 뜨자, 새로운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실내였다. 바닥과 천장이 있고 좌우 사방이 벽이다. 시련 내내 아찔한 허공 위에서만 싸워서 그런지 안도감이 든 나는 괜히 바닥을 힘을 주어 밟아보았다.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꽃과 풀들이 자라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아름답다. 커다란 동굴 안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성역 같은 분위기.

하지만 확실히 인공적인 요소도 있다. 벽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빼곡한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에렌델어는 아니고……아, 하임어구나.'

에렌델에서 고위 귀족들이 평민들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썼다는 하임어. 익숙한 언어가 아니라 번역에 소비되는 시간으로 조금 딜레이가 생기지만,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이거…….

-마법진이군요.

마법진이 확실했다. 그것도 희귀하다는 전격 계열의 2공정 마법. 마법의 정석에도 없는 거다.

내가 보고 있는 벽면뿐만이 아니라, 이 성소의 모든 벽과 천장이 각기 다른 마법진에 대한 설명으로 빼곡하다.

"……와, 이건 진짜 미쳤는데?"

벽면을 살필 때마다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마법사가 여기 오면 누구든지 탐구심이 불타오를 수밖에 없으리라.

손바닥으로 벽면을 살짝 털어내고 해석해 보니, 평범한 공용 수식을 쓴 게 아니라 독자적인 스타일로 구성해낸 마법진이다.

이 마법을 실전에서 쓸 생각이 없더라도, 그냥 보면서 새로운 수식에 대해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학술적가치는 충분하다. 내가 마법진에 푹빠져 있는 그때.

쿠구구구구구구구!

성역의 중간에 있는 거대한 동상이 묵은 흙과 식물 뿌리를 떨어뜨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러운 눈을 치워라, 도굴꾼.]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차며 그것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보스전이 시작된 듯하다.

[선조들의 소중한 유산을 훔치게 두지 않겠다!]

심지어 말을 하는 보스 몬스터라니.

동상이 자리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무척 컸다. 어림잡아 15M 높이. 녀석이 점프하면 성소의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했다. 손에는 글레이브(Glave),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언월도 같은 무기를 손에 쥐었다.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건안다. 그래도 혹시 대화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잠깐만요! 저는 훔치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저 당신 선조들이 남긴이 훌륭한 유산을 감상하기 위해서……."

[헛소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성소 전체를 울렸다.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 '눈'을 가지고 유산을 읽는 것이, 도굴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마탑주의 후보!]

오호라.

4층에서 만난 가상의 안톤처럼, 이 보스 또한 어느 정도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라져라!]

한 줄의 번뜩이는 푸른 선이, 내 시야로 들이닥친다. 하나의 선이 커지면서 거대한 세계로 변했고, 그것에 집어 삼켜지기 전에 오른발에 심어둔 데바스타를 발동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원월도가 대기를 가르며 휘둘러지고,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위로 피한 나에게까지 밀려든다.

'어후, 한 대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네.'

언월도를 휘두르는 중인 수호병의 동작이 일순, 수정된다. 휘두르기가 찌르기 동작으로 전환되자 나는 기겁하며 천장을 딛고 몸을 날렸다.

내가 있던 자리에 언월도의 뭉툭한 끝이 처박힌다.

[생쥐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나는 윙 골렘을 작동시키며 벽에 다리를 붙였다. 긴장감이 달아오르며 목구멍이 침을 타고 흘러간다.

쉽지 않다. 보스전은 한 명이 죽을 때까지 빠져나갈 수 없다. 놈도 날 살려둘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탑주! 옵니다!

다시 한번 청색의 선이 세계를 휘감으며 내게로 날아든다.

* * *

김유신이 시련에 들어간 24시간후.

세 사람은 여전히 계단 앞에서 뒹굴뒹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진보라는 던전 출장이라 아카데미에 갈 일이 없었다. 더미 공장에 들렸다가 오늘 할당량 포션을 조제하고 계단으로 돌아왔다.

정서진은 최근 은솔이 다니는 플레이어 교육센터에 그녀를 데려다준 다음, 바로 계단으로 돌아와서 일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은솔을 데리러 갔다가 다시 마탑에 돌아왔을 때도 유신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진보라 씨. 눈이라도 좀 붙이면서 기다리시죠."

보다 못한 정서진이 말했다.

"우리가 무슨 농성이나 단식투쟁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무사하실 겁니다."

그녀는 유신이 들어간 검은 포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배님이 시련에 들어가면, 보통 몇 시간 뒤에는 돌아왔잖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거죠? 에아 씨도 응답이 없고……."

"탑주님이 바로 보스룸에 도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보스전이라고 해도 24시간을 넘기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정서진도 이번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진보라는 고개를 푹 숙였고 은솔이 위로해 주듯꼭 안아주었다.

"언니야, 힘내."

"응, 솔아."

정서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신이 이렇게 늦은 적이 없었다. 2층 시련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보스전에 넘어갔다고 들었다. 3층도 4층도 여러 번의 시도를 거쳐, 가장 완벽한 상태에서 보스전에 도전했다. 그게 보통의 유신이다.

보스전 이전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하지만 유신에게 문제가 생겼으면 에아가 돌아와서 이야기를 해주는 게 맞다. 에아가 일체 응답이 없다는 건 아직도 유신을 시련 서포트하느라 바쁘다는 뜻.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에아의 응답이 없다는 건 유신이 무사하다는 말이니 안도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문득 생각나는 또 하나의 불안은, 현 마탑주가 죽으면 현 호문쿨루스도 자동으로 폐기된다는 것이다. 응답이 없다는 건 설마…….

쿵!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진보라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굳건했던 정서진마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진보라는 점점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마치 자신만 민감한 게 아니라, 진짜로 위험한 상황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아,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요! 놀랐잖아요!"

"미안합니다."

고개를 든 정서진이 평소처럼 안경을 추켜올리며 노트북을 보았지만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언니야."

어느새 진보라의 품에 안겨있던 은솔은 눈물샘이 터져 있었다. 불안함은 빠르게 전염되어 갔다.

"오빠야 돌아오는 거지? 올 수 있는 거지?"

"응, 응. 꼭 돌아오실 거야."

진보라는 그렇게 대답하며 하염없이 포탈을 바라보았다.

* * *

그렇게 모두가 유신의 귀환을 손꼽아 걱정하고 있는 그때.

"하하하하하!"

유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26시간째 공복에, 한숨도 자지 않고, 계속 시련 보스전이 이어지고 있다. 이 보스전은 좀 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는.

"새로운 화염계 마법 GET!"

그냥 전부 유신의 욕심 때문이었다.

'에아! 이 마법 수식 다 기록했지?'

-네. 탑주. 그런데 슬슬 돌아가시는 게…….

'다음은 저거야! 가속 마법진이라니 세상에!'

욕심 때문에 유신의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네놈! 나를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수호병이 절규하며 언월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유신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공격을 피한 다음 다시 천장에 찰싹 붙어 마법진을 홅었다.

유신에게 완전히 공략당해버린 수호병은 어느새 병풍 보스로 전락 당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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