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마탑주-112화 (112/337)

나 혼자만 마탑주 112화

"여기구나."

스마트폰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걷던 나는, '목적지 도착' 알림을 닫고는 걸음을 멈췄다. 한눈에 봐도 크고 으리으리한 저택이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긴장되네.'

넥타이를 가볍게 고쳐 맨 나는 대문으로 다가가서 호출벨을 눌러 보았다.

-네. 누구세요?

중년 여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저는 김유신이라고 하는데요."

-네. 김유신 헌터님! 어서 들어오세요.

덜컹!

대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가는 길마다 딸칵딸칵 소리가 나며 조명이 켜진다.

계단을 모두 올라오자 탁 트인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동화속의 요정 왕국일까, 숲속의 오솔길일까. 희고 노란 꽃들이 가득했고 새들이 날아와 나무에서 쉬고 있다.

작은 연못도 눈에 띈다. 하얀 벽에는 각종 담쟁이 넝쿨이 둘려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올라와 보니 저택도 한 채가 아니다. 중앙에 커다란 저택 하나, 좌우에도 하나씩. 뒤쪽에도 별장 같은게 있다. 도합 4채다.

'협회장은 어디 있는 거야? 말이라도 좀 해주지.'

수수께끼 내는 것도 아니고. 뭐, 이것도 여흥이라면 여흥이리라.

나는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불이 켜져 있는 건 중앙 건물. 마당에 발자국도 흐릿하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역시 중앙 건물이…… 아닌가? 오른쪽 건물에도 불이 켜져 있다. 그렇다면 두 곳의 차이는…….

-중앙 건물에 거대한 마력 반응감지. 홍율은 중앙 건물에 있습니다, 탑주.

"고, 고마워 에아."

세상이 너무 편리해도 좀 그렇다니까. 나는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중앙 건물의 문을 노크했다.

딸칵.

문이 열리고 가정부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목소리가 무척 작았다. 안에서는 조용히 해야 하나 보다. 나도 조그맣게 감사하다고 대답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원은 시작에 불과했다. 저택의 규모부터가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있었다.

소파도, 창문도, 벽난로도, 모두 크기가 크다. 마루에는 먼지 하나 없고 하얀 대리석과 어두운 원목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공간은 알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괜히 바닥을 밟는 것도 조심하게 된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왔다.

"이쪽이 홍연 아가씨의 방입니다."

"그래요? 인사나 하고 가야겠네."

나는 그녀의 방문 앞에 서서 똑똑 노크를 했다. 방 너머로 "네에."하는 여자애 목소리가 들린다.

"과일 아직 덜 먹었어요. 빈 접시는 제가 가져다 놓을게요."

"들어가도 되냐?"

우뚝. 하고 목소리가 멈췄다.

"누, 누, 누, 누구세요?"

잔뜩 당황한 홍연의 음성이 들렸다.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튀어나와서 놀란 모양이다.

"나야. 김유신."

"……."

잠시 정적. 그리고.

우당탕탕탕탕!

쿠당탕탕!

쨍그랑! 와장창창창!

……대체 방안에서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뭐, 뭐, 뭐야아! 당신이 왜 우리 집에?!"

역시 놀라게 하는 보람이 있는 녀석이다. 나는 키득거리며 문고리를 붙잡았다.

"들어간다."

"아아아악! 오, 오면 안돼요! 들어오지 마아!"

혹시나 해서 에아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벗고 있는 거 아니지?'

-네. 탑주.

'그럼 들어가야지.'

달칵!

나는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파자마 차림의 빨간 머리 아가씨가 시뻘게진 얼굴로 바둥거리다가 쿠션베개로 샥 몸을 가렸다.

"안녕!"

"우으으! 들어오지 말라니까요!"

"그냥 인사 좀 하러 온 건데, 온종일 문밖에 세워둘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돌려 정말로 궁금했던 홍연의 방을 살펴보았다.

'이건…'

방은 자신만의 개인 공간이다.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영역으로서 인간의 다양한 면을 볼수 있다. 그 사람의 취미, 성격, 좋아하는 연예인 등등 많은 것들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건 뭐 호텔 방에 온 기분이네.'

홍연의 방은 그런 개인적 공간이라는 느낌의 뭔가가 적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생활용품과 가구, 심지어 뽑다 남은 물티슈의 모습까지 이상적으로 깔끔했다. 아니, 뭔가 개인적인 색깔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 사적인 느낌이라고 한다면 저 분홍색 파자마와 그녀가 안고 있는 롱 쿠션 배게 정도일까.

창가 옆에 커다란 장롱이 몇 개쯤있는데 저걸 열어보면 뭔가 개인적인 게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진짜 실례되는 부분이니까 건드려선 안 될 것 같다.

나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아니, 근데 자기들이 초대했으면서 왜 이렇게 격한 반응이지? 시뻘게진 얼굴에 어깨를 파르르 떠는 모습이 좀 이상했다.

"앉아도 되지?"

그렇게 말하며 침대 끝에 살짝 앉자, 홍연이 파바박 뒤로 물러나 벽에 등을 딱 붙이고 베개를 품에 안으며 잔뜩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왜 그래?"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그녀가 꽥 소리 질렀다.

"왜 갑자기 선배가 우리 집에 온거냐구요!"

"난 오면 안돼?"

"아니! 그,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방문 전에 연락을 좀 취하거나 했으면 저도 준비할 시간이 있고!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거고 뭐 그렇잖아요!"

아하.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알겠네.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 협회장님이 부르셔서 온 건데?"

그녀의 헤이즐넛 빛깔의 눈동자가 확 커진다.

"어, 언니가?"

"응. 집에 밥이나 한 끼 먹으러 오라길래. 당연히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지."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고는.

"언니이이이이이이!"

쩌렁쩌렁!

집 전체가 뒤흔들리는 외침에 나는 귀를 틀어막았다.

와, 무슨 목소리가 이렇게 크냐.

어딘가 차분했던 집 분위기가 단번에 떠들썩하게 바뀌었다.

"아으, 진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더 할 수 없이 달아올랐다.

"나가요! 나가!"

"어어?"

그녀가 내 등을 떠밀며 소리쳤다.

"좀 이따 밥 먹을 때 봐요! 빨리 나가!"

"야, 야, 잠깐만!"

결국, 나는 힘에 밀려 방 밖으로 쫓겨났다. 곧바로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급히 문이 닫혔다.

"아가씨와 인사는 다 하셨는지요?"

공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했다.

"……네. 뭐, 그런 것 같네요."

"그럼 이제 협회장님을 뵈러 가시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3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스륵. 스륵.

계단을 올라가는 도중 위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올려다보니 누군가 식탁 위에 앉아 있었다.

'협회장인가?'

나는 계단을 모두 올라와 그녀 앞에 섰다. 협회장 홍율은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직 덜 둘린 붕대에는 피가 시뻘겋게 묻어 있었다.

부상 상태가 심해 보인다.

"어, 유신이 왔냐? 아무데나 적당히 앉아."

가정부 아주머니는 아래층으로 물러나고, 나 혼자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몸에 붕대를 두르느라 상체는 거의 헐벗은 모습이었으니까.

대신 아직 두르지 않은 붕대 끝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피가 진득하게 말라붙어 있는 모습이, 그간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쓰던 걸로 감으시는 거예요? 새걸로 하시지."

"아, 이거? 그냥 붕대가 아니라 엄청 비싼 회복 아이템이야. 이런 핏물 따윈 금방 사라져."

그녀의 말대로, 붕대에 맺혀 있던 피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방금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이번 해외 파견. 치열했던 모양이네요."

협회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9랭크 던전이었으니까. 많이 빡셌지."

9랭크 던전.

세계에 몇 명 없는 공인 1급들이 공략해야 하는 지구 최악의 던전.

이게 그렇게 큰 화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이번 '클래식 게이트'와 겹친 부분도 있고, 무엇보다 아프리카의 섬나라에 출현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놔두면 나라 하나가 사라지는 거잖아?"

협회장이 가슴에 붕대를 모두 감고는 팔로 옮겨가며 말했다.

"그러니까 갔어. 큰 지원도 없이 힘든 싸움이었지만 어떻게든 됐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심한 부상을 안고 계신데."

그녀가 멈칫하더니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죠. 걱정이 안 되게 생겼어요?"

진심이다. 당신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 언젠가 닥칠 11랭크 재앙 네메시스. 적어도 그때까지 당신 같은 거대 전력이 온전히 남아 있어야 승부가 된다.

"세대 교체해야지. 세대교체."

그녀가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하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좀 늦었어. 지금이라도 젊은 애들이 팍팍 올라와 줘야해. 내가 아카데미에 집착하는 것도 그런 이유고."

"……아."

"너희 같은 애들이 빨리 커야 나도 안심하고 은퇴할 거 아냐. 더 늦기 전에 시집가서 남편한테 이쁨받으면서 살고 싶다고."

네? 지금 뭐라고요?

왜 자꾸 내 머릿속에는 매 맞는 남편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이도 빡세게 굴려 가면서 키우고 있지. 이번 출장에도 같이 데려갔어."

"홍연을 9랭크 던전에요?"

"미쳤냐? 걔는 그, 나라 이름이 뭐더라? 탄자니아던가? 암튼 내가 가는 길목에 있던 나라에 내려줬어. 거긴 7랭크 던전이 열렸거든. 각국의 지원 전력이 9랭크 던전에 쏠려 있어서 그쪽은 무관심이라 위험하긴 했지."

"7랭크 던전이면 공인 3급들이나 가는 곳인데, 그런 위험한 곳에 여동생을 보낸 겁니까?"

"그럼! 명색이 내 동생인데 강하게 키워야지."

그렇게 말하던 홍연이 갑자기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때 네 이름 요긴 하게 잘 써먹었어."

"……네? 저를요?"

"응! 대충 네 영웅담 같은 거 들려줬거든."

그녀가 흠흠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네가 빌빌 기는 동안 우리 유신이는 힐러 연합 수장을 혼자서 잡았댄다! 그 오봉규를! 근데 넌 지금 뭐하고 있니? 그래서 걔 발끝이라도 따라가겠어? 그따위로 해서 그 애가 널 제대로 돌아봐 줄 것 같아? 막이런 식으로 몰아붙였지."

아니 이 사람이…….

"그러니까 그 애 눈에 막 독기가 서리는 거야! 같이 딸려 보낸 후배들 얘기 들어보니까 던전에서 난리가 났댄다! 뭔 공인 4급 신인이 7랭크 던전에서 3급 애들 제치고 하드캐리 했다잖냐! 거기에 또 뭐? 몬스터 무리에 겁먹고 도망치려는 군대앞을 가로막고는 무전기 빼앗아서 일장 연설까지 했다는 거야! 막 감동받은 군인들이 '저렇게 어린 아가씨도 싸우는데 우리가 물러설 수는 없다!' 하면서 다시 돌아와 싸웠다는 거야! 오서, 뭔 드라마 찍는 줄 알았다니까?"

와하하…….

나도 요즈음 다이나믹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홍연 쪽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김유신 효과 대단해. 응? 매너리즘에 빠져서 흐리멍덩하던 애가 그렇게 악착같이 싸우게 되고, 이제는 리더 쉽쪽까지 성장하고 있지! 아, 이번 일로 연이는 공인 3급 됐어."

"그거 잘 됐네요."

그녀는 붕대를 모두 감고는 이곳저곳을 당겨보았다.

"어우, 이건 다 좋은데 너무 가슴이 쪼여."

라고 말하며 가슴에 감은 붕대를 쭉 늘렸다. 다시 상기하는 거지만 그녀는 당연히 붕대 안에 속옷을 입지 않았고 나는 화들짝 놀려며 고개를 돌렸다.

"훗."

협회장은 묘한 미소를 흘리며 식탁에 몸을 기댔다.

아니, 갑자기 분위기가 왜 이래?

"귀엽네. 실은 네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어서 불렀어."

"네?"

자꾸 이상한 망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받아."

그녀가 카드 같은 것을 꺼내내게로 던졌다. 나는 다급히 그것을 받아 보았다.

"이건……"

"아크 비숍이랑 파라오가 너 신경 많이 써주던데?"

그녀가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세계 헌터 연맹 공문으로도 날아왔어. 이번 아르민 발터 사살 작전의 성공은 한국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협조에 마음 깊이 감사한다고."

"……!"

"그리고 그 한국의 협조자는 단 한 명, 공인 4급 김유신. 그래, 네가 이번 아르민 발터 작전의 1등 공로자야."

나는 그녀가 준 공인증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공인 3급 헌터 김유신.]

"승진 축하해. 김유신 3급?"

협회장이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