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05화
촤르르르르륵!
변이가 시작됐다.
몬스터의 껍질이 한윤정의 하얀 피부를 뒤덮어간다. 머리에 난 뿔에 마력이 뭉실거리며 피어오른다.
[큭……! 아으!]
평소의 맑은 목소리가 아닌, 마인의 변질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마르첼로와 메네스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으으으! 아흑! 꺄아아아아아아!]
격렬히 몸부림치던 그녀가 피처럼 붉게 물든 눈을 부라렸다. 보랏빛 마력이 폭발해 주위의 지면을 부수고 휘몰아쳤다.
후우우우우웅!
심상치 않다.
몇 번이고 고통에 몸을 비틀던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춘다. 허리를 숙인 채 미동 없던 그녀가 고개만 삐그덕 돌아가 나를 바라본다.
얼굴까지 완전히 마인이 된 모습으로.
"……."
상체를 일으킨 그녀가 천천히 오른팔을 내 쪽으로 들어 올린다.
"이봐, 피해!"
"김유신 헌터!"
두 사람이 달려들려는 순간.
[됐죠? 내가 된다고 했잖아요.]
한윤정은 오른손으로 V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
두 사람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한 윤정을 보았다. 나는 픽 웃으며 이마를 덮었다.
역시 한윤정이다.
"……이럴 수가. 정말로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까?"
[네, 물론이죠. 이제 이 재앙에 대해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팔을 좌우로 벌리며 마력을 일으켰다. 성벽을 올라오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재앙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어요.]
메네스가 실소를 흘렸다.
"미쳤군."
마르첼로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은 정말, 한없이 넓군요."
한윤정은 다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본 재앙에서 지구로 향하는 62개의 게이트 확인. 전부 닫을게요.]
한윤정의 마력이 다리를 타고 흘러나가 바닥에 닿는다.
흰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재앙의 지면에 그녀의 마력이 확 하고 퍼져나갔다. 그것은 이 세계를 뒤덮을 기세로 빠르게 빠르게 뻗어 나갔다.
웅성웅성.
이곳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움직임이 굳어진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을 멈추고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한윤정에게 집중하고 있다.
문득.
소름이 끼쳤다.
-탑주!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에서 클래식 게이트의 크기가 줄어드는 현상 관측! 방금 중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1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건, 경이롭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천대받던 비전투계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그 어떤 헌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다.
정말로, 운명에 보란 듯이 한 방먹이고 있지 않은가.
-탑주! 현재 12개국에서 게이트 축소 현상 동시 발생! 몬스터들의 공격성도 크게 떨어졌습니다!
좋다.
이대로 조금만 더.
"……세상에."
"신이시여."
"마인이 정말로 우리 편인…… 커헉!"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캬아아아아아악!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다. 그녀의 명령에 멈춰있던 몬스터들의 눈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달려들어 묘지기 한 명의 가슴을 꿰뚫었다.
-캬륵!
-크르르르!
마르첼로가 무전기를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멈춰있던 몬스터들의 다시 공세를 감행! 공격성이 극심해졌습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때 머릿속에서 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이트를 닫는데 집중하느라,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막는 그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고 추측합니다.
그럴 확률이 가장 높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위기를 느낀 재앙이 그녀를 '주인'으로 인식하지 않고 '배신자'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걸까?
"막아! 막아라!"
"어떻게든 모래 성벽을 사수해라!"
난투가 벌어졌다.
모래 성벽 아래는 새까만 것들이 몸으로 산을 쌓아 올릴 정도로 많았다. 메네스는 직접 성벽의 모래를 움직여 놈들이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탑주! 재앙에 퍼져 있던 모든 몬스터들이 한윤정이 있는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운명을 상대하는 한윤정의 반격에, 이현상이 계속해서 터져 나온다.
그냥 공격성이 강화된 것뿐만 아니라 여기로 집결한다고?
-캬르르르륵!
-끼이이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벽을 뛰어넘는 몬스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비행 몬스터들 또한 바로 성벽을 넘어와 한윤정을 직접 노렸다.
"전술을 바꾸겠습니다!"
마르첼로는 재빨리 병력 배치에 변화를 주었다. 전력을 성벽팀과 호위팀으로 나눈다.
성벽팀은 계속 해왔던 대로 성벽을 지키는 데에만 집중하고, 호위팀은 공중 몬스터나 성벽을 뛰어넘어 한윤정을 공격하는 몬스터들을 맡았다.
"죄송합니다! 세 마리 흘렸습니다!"
"호위팀 움직여!"
몬스터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집요하게 한윤정을 노렸다. 나는 물론이고, 마르첼로와 메네스 또한 온몸에 피 칠갑을 하며 싸웠다.
"전면이 뚫린다!"
"8시에 부상자 발생! 지원이 필요합니다!"
"성기사 3명 이동!"
위기가 닥치자 이제는 성기사단 묘지기 할 것 없이 모두가 등을 맞대고 부둥키며 싸웠다.
나 또한 연신 파이어 캐논을 발사해 지상과 하늘의 몬스터들을 동시에 맞춰 떨어뜨리고 있었다.
"질긴 놈들!"
물론 이 대규모 전투에서 가장 활약하는 건 메네스였다. 과연 파라오는 파라오.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허공에서 올가미 형태의 모래가 나타나 열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의 목을 동시에 낚아채 조였다.
하늘로 올라간 몬스터들은 올가미를 부여잡고 바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빠르고 신속한 처리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파라오! 저기 큰놈이 옵니다!"
"알고 있다!"
메네스가 팔을 뻗자 허공에서 바로 만들어진 모래 밧줄이 거인 몬스터의 몸을 꽉 조였다.
메네스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엄청난 압력에 부르르 떨리던 몬스터의 몸이 밧줄에 짓눌려 들어가 살점이 찢어지며 폭발했다.
검은 몬스터의 몸에서 시뻘건 피와 장기가 쏟아져 내린다. 메네스가 숨을 몰아쉬며 팔을 내리는 순간.
푸욱!
마르첼로의 단검이 그녀의 등을 찔렀다.
"……크!"
단검을 쥔 마르첼로의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메네스가 감각적으로 모래를 일으켜 단검 손잡이를 붙잡은 것이다. 단검은 3분의 1이 박힌 지점에서 멈춰섰다.
메네스가 진노하여 돌아보았다.
"네놈이 감히이이이!"
그녀가 손바닥을 펼쳤다. 마르첼로의 목에 모래 올가미가 만들어져 그의 목을 콱 조였다.
"크윽!"
마르첼로가 한 손을 올가미에 넣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단검을 붙잡은 손은 놓치지 않았다.
"죽……!"
검은빛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앞으로 도약한 나는 신속히 몸통을 회전시키며 오른쪽 다리를 뻗었다. 신발 밑창이 무방비 상태인 메네스의 얼굴에 닿았다.
<데바스타>
투콰아악!
메네스의 몸이 아래로 행사되는 출력에 의해 그대로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지금입니다!"
내가 소리쳤다.
모래 올가미가 흩어지며 자유로워진 마르첼로가 이를 악물고 단검에 힘을 쏟아부었다.
마침내 단검의 모든 날이 메네스의 몸에 깊이 파고들었다.
* * *
파라오 메네스가 아르민 발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최근의 일이었다.
나는 상태창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상태창을 본다고 이 사람이 아르민 발터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의심 가는 점이 있었다.
특성이 달랐다.
[감각증폭 Lv3]
[탐욕의 연쇄 Lv1]
[집착 Lv1]
카페에서 대면했을 때, 메네스는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개인 특성을 보유한 채였다.
그것도 개인의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 생기는 종류의 특성들.
갑자기 사람의 성격이 확 바뀌지 않는 이상, 탐욕이니 집착이니 하는 이런 성향적 특성들은 단기간에 획득하기 힘들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던 나는 처음에 계획했던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카페에서의 회담을 끝나고 마르첼로만 몰래 개인적으로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르첼로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뭔가 깨달은 듯 아르민 발터의 행동과 대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기억엔 문제가 없지만, 확실히 디테일이 떨어지는군요. 파라오는 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벌레, 벌레. 그 소릴 입에 달고 살았죠.'
마르첼로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게 된 듯했다.
하지만 발터는 이제 묘지기들을 이끄는 파라오다. 성기사단과 전력은 비등비등하다.
도움을 구하기엔 한국 측 전력은 재앙 방어때문에 정신이 없고, 바티칸에서 증원을 요청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다른 묘지기들을 설득해 '파라오가 아르민 발터'라고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이집트 국민들에게 파라오는 일말의 의심도 허락되지 않는,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 이들이 난적의 말을 믿고 자신들의 신을 공격하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결국 지금 있는 성기사단 전력만으로 어떻게든 해야 했다.
'우선, 무슨 핑계를 대서든 아르민 발터와 묘지기들을 떨어뜨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윤정의 계획을 메인으로 삼아서 직접 재앙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기 쉬운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한윤정이 능력을 사용할 때 몇 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당초 계획대로 치열한 난전이 벌어졌다.
나와 마르첼로는 몬스터들과 싸우며 계속 발터를 습격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발터가 큰 기술을 사용할때, 마르첼로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아르민 발터 사냥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유물인 '혼령비수'로 놈을 찔렀다.
이것 또한 '감각 증폭' 특성을 가진 발터가 아슬아슬하게 막아냈지만 기다리고 있던 내가 바로 지원했다.
결국, 마르첼로가 혼령비수로 놈을 완전히 찌르는데 성공했다.
"끄극! 크허어억!"
그리고 지금 메네스, 아니 아르민 발터는 이 상태.
침을 질질 흘리며 고통스럽게 몸을 쥐어뜯고 있다. 유물 '혼령비수'는 무형의 적을 찌르는 아이템이다.
손잡이를 붙잡고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소용없다. 저 무기는 단순히 몸에 박혔다는 개념이 아니기에 힘으로 빼는 건 불가능하다.
"크으으아아아아아악!"
발터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손을 휘두르자, 맹렬한 모래폭풍이 몰아쳐 우리를 뒤로 밀어냈다.
역시 파라오의 힘은 까다롭다. 엄청난 풍압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우리가 밀려난 사이, 놈이 한윤정에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게이트를 닫느라 눈을 감고 집중하는 중이었다.
"파, 파라오가 습격당했다!"
"놈들이 배신을……! 욱!"
마르첼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신성력을 일으켜 순식간에 목격자들을 기절시킨 것이다. 다행히 난전 상황이라 다른 묘지기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데바의 눈을 부릅뜨고 모래폭풍 내부를 살폈다.
"크아아아아아!"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달려간 아르민 발터가 무방비 상태인 한윤정의 머리를 향해 팔을 뻗는다.
터업!
발터의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다. 그때처럼, 그녀의 영혼이 빨려들어가는 효과가 생겼다.
'윤정아. 이거 하나만 기억해.'
내 지침이 언제나 그렇듯, 나는 한윤정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대신 단 한 가지를 주문했다.
'만약 우리가 막지 못해서 아르민 발터가 네게 접근하면, 틀림없이 능력을 걸려고 할 거야. 그때는 부정하지 말고 그저 받아들여.'
'뭐?'
'그냥 그렇게만 알아둬.'
화아아악!
한윤정의 영혼이 말릴 새도 없이 파라오 메네스의 몸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텅 빈 한윤정의 몸으로 아르민 발터의 영혼이 이동했고 두 사람이 동시에 쓰러졌다.
'지금!'
나는 데바스타를 사용해 모래폭풍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힘없이 늘어진 메네스의 허리를 껴안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후, 모래폭풍이 걷혔다.
바닥에 퍼질러 누워 있던 한윤정이 눈을 번쩍 떴다.
[…흐. 흐흐흐흐! 흐흐흐흐흐!]
한윤정. 아니, 아르민 발터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때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놈이 뭐라고 지껄이던 나는 메네스의 맥을 짚었다. 정신은 잃었지만, 다행히 아직 숨은 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르민 발터를 돌아보았다.
'에아. 상황은?'
-62개의 게이트 중 59개가 닫혔습니다. 남은 건 탑주가 통과한 군산게이트와 일본 나고야, 인도 뉴델리에 각각 하나씩 남았습니다.
충분하다.
이 정도로도 기적적인 성과. 한윤정은 충분히 잘 해냈다.
[고맙구나, 머저리들아!]
아르민 발터가 기쁨에 부르짖었다.
[십수 년의 방황 끝에, 비로소 나는 100% 안정률을 가진 최고의 그룻을 찾았다! 이제 번거롭게 다른 몸으로 옮겨 다닐 필요도 없어!]
"그러네."
나는 오른팔을 뻗어 그에게 겨누었다.
"더 이상 옮겨 다닐 필요 없지."
내 마력에 반응하여, 그녀의 몸에 새겨진 마법진들이 일제히 빛을 내뿜는다.
[…… 무슨!]
나는 가장 친했던 내 친구의 몸에 폭탄을 박아넣었다.
무려 4공정의 익스플로젼 마법진 다섯 장.
"재앙과 함께 사라져라. 살인마."
나는 그대로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