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104화
아르민 발터의 현재 몸이 마르첼로의 아버지라니.
이건 나도 처음 들어본 이야기다.
나와 한윤정이 충격에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마르첼로는 평이한 어조로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르첼로의 아버지는 UN 소속의 공인 헌터였다. 직업 때문에 항상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휴가를 얻으면 몇 주 정도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휴가를 얻어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영국에서 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체포했는데, 포박당해 끌려가던 그는 자신을 보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찾았다, 그릇.'
이 죄수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섬뜩한 눈빛이 좀 처럼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의 마르첼로는 이 사건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휴가가 끝난 아버지는 현장에 복귀하여 아프리카에서 터진 고위급 던전에 들어가게 됐다.
마르첼로와 가족들은 그의 무사귀환을 간절히 기도했다.
가족들의 기도가 닿았을까. 다행히 아버지는 생환율 20%의 던전에서 살아남아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많이 지쳐 보였다. 재앙에서 있었던 일을 덤덤히 이야기하던 그는 넌지시 은퇴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그리고 세상을 한번 돌아보고 싶다며 마르첼로에게 비행기 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마르첼로는 인터넷으로 바로 그날 가장 빠른 비행기 표를 구해다 주었다.
아버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밤, 둘이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르첼로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사랑했다.
그렇게 날이 밝자 아버지는 떠났고, 며칠 뒤 한 무리의 공인 헌터들이 들이닥쳤다.
'아르민 발터 탈옥 건으로 본 가택에 수사를 진행하겠습니다.'
'네? 탈옥? 그런데 왜 우리 집에……'
'당신의 아버지가 현재 가장 큰 용의자입니다.'
수사관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간수의 몸을 빼앗아 탈옥한 아르민 발터가 아프리카 던전까지 들어가서 아버지를 죽이고 몸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마르첼로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그가 내 아버지가 아니라면.
나는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그렇게 웃고 떠들며 즐거운 술자리를 함께한 건가?
그 살인마에게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생각한 건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르첼로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 그 누구도.
'우웨에에에엑!'
마르첼로는 변기를 붙잡고 구토했다.
스스로가 역겨웠다. 이 몸뚱이 전체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속에 든 음식물뿐만 아니라 장기들까지도 쏟아낼 기세로, 그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쑤셔 넣으며 토하고 또 토했다.
"제가 남들을 믿지 못하게 된 건 그때부터 였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던 마르첼로는 덤덤하게 미소 지었다.
"강한 정신적 충격이 트라우마로 남은 거죠. 저는 언제나 타인을 의심하고 삽니다. 제 가족, 친구, 동료, 그 누구든지요. 그렇게 심적인 거리를 두고, 모두를 의심해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인간관계를 이룩하는데 필수적인 뭔가가 결여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폐인처럼 지내던 마르첼로를 일깨운 것은 지독한 복수심이었다.
그는 아르민 발터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아르민 발터는 스피릿 체인지라는 육체 전이 능력을 사용한다.
-아르민 발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기적으로 몸을 교체해야만 한다.
-아르민 발터는 아무나 하고 몸을 바꾸는 것은 아니며, 맞는 몸과 맞지 않는 몸이 있다. 그리고 그가 가장 큰 욕구를 느끼는 몸을 '그릇'이라고 부른다.
-그릇에 대한 탐욕은 어마어마하며, 한번 포착한 그릇은 대상이 세계 어디에 있든 기필코 찾아 내어 손에 넣고 만다.
-'스피릿 체인지' 능력을 사용한 뒤에는 해당 몸에 남아 있는 기억과 생각 일부를 읽어낼 수 있다.
모든 조사를 마친 마르첼로는 복수심을 품고, 바티칸 성당기사단에 들어갔다.
그들 또한 신도들의 죽음으로 발터에게 원한이 있는 세력이었다. 마르첼로는 그곳에서 수 많은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역대 최연소 아크 비숍이 되었다.
"저는 여전히 당신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김유신 헌터. 아니, 그 누구도 신뢰하지 않지요."
그 말을 들은 한윤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릴 믿지 않는다면, 왜 우리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 거죠?"
"의심만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니까요. 미스한.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 김유신 헌터에게 느낀 감정은 의심 말고도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게 뭐죠?"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던 마르첼로가 평소처럼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감입니다."
치직!
-탐색 완료. 포착 몬스터 7기의 안전지대 발견.
-해당 지대에 하강 준비하겠습니다.
다섯 명 정도의 헌터들이 낙하산을 들고 먼저 헬기에서 뛰어내려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제거했다. 안전이 확보되자 열여섯 대의 헬기가 일제히 하강비행했다.
"이쯤이면 괜찮나?"
메네스가 헬기에서 내리며 물었다.
구속이 풀리고 팔을 움직여보던 한 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던전에 들어왔으면 어디든 상관없어요."
"좋다. 그럼 진지를 구축하도록 하지."
메네스가 황금으로 번쩍이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쳤다.
콰르르르르르르르!
하늘에서 모래가 떨어져 차곡차곡모래 벽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봐도 대단하다. 이게 바로 묘지기의 권능.'
이집트의 묘지기들은 이계의 유적인 '대무덤'을 보유하고 있다.
그 유물의 힘을 부여받은 헌터들은 독특한 마나 체계를 획득하게 된다.
이를 '모래의 권능'이라고 부르는데, 헌터들이 마나를 짜내면 그것이 전부 모래로 바뀌게 된다.
마나를 외부로 운용하면 모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마나로 작동하는 대부분의 고유 능력을 잃게 된다.
대신 시전자의 의지대로 굳어졌다 풀어졌다 형태변화가 자유로운 고성능의 모래 병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묘지기들은 모두가 똑같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대무덤의 주인인 '파라오'는 이 능력의 최고 사용자다. 그녀의 힘은 '병기' 정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쿠구구구구구구!
그 예로, 메네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래로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싸는 성벽을 만들어 냈다.
"다시 한번 지침을 설명하겠습니다."
마르첼로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 있는 한윤정 씨를 보호하면서 몬스터들의 공세를 막아낼 겁니다. 만약에, 누구든지 간에 이 성벽으로 다가오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최우선으로 공격하십시오. 우리는 개별 작전을 인정받았으니 한국 헌터들이 굳이 여기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이유는 하나겠죠."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메네스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놈은 우리에게 접근하면서 이런 저런 변명을 지껄일 거다! 지원해 주러 왔다. 혹은 지원을 요청하러 왔다. 다 필요 없어! 성벽으로 다가오는 놈들은 문답무용으로 전부 다 쏴죽여라! 책임은 내가 진다!"
"예!"
마르첼로는 시계를 한번 본 다음 말했다.
"암구호와 보안코드를 한 번 더 체크해 주시길. 준비가 끝났으면 성벽방어에 투입해 주십시오."
"다들 성벽 위로 올라가라!"
헌터들이 성벽 위로 올라가 방어태세를 갖췄다.
-캬아아아아악!
-케르륵!
재앙의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 또한 데바의 눈으로 성벽 너머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활을 꺼내라!"
성벽 위에 올라선 묘지기 전원이 왼팔을 앞으로 뻗는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모래가 스멀스멀 흘러나와 활의 형상으로 굳어진다. 반대편 손에는 화살이 잡힌다.
"장전!"
묘지기들이 활을 시위에 메긴다.
활시위조차 모래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치 탄력이 있는 것처럼 뒤로 당겨진다. 이때 달려오는 몬스터들이 사정거리 내로 들어왔다.
"쏴라!"
모래 화살들이 시위를 떠나 몬스터들에게 날아간다. 화살들은 타깃의 몸을 관통하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몬스터들을 연달아 꿰뚫는다.
"다시 장전!"
화살통은 필요 없다. 묘지기들이 손을 펼치는 곳에 새로운 모래 화살이 생성되어 잡힌다. 그들은 재차능숙한 동작으로 활시위에 메긴다.
"발사!"
화살들이 날아갈 때마다 몬스터 무리가 몇 줄씩 쓸려나간다. 화살 한 발이 최소 7~8기의 몬스터를 제거한다.
그런 데도, 적의 수가 너무 많다.
"놈들이 성벽을 오른다!"
묘지기들 중 몇몇은 뒤로 물러나 계속 활을 쏘고, 몇몇은 활을 거두고 병장기를 만들어 손에 쥐었다.
모래 병장기 또한 상당한 범용성을 보였다. 창은 길어졌고, 검은 불가능한 궤적으로 휘어졌으며, 채찍은 자유자재로 몬스터들을 붙잡아 떨어뜨렸다.
"전방에 브레스!"
"막아라!"
그리고 그들이 든 모래 방패는 신축성 있게 늘어나거나 줄어들며 성벽을 바로 공격하는 원거리 폭격을 받아냈다.
형태 변화 계열에서도 최상위로 손꼽히는 묘지기들의 능력은 어떤 전장에서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물러서지 마라!"
물론 바티칸의 성기사단도 만만치않았다.
이들도 세계 길드답게 이계의 유적인 '공백의 신전'을 보유하고 있다.
신전의 권능을 손에 넣게 되면 일반 마나는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특이한 성질을 띠는 백색의 마나를 일으키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신성력'이라고 부른다.
신성력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같은 신성력 사용자들에는 회복 효과를,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성기사들은 신성력을 몸과 무기에 두르고 싸우며 부상을 입어도 즉시 신성력으로 상처를 회복했다. 유지력과 내구력에 있어서는 그 어떤 동급 헌터들보다 뛰어났다.
이들 중 몇몇은 신성력 전용 포격디바이스를 운용하기도 했다. 포구에서 순백의 섬광이 발사되어 그것에 닿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화력 또한 묘지기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신기한 광경이네.'
성기사단과 묘지기들이 함께 싸우고 있다. 물론 방어를 맡은 구역은 달랐지만, 한자리에서 같은 적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게 세계 길드의 힘이군요. 대무덤과 공백의 신전이라.
'감상이 어때? 에아.'
그녀의 작은 웃음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마탑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입니다.
'……하하.'
-에렌델의 역사를 봐도 신성공국의 성직자와, 서부 변방의 모래술사에 대한 기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마탑과 마법문명에 밀려 단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죠.
역시 에아의 마법부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한윤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어두운 보랏빛 마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윤정아. 할 수 있겠어?"
그녀는 살짝 눈을 떠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조금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거야. 무리다 싶으면 참지 말고 말해."
"……응."
결심을 굳힌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이제 시작할게요."
마르첼로와 메네스가 한윤정을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만약에 그녀가 실패하면, 약속대로 이들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솔직히 가능성이 낮은 도박이다.
인류를 배신하는 인간 따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재앙을 배신하는 마인?
들어본 적도 없다.
한윤정은 지금, 그 누구도 걸은 적 없는 길을 걸으려고 하고 있다.
"후우."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그녀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