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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02화 (102/337)

나 혼자만 마탑주 102화

나는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두 분이 협력하란 소리는 하지도 않을게요. 같은 전장에 서되, 서로 충돌하는 것만 참아주시면 됩니다."

"미안하지만 김유신 헌터. 우리는 공을 두고 다투는 처지입니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반목할 수밖엔……"

그때였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카페 점원들이 우리가 주문한 커피와 음료들을 가져왔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난 것만 같던 살벌한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성기사단원들은 자신이 시킨 음료를 얼른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중에서 아직 어려 보이는 여성 성기사가 행복한 표정으로 쪽쪽 음료를 빨아 마시는 모습이 귀여웠다.

"오! 제가 주문한 것도 왔군요!"

마르첼로도 블루베리 요거트 플랫치노를 가져와 빨대로 휘젓고 있었다. 메네스는 옆에서 입술을 삐쭉 내밀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성기사분들이 빨리 오셔서 먼저 시켰네요. 파라오님도 드시겠습니까?"

그녀는 마지못한 척 다시 메뉴판을 들었다.

"흠흠, 영 대접이 신통치 못하구나! 어서 이 '아이스 피치피치 블러썸 라떼'라는 것을 가져오거라!"

나는 메네스가 휙 던지는 메뉴판을 받아서 이번에는 묘지기들 쪽으로 넘겼다.

"날씨 많이 덥죠? 여러분도 하나씩 드시고 싶은 걸로 시키세요."

"……."

그들은 망설이며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처음엔 망설였을지 몰라도, 다채로운 음료들의 사진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은 일이고 사상도 사상이지만 다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1층을 향해 말했다.

"사장님! 여기 주문 한 번만 더 받아주세요!"

* * *

"그러니까."

텅 빈 유리컵을 아쉬운 듯 바라보던 메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공통 작전을 펼치되 아르민 발터작전의 사망은 '성기사단'의 업적으로 공식발표를 하고, 아르민 발터의 신병은 묘지기가 가진다?"

"네. 제 제의는 그렇습니다."

바티칸에서는 형제들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마에 피의 복수를 원하고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시끄러운 여론을 일시에 잠재워 줄 실질적인 업적. 성기사단이 묘지기를 제치고 아르민 발터를 심판했다는 공적 그 자체다.

그리고 묘지기에서는 실적보다는 '영혼 전이' 연구를 위해서 그의 신병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 말 안 해도 합니다. 피차 아쉬운 점은 있겠죠."

성기사단은 아르민 발터를 바티칸까지 데려와 처형하길 원할 테고, 묘지기들은 아르민 발터를 죽였다는 실적도 자신들이 가지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최소한의 합의 조건입니다. 그동안 욕심부려서 될 일도 안 됐지 않습니까. 이번엔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자는 겁니다."

두 사람은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말이 없었다.

"만약 협력한다고 쳐. 아르민 발터는 어떻게 찾을 거지?"

"저는 아르민 발터가 다음 순서로 정해놓은 '그릇'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릇'이라는 용어까지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아연하게 변했다.

"알려드리는 건 여기까지. 저와 협력하시겠습니까?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이번 한국에서의 기회가 놈을 체포할 마지막 찬스일 수도 있습니다."

벼랑 끝에 올라선 두 리더의 입장을 이용해 딜을 하도록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결국 두 사람은 내 제의에서 좀 더 디테일한 사항까지 주고 받았다.

성기사단의 추가 조건은 '어떤 상황에서든 묘지기가 발터 쟁탈전에서 패배했음을 승복하고 일체의 언론개입을 하지 말 것.' 묘지기의 조건은 '아르민 발터를 죽이지 말고 생포할 것'이었다.

"그런데 김유신 헌터."

마르첼로의 빙그레 웃는 얼굴이 내쪽으로 향했다.

"정작정보 제공자인 당신은 멀찍이 서서 협상을 주도하기만 하는군요. 당신은 원하는 게 없습니까?"

"……하하! 먼저 말 꺼내주셔서 감사하네요.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이번 일이 성공하면 두 분께 개인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마르첼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메네스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괬다.

"한번 지껄여 보기나 하여라."

"언젠가 제가 맡은 세력이 '세계길드'에 들어가고자 할 때, 성기사단과 묘지기에서 동의표를 던져주셨으면 합니다."

"……뭐?"

자리에 있는 모두의 표정에 숨길수 없는 경악이 드러났다.

"푸훗! 푸하하하하!"

메네스는 배를 잡고 웃었고.

"……이건.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마르첼로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김유신 헌터. 당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그럼요."

"혹시 어떤 길드를 이끌고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없습니다. 아직은요."

세계 길드에 소속되기 위한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다. 단순히 전력이나 규모, 자본력으로만 따진다면 미국의 초대형 헌터 길드들이 대거 속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단 하나의 세계 길드도 배출하지 못했다.

세계 길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건 하나.

"그럼 당신은 뭘 가지고 있죠?"

바로 이계의 '권능'이다.

성기사단과 묘지기. 두 세력 모두 '이계의 유적'을 점유하고 그들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아무것도 말씀드릴 게 없네요."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내 제안은 세계 길드에 들어갈 때 도움을 달라는 것뿐. 지금 내가 어떤 패를 가졌는지 노출할 필요는 전혀 없다.

"터무니없다! 그래서 재밌구나!"

메네스가 깔깔 웃었다.

"우리와 같은 선상에 서겠다고? 그래, 좋다! 네가 정말로 세계 길드의 기준을 채워서 온다면, 나 파라오 메네스와 묘지기들은 네 세계 길드의 가입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다!"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있던 마르첼로도 결국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저 아크 비숍 마르첼로와 성기사단 또한 김유신 헌터가 이끄는 세력의 세계 길드 가입에 동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됐다.

됐다!

나는 최대한 표정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자, 미래의 신입. 하지만 이 모든건 우리가 아르민 발터를 잡은 뒤에야 가능한 일인 건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구체적인 사항을 말씀드리죠."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정보에 더해, 아르민 발터와 싸울 당시 겪은 이야기까지 실감 나게 곁들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윤정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 작전을 위해서는 두 사람의 협력이 필수적이니까.

내가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굴러 갔다.

"……그래서 발터가 그렇게 절실히 원하는 다음 그릇은, 다름 아닌 이번 '클래식 게이트' 재앙의 핵인 한윤정 입니다."

"흠."

곳곳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발터는 그녀를 '재앙의 핵'이라고 말했고, '그릇'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윤정 또한 본인이 이번 재앙의 '보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나는 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면, 발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접촉하려고 할 겁니다. 그녀가 죽어버리기 전에요."

"……."

좌중이 조용해졌다.

"……놀라운 이야기군요."

마르첼로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번 재앙의 핵이 한윤정이라는 마인이고, 아르민 발터가 그 힘에 이끌려 그녀를 찾고 있다라……. 그정보가 사실이라면 결정이군요."

메네스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녀는 네 친구인가?"

"네."

"대단하군."

좀 처럼 다른 사람 칭찬은 하지 않을 것 같던 메네스도, 이번 만큼은 달랐다.

"말씀드린 대로, 한윤정은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클래식 게이트의 피해를 최소화할 겁니다. 우리는 그녀를 다른 외압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아르민 발터가 오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게 바로 이들과 손을 잡은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한국의 헌터 협회는 이번 재앙의 보스 몬스터 척결을 1순위로 둘 것이다.

한윤정에 대한 사연과 그녀의 진심을 줄줄이 늘어놓는다고 해도, 공무원인 그들은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기 때문에 그녀를 없애고 볼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한국 정부의 제의를 거절한 것에서부터 드러나지만, 이들의 최우선 목표는 아르민 발터의 체포 및 말살이다.

충분히 이용할 여지가 있다. 만약 헌터 협회가 한윤정을 죽이려 들어도, 그들은 아르민 발터를 유인하기 위해 막아줄 것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메네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믿을 수 있나? 아르민 발터야 자신의 탐욕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령 그녀가 진심이더라도 계획대로 클래식 게이트의 피해가 최소화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마지막에 그녀는 어쩔 생각인가?"

역시나 근본적인 의문을 찌르고 들어온다.

이들도 순순히 이용당해 줄 만큼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저는 제 친구를 믿습니다."

여기서는 조금 도박 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녀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녀가 이번 재앙의 핵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그녀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든다면, 네. 죽여도 좋습니다."

"……."

"두 분이 직접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그 대가로 우리에게 필요한건 잠깐의 시간일 뿐입니다."

서울 연쇄살인.

아르민 발터.

재앙 클래식 게이트.

이 세 가지 사건을 한 번에 묶어서 해결해 버릴 수 있는 찬스다.

떡밥은 충분히 크다.

"잠깐의 시간. 우리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너희들이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일단 이 떡밥은 물 수밖에 없다.

물어라.

"……."

10분.

두 사람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가졌고.

"묘지기는 협력하겠다."

"성기사단이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떡밥을 물었다.

유례없는 큰 판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 * *

다음 날.

나는 신나라 대표와 통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네, 맞아요. 국내는 진주시, 군산시, 천안시, 횡성군 도합 4개의 게이트로 추정되네요. 횡성 쪽은 아직 징조가 불안정하다곤 하지만, 이제는 거의 확실해졌나 봐요.

"빡세네요."

재앙의 범위는 아시아 전체지만, 문제는 각국 영토에 얼마만큼의 게이트가 열렸느냐다.

옆 나라 일본이 단 두 개의 게이트만 열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 국은 많이 빡센 게 맞다.

-가람 매니지먼트는 진주 쪽의 방어를 맡았어요. 으으, 아쉽네요. 유신 씨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중요할 때에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신나라에게는 미안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이 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명령 거부권 조항을 넣었다.

정부에서는 국가급, 대륙급 재앙이 터지면 각 길드와 매니지먼트에서 의무적으로 인원을 창출한다.

나라에서 직접 인원을 호명하지는 않는다. 5급 몇 명, 4급 몇 명, 뭐 이런 식으로 해당 소속 헌터들의 수를 고려해 차출 인원만 통보한다.

길드에서는 현재 헌터들의 컨디션과 일정 등을 고려해 출장 헌터들을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대형 재앙이 터져도 '출정 의무'에서는 자유롭다.

"물론 재앙이 터졌는데 노는 건 아니고요. 저는 제 나름대로 움직여볼 생각입니다."

-네, 믿어요. 미궁 던전의 영웅이라면 또 뭔가 생각이 있겠죠? 가람쪽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하시는 일에 집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담당자를 만나서 다행이다.

원래 이런 일 터지면 피차 감정상하고 큰 소리 오가고 하는 게 보통 인데, 그녀는 이런 선을 정말 잘 지켜주고 있었다.

"너 그렇게 보니 진짜 헌터 같네."

옆 자리에 앉은 한윤정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진짜 헌터 맞지."

"하아. 인생은 더럽게 불공평해. 누구는 공인 헌터가 되고, 누구는 몬스터가 돼서 죄인 취급이라니."

그녀가 불만스럽게 팔을 들어 올렸다. 절그럭거리는 쇠사슬이 그녀의 손목을 묶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스 한."

뒷 자리에 앉은 마르첼로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미스 한의 상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보니……. 갑갑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현장에 도착하면 바로 풀어드리겠습니다."

"하아, 알았어요."

한윤정은 불만을 표출했지만 따지지는 않았다. 마인을 몸 멀쩡히 내버려 두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으니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헬기장으로 왔다.

-탑주. 재앙 30분 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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