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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100화 (100/337)

나 혼자만 마탑주 100화

"아니야! 우리 윤정이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애가 아닌 거 유신이도 알잖아? 그렇지? 응?"

나는 한윤정의 집에 방문했다.

아줌마는 내 옷자락을 붙들며 목놓아 울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는 저 초췌한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이고! 그 착한 애가 무슨 사람을 죽였다고……! 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나는 딸을 걱정하며 통곡하는 어머니 앞에서 현실을 줄줄 늘어놓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 못했다.

"그럼요.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 낼게요."

"아이구, 고마워! 고마워! 참, 내 정신 좀 봐! 밥은 먹었니?"

"하하, 먹고 왔어요. 그보다 윤정이는 집에 안 들어왔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자취하잖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집에 왔는데 요즘은 시험 기간이니 뭐니 바쁘다고 해서……"

혹시나 해서 와봤지만 결국은 자취방에도, 집에도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 테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왔어도 소중한 사람들을 해칠까 봐 찾아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내내 통곡을 하던 아줌마는 꼭 딸아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며 연신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나를 집 밖까지 따라와서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나는 앞주머니에 넣은 꾸깃꾸깃한 종이를 펼쳐서 '집'이라고 적힌 부분에 체크 표시를 했다.

대충 그녀가 갈 만한 곳을 한군데 씩 들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은……'

이번에는 한윤정이 자주 가는 플레이어 트레이닝 센터다. 나도 전력외이던 시절에 자주 들렸던 곳이기도 했고.

그런데.

2층 건물 창가에 떡 하니 대형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공인 4급 헌터 '김유신'이 다닌 바로 그 트레이닝 센터!]

그 아저씨도 참…….

나는 민망함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오늘은 장사 안 하나?

혹시나 해서 문을 두드려보았다.

"거, 누구쇼?"

굵직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이번엔 또 어디 방송국이여? 그냥 가쇼! 할 말 없으니께!"

"저 김유신입니다."

뚝.

목소리가 끊겼다. 뒤이어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왈칵하고 문이 열렸다.

"오오오오! 김유신이! 들어와! 어여 들어와!"

호들갑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나는 트레이닝 센터로 들어왔다.

여긴 바뀐 게 없었다. 익숙한 트레이닝 기구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저 중에 몇 가지는 내 손때도 묻어 있을 것이다.

'그립네.'

플레이어들은 체력이나 근력 자체가 일반인들과는 다르다 보니, 좀 더 특화된 훈련기구가 필요했다.

물론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제대로 된 훈련기구는 길드 정도에 들어가야 쓸 수 있고, 서울 곳곳에 널린 이런 트레이닝 센터들은 가면허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이다.

가면허 플레이어들은 던전 일정 빌때쯤 여기서 개인 훈련을 하고 간다. 나랑 한윤정은 던전에도 못 가는 '전력외' 취급이어서 트레이닝센터만 주야장천 드나들었지만 말이다.

"귀하신 분이 왔는데 대접할게 이런 것밖에 없구만."

아저씨가 내게 넘겨준 건 호불호 최강의 음료수인 '솔잎의 눈'이었다.

솔싹 추출물이 함유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캔 음료다.

"잘 먹겠습니다!"

물론 나는 정말 좋아한다.

요즘은 파는 곳이 잘 없어서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건데.

캔 뚜껑을 따고 들이켜니 청량한 솔잎 맛이 온몸으로 퍼진다. 하아, 좋다. 바로 이 올드한 멘톨계열 맛을 원했다.

"우리 김유신이 덕분에 한시름 놨어. 정말 고마우이."

"제가 왜요?"

"이 장사도 10년쯤 하니까 말여, 기구가 낡았다며 사람들이 잘 안 오더라고. 장사 접을까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신이가 뉴스에도 나오고 난리인 거야! 그래서 김유신이 이름 붙여서 현수막 거니까 손님들이 막 몰려 들었지! 덕분에 요즘은 새 기구도 들여놓고 괜찮아졌어."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착.

아저씨는 착잡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랑 같이 다니던 윤정이……"

"아."

"손님 뚝 끊겼지 뭐.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한윤정이가 왔다 갔다 한 곳인데, 마인이랑 같이 운동했다는 생각에 다들 질색하는 거지."

아저씨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유신아."

"네."

"너도 한윤정이가 진짜 마인이라고 생각허냐."

아저씨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뉴스만 보고 욕하겠지만, 한윤정이를 아는 사람은 그런 말 못하제. 그렇게 여리고 성실한 아이가 마인이 돼서 사람을 막 죽이고 다닌다고? 하이구, 말도 안되는 소리여! 뭔가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어. 착오가."

"……."

"한윤정이. 네가 떠나고 나서는 더 악착같이 운동했어. 그런 애들이 성공해야 하는데. 갑자기 마인은 뭔놈의 마인이여! 으이? 그렇게 손에 반창고 덕지덕지 붙이고 온몸에 파스 붙여가며 운동하는 마인이 세상에 어디 있어? 하이구 참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윤정이한테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려고 찾고 있는 중이에요. 혹시 여기 들른 적 없어요?"

"트레이닝 석 달 치 끊어놓고는 갑자기 안 왔어. 그럴 애가 아닌데 무슨 일이 있나 생각했지."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꽝이구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아, 잠깐만!"

아저씨가 직원실로 냅다 뛰어가더니 펜과 A4용지를 가지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쑥스러운 소녀처럼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사, 사인은 해주고 가야제. 액자에 잘 해서 벽에 걸어놓게."

"……하하."

사인을 해주고, 나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녀가 자주 가던 동네, 편의점, 아카데미 기숙사.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총합해 정말 사소한 가능성까지 쥐어짜 냈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탑주님. 이쪽엔 없었습니다.

-죄송해요, 선배님.

함께 조사하는 마탑 멤버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공원 벤치에 퍼질러 앉았다.

'경찰도 못 찾고 있다는데,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잠시 무기력함이 왔지만 금방 정신을 차렸다.

쉴 때가 아니다. 더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어떻게든.

-띠링!

스마트폰 문자가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수신자가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내일, 산으로 와.]

* * *

붉은 비가 내렸다.

길거리는 시뻘건 빗물로 철벅거렸다. 세상이 온통 피 천지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우산은 시뻘겠고, 건물은 붉은 액체로 범벅이 되어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이상 현상은 '재앙'의 전조다.

그중에서도 붉은 비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

-7년 만에 재앙, '클래식 게이트'가 발현될 예정입니다.

-학자들은 하늘의 불규칙적인 마력 현상을 측정했으며 붉은 비가 내리는 이상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재앙의 범위는 한반도와 일본, 중국, 대만, 태국, 베트남, 필리핀, 싱가포르를 포함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광대한 범위입니다.

-각국 정부는 '아시아 재앙 공략연합'을 출범했으며 소속국들이 긴밀하게 협조하여 인명을 최우선으로 재앙을 물리칠 것에 합의했습니다.

이놈의 상황은 좀 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연쇄살인마, 마인에 이어 이번에는 대륙 범위의 재앙이라니.

한국은 아직 '미궁 던전'의 충격에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한반도 전체에 몬스터가 떨어지는 미궁 던전에 비하면 위험도 자체는 낮은 재앙이지만, 붉은 비도 그렇고 워낙 여론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연쇄살인마와 마인으로 떠들썩하던 여론은 붉은 비로 인해 씻겨나가고, 그 자리에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차올랐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합동 수사본부'의 전력 일부를 재앙 방어 쪽으로 돌리기로 했다. 범죄 수사도 좋지만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내 입장에선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한윤정을 추적하는 인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서울 천지에 쫙 깔려 있던 경찰들도 많이 빠졌다.

다만 아쉽게도.

-국내에 체류 중인 바티칸의 성기사단이 클래식 게이트 재앙에 대한 한국 정부의 협조를 거절했습니다.

-성기사단에 이어 이집트의 '묘지기단'도 재앙전 협조를 거절했습니다. 파라오 메네스는 '우리의 방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연쇄살인범의 체포'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두 세계 길드는 여전히 아르민 발터를 쫓고 있으며.

아르민 발터는 한윤정을 쫓는다.

저번에 겪었던 그 '총체적 난국'이 다시 재현되지 말란 법은 없다.

쏴아아아아!

붉은 비는 추적추적 끊임없이 내렸다. 나는 우산을 들고 걸었다.

그저 색깔만 붉은 비일 뿐인데, 정말로 피가 묻은 것처럼 끈적거리고 온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나는 무거운 다리에 힘을 주어, 한 발짝 한 발짝 한윤정과의 약속장소를 향해 걸었다.

서울 아차산 근처의 언덕길.

가면허 플레이어 시절에 한윤정과 자주 오던 곳이다. 당시엔 마나 삼림욕이니 뭐니 해서 마나 농도가 높은 곳에 있으면 마력 능력치가 잘 올라간다는 그런 속설 때문에 체력훈련 겸해서 자주 들락거렸다.

마나 삼림욕 이야기가 나왔던 곳인 만큼, 마계수들이 우렁차게 자라 있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키 큰 침엽수림이 잔뜩 솟아 있어 유럽의 드라마 촬영장 같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붉은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의 산행은 음침했다.

피 흘리는 나무들. 바람에 흔들리며 이파리에서 붉은 액체를 떨어뜨리는 모습이 퍽 위협적이고 으스스하다.

나는 최대한 생각을 비우려 노력하며 걸었다.

중턱쯤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잠시 후 나무 하나 없는 탁 트인 경관이 펼쳐진다. 아래는 건물들과 한강이 보인다. 예전에 무척 좋아하던 경치다.

조용히 절벽 쪽으로 다가간 나는, 우산을 옆으로 기울였다.

"안 쓰냐?"

쏴아아아아아아아!

수풀 속에서, 붉은 비에 흠뻑 젖은 여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목 아래로는 마인의 껍질이 뒤덮인 모습이지만 얼굴만은 아직 사람의 모습이다.

"이제 비 맞는다고 감기 걸리는 것도 아닌데 뭐."

"……그러냐."

우리는 말을 멈추고 조용히 앞을 응시했다.

피에 젖은 도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동안 뭐 했어?"

내 물음에,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자살."

"……."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져 봤는데 그 정도론 안 죽더라. 화가 나서 물에도 빠져봤거든? 눈을 뜨니까 다시 지상이었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 마인으로 변해서 빠져나온 것 같아."

그녀는 말을 멈추고 껍질로 뒤덮인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나 이제 정말 사람이 아닌가 봐."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서 우산을 통째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네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사람인 거야."

말없이 우산을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우산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곤중간에 놓고 나랑 반씩 썼다.

그렇다. 마치 사람처럼.

"있지."

그녀가 운을 띄웠다.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내가 이번 재앙의 보스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앙이 열리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진짜로?

"클래식 게이트도 보스 몬스터를 찾아서 죽여야 끝이 나는 재앙이잖아? 아무래도 내가 그 재앙의 주체가 된 것 같아."

"……에이, 말도 안돼! 네가 어떻게 그걸……"

"마인이 되면 알 수 있어. 자연스레."

한윤정이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내가 이 붉은 비의 재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이 심장이 멈추면 재앙도 끝이라는 것도…… 응. 전부 알 수 있어."

"……."

"참고로 나 이제 몬스터를 조종할수도 있다? 헤헤, 웃기지? 혹시 나해서 몬스터를 움직여봤는데 내 지시에 따르더라. 진짜 마인이라니까."

웃기지 않았다.

그녀의 말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그러니까 부탁이 있어."

하지 마라.

제발.

"네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어."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 대답을 촉구하듯 쏟아져 내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라면 음……. 나도 각오할 수 있을 것 같아. 생판 남한테 죽는 건 좀 무섭기도 하고."

그녀는 덤덤한 어조로, 제 죽음을 확정한다.

그래, 알고 있다.

재앙에 의해 잠시 유예됐을 뿐, 이나라는 어떻게든 그녀를 찾아 낼 것이다.

특히 협회장 홍율이 돌아온다면 자기 학생들에게 해를 입힌 한윤정을 두 눈이 시뻘게져서 찾아 다니겠지.

한번 마인이 된 사람을 인간으로 되돌릴 방법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의 결말은 배드엔딩으로 정해져 있다.

"아, 물론 지금 당장 죽겠단 소린 아냐."

그녀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거든."

그렇게 말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껍질로 뒤덮이며 마인화됐다. 그러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팔을 내 쪽으로 확 뻗었다.

"우왁!"

기겁한 내가 뒤로 몸을 젖히자.

어느새 인간의 얼굴로 돌아온 그녀가 큰 소리로 웃는다.

"쫄았냐? 응? 쫄았지? 공인 헌터가 돼서도 쫄보인 건 여전하네."

"너……"

"힘을 컨트롤 하면서 마인화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을 알아냈어."

그녀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결심했어. 죽기 전에 재앙에게 한 방 먹이기로."

"……뭐?"

"재앙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잖아? 뭐어, 몇 주 전엔 힘을 원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건 정말 아니야. 재앙은 내게 사람들을 죽이게 했고, 이번엔 나를 이용해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어."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솔직히 마인의 본능으로는 지금 당장 너도 죽여 버리고 싶어."

"……."

"누군가가 계속 내 귓가에 속삭여.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말살해라. 모든 걸 내려놓고 본능에 몸을 맡겨서 편해지라고, 막 그렇게 세뇌하듯이 속삭이는 거야. 진짜 악독하지 않니?"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세상에 한 방 먹이고 싶어."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강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협조해 줄 거지?"

그녀가 손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그래, 이래야 한윤정이지.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계획은 있어?"

우리는 예전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이 세계에 빅엿을 먹일지 함께 킬킬거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나름의 답을 찾았다.

"저기 봐! 이제 해 뜬다!"

붉은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간다.

이상 현상이 끝났으니, 이제 곧 재앙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도.

붉은 비가 내리는 것보단 맑게 갠하늘이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 * *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탔다.

계획은 세워뒀다.

다만 마지막에 그녀가 자신을 죽여달라는 요청에는 대답을 유보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에피소드에서, 내 나름대로 마지막 부분을 바꿀 생각이었다.

-이번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상계역. 상계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다시 상계동으로 돌아왔다.

역에서 내려 인적 없는 조용한 도시로 천천히 걸었다. 이 동네에서 두 개밖에 없는 편의점에 가서 은솔이 먹고 싶다고 한 과일맛 젤리도 샀다.

그렇게 군것질거리도 사고, 천천히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던 나는 적당한 지점에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나오지?"

저벅저벅.

흰 사제 옷을 입은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단이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겠지."

오른쪽의 성기사가 말했다.

"헌터 김유신. 아크 비숍 님이 찾으신다. 순순히 따라온다면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다."

"위해 같은 소리 하네."

나는 느긋하게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녀석들과의 거리를 조절했다.

"할 이야기 있으면 마르첼로가 직접 오라고 해. 똘마니들 보내서 귀찮게 하지 말고."

"우습군. 네가 뭐라고 감히 그분을 입에 올리느냐."

스릉.

두 기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하얀 마력이 검신을 코팅하듯 뒤덮었다.

"포기해라. 우리도 너와 같은 4급이지만, 신성기를 다루는 성기사는 일반 헌터와는 궤를 달리한다."

"뭣보다 2 대 1이지."

"비아냥은 그만둬라. 그리고 말해두지만 이게 마지막 경고다. 헌팅디바이스가 있다면 바닥에 내려놔라. 무릎을 꿇고 양손을 머리 뒤에 붙이도록."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척하며 신발 밑창을 훑었다.

"까고 있네."

<데바스타>

쏜살같이 쏘아져 나간 나는 그대로 성기사 한 명의 안면을 붙잡고 콘크리트 벽에 처박았다.

쿠웅!

건물 벽에 균열이 생기며 놈의 얼굴이 짓이겨진 채 넘어간다.

이어서 뒤를 돌아보며 허리를 젖히자, 순백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간다.

"네노옴!"

빛살처럼 휘둘러지는 백색의 섬광은 빠르고 경쾌했다. 몬스터를 잡는 검답게, 힘과 질량에 의존한다.

가장 적합한 동선을 찾아 가르는 효율성까지, 상당히 기본기가 잘 갖춰진 검사라는 생각이 든다.

특정 몬스터를 잡는 속도는 어쩌면 내가 저 성기사보다 성과가 떨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녀석에 비해서는 하품이 날 정도야.'

<어스 클레이모어>

손가락을 움직여 즉발형 지면검을 솟구치게 해 성기사의 돌진을 봉쇄한다.

<쉴드>

몸이 움직이는 방향에 쉴드를 펼쳐 동작을 방해한다.

<아이스 필드>

바닥에 깐 얼음 장판으로 발에 힘을 싣지 못하게 미끄러뜨린다.

이렇게 조금만 스트레스를 줘도, 검사의 밸런스라는 건 간단히 무너져 버린다.

"무슨……! 대체 능력이 몇 개냐!"

결국 성기사가 건물 벽을 딛고 뛰어올라 얼음 장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까꿍."

상정 내다.

리프 부츠로 먼저 도달한 내가 성기사의 안면을 다리로 찍어눌러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앙!

"쿨럭!"

녀석이 쓰러지자 나는 끝을 뭉툭하게 한 아이스 자벨린을 발사해 놈의 팔과 다리를 얼렸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성기사의 목을 짓밟았다.

"커헉!"

"아크 비숍에게 전해."

허리를 굽혀 놈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나는 아르민 발터를 찾아 낼 방법을 알고 있다."

"……!"

"이런 개수작 말고, 정식으로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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