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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99화 (99/337)

나 혼자만 마탑주 099화

성기사단과 묘지기, 두 세력의 헌터들이 일제히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일단은 양쪽 모두 아르민 발터가 목적인 듯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상황이 뭔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르민 발터가 워낙 잘 도망치는 것도 문제였지만, 성기사단과 묘지기들의 감정싸움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

발터를 노리는 척하면서 상대 쪽 헌터를 공격하거나 대놓고 능력으로 경쟁자의 발을 묶으려는 시도까지 했다.

추격은 뒷전, 서로 견제를 하다가 결국 화를 참지 못한 몇몇이 냅다 상대 진형에 달려 들었고, 이를 말리려는 동료들까지 휘말리며 전투가 시작됐다.

절반은 여전히 발터를 쫓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와, 난리도 아니네.'

갑작스러운 세력들의 난입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찬스다.

'에아. 한윤정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겠어?'

-죄송합니다. 이미 탐지범위를 벗어 났습니다.

빠르네. 벌써 여기를 벗어난 모양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마인 상태인 한윤정의 마력은 감지했지?'

-긍정. 데이터 등록을 마쳤습니다.

꽈앙!

여기까지 파편이 날아왔다. 싸움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다. 나는 더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묵힌 감정이 폭발한 걸까.

두 세력의 싸움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난리를 틈타 아르민 발터가 도주하고 있었다.

"잠깐!"

마르첼로도 이를 인지했는지 다급히 소리쳤다.

"이 무슨 추태입니까? 우리끼리 싸운다고 목표를 놓치면……!"

그때 제트기 같은 파공음과 함께 메네스의 몸이 돌진해 왔다. 마르첼로가 손을 모아 마력 역장을 펼쳤고 메네스는 힘껏 황금 지팡이를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어엉!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맹렬한 후폭풍이 터져 나오며 주위에서 싸우던 사람들이 날아갔다.

"그 쬥알쬥알 놀리는 입을 한번 찢어 놓고 싶었어."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닙니다!"

마르첼로의 몸에서 눈부신 백색 마력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메네스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내게 명령하지 마라. 벌레."

"정신 차리십시오!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당신도 쓸데 없는 다툼으로 아르민 발터를 놓쳤다는 책임을 피할수 없을 겁니다!"

책임이라는 말에 메네스의 인상이 한 차례 굳어졌다.

그녀는 딱 봐도 앞뒤 안 가리는 불같은 성격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수장이다. 두 세력의 원한이 아무리 뿌리 깊다고 해도 임무가 최우선이었다.

"남은 묘지기들은 나를 따르라."

결국, 메네스가 병력을 이끌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마르첼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얽히면 여러모로 곤란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슬쩍 등을 돌려 빠져나가려는데.

화악!

내 앞으로 순백의 십자가가 펼쳐졌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관객분."

마르첼로는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긴장한 티를 풀며 마주 바라보았다.

후웅!

마르첼로는 한 번의 발 구름으로 하늘을 날아 내 앞에 떨어졌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바티칸의 아크 비숍. 전투 내내 헤실헤실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자였지만, 사실 이런 놈들이 제일 무섭다.

"저거, 쫓아가야 하지 않나요?"

"쫓아간 저희 단원들을 믿어야죠. 이제 와서 가봐야 늦을 것 같으니, 저는 제 할 일을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신원을 밝혀주시겠습니까?"

……웃기는 놈일세.

남의 나라에 온 주제에 신원 요구를 다 하고.

하지만 괜히 불필요한 오해는 피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따르기로 했다.

"공인 4급 헌터 김유신입니다."

나는 지갑에서 공인증을 보여주었다.

"아르민 발터와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냥 운 나쁘게 이 사태에 얽혔을 뿐입니다."

"제가 처음 관객분을 봤을 때, 아르민 발터에게 제압당해 목을 붙잡힌 채 영혼을 흡수당하고 있더군요. 맞습니까?"

"그래서요?"

"발터의 고유 능력은 '스피릿 체인지'입니다. 접촉한 상대와 몸을 맞바꾸는 능력이죠. 즉."

마르첼로가 빙그레 웃었다.

"혹시 당신이 '아르민 발터'가 아닐까? 하는 그런 의심이죠."

"……."

일이 또 이렇게 되어버리는 건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해입니다."

"누구나 오해라고 하겠죠. 죄송하지만 저희 성기사단과 동행해 주시겠습니까? 몇 가지 확인 절차를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야."

슬슬 짜증이 치민다.

"작작해라. 네가 뭔 권한으로 자국 헌터를 수사해?"

"권한이라면 있습니다."

마르첼로가 품에서 수첩을 꺼내 보였다.

"성기사단은 세계헌터연맹과 UN 평화유지군에 소속되어 전 지구적재앙 문제를 수사하는 '세계 길드' 입니다. 당연히 독자적인 수사권을 보유하고 있죠. 저 바보 파라오와 묘지기들도 마찬가지지만요. 아무튼, 당신이 정말로 공인 헌터라면 우리에게 협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나는 히죽 웃었다.

"거절한다면?"

"아, 물론 저도 처음부터 권한 들먹이며 데려갈 생각은 없었어요."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마르첼로의 하얀 사제복이 펄럭인다. 광대한 순백의 마력이 그의 몸을 감싼다.

"힘으로라도 데려가겠습니다."

"그거 좋네. 한번 해봐."

나도 마나를 끌어올리며 마르첼로와 맞섰다.

-탑주! 안 됩니다. 여기선 후퇴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다.

센 척을 하긴 했지만 마인이 된 한윤정과 싸우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아르민 발터와 싸웠고, 이제는 또 성기사단의 리더 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마나는 진작 바닥났고 정신력도 한계.

반면 마르첼로는 최소 공인 2급의 실력자다. 힐러 포지션의 공인 3급 오봉규도 만전의 상태에서 간신히 쓰러뜨렸는데,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싸우면서 시간을 벌어야겠어.'

나는 눈동자를 굴려서 뒤를 바라보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위잉! 위잉!

빙고다. 뒤쪽에서 요란스러운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경찰들뿐만 아니라 군인에 협회 소속의 헌터들까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흐음, 어느 나라를 가든 공권력은 한발 느리다니까요."

마르첼로가 마력을 거두어들였는지 펄럭이던 성의가 다시 내려갔다.

"여기서 굳이 일을 키울 필요는 없겠죠. 일단은 물러나겠습니다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마르첼로는 그 말만 남기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단 일원들과 함께 떠났다.

'하아.'

다리에 힘이 빠졌다.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나는 경찰들 쪽을 돌아보았다.

"얽히면 일 복잡해지겠다. 우리도 도망치자. 에아."

-예, 탑주. 최단 거리를 계산하겠습니다.

* * *

-한국 헌터 아카데미 내부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행을 저지른 아카데미 3학년 한윤정은 현재 마인화가 진행 중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수사본부는 한윤정과 근래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국내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 중이던 성기사단과 묘지기단이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정황이…….

-저도 정 기자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이번 사태는 정말로 문제가 심각하다. 이렇게 보여지고 있거든요. 연쇄살인마에 마인까지. 경찰, 집행부, 세계 길드까지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살인마가 체포당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무능함에도 급이 있는 거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우리 헌터계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어떤 채널에서든 아르민 발터와 한윤정 사태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샤워를 마친 나는 마탑에서 착잡한 기분으로 생수를 들이켰다.

"믿을 수 없어요. 윤정 언니가 마인이라니……"

내 이야기를 들은 진보라도 충격이 큰 듯했다.

"근데 진짜 윤정 언니였어요? 어제만 해도 윤정 언니랑 이야기도 하셨잖아요!"

"그랬지.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게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서진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아카데미 들렸던 탑주님은 우연히 이번 사태를 목격하고 마인이 된 한윤정을 뒤쫓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를 설득했고, 잠시나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때 그녀는 마인이 된 것도, 사람들을 살해한 것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르민 발터가 나타나 그녀를 공격했고, 그녀는 다시 마인으로 변해서 도망쳤습니다. 거기에 발터를 쫓고 있던 '세계 길드'까지 나타나 사태가 커졌고, 성기사단 마르첼로는 탑주님이 아르민 발터가 아닐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한 호흡도 안 쉬고 잘도 말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그렇다면 이제 모호한 부분을 짚어나가 보죠."

정서진이 노트를 펼치며 말했다.

"최근 아르민 발터에 의해 일어났던 살인 사건들은 마인이 된 한윤정에 의해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봐도 무방합니까?"

"한윤정이 관여된 건 맞아. 다만 전부 한윤정이 한 건지, 발터에 의한 건도 있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고."

"그렇군요."

정서진이 노트에 빠르게 필기했다.

"그럼 아르민 발터는 왜 그녀를 공격했을까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몸을 찾고 있는 것 같아."

발터의 고유 능력은 스피릿 체인지.

상대와 몸을 뒤바꾸는 능력이다. 놈은 한윤정을 보고 '최적의 몸'이니, '그릇'이니 하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이건 놓칠 수 없다며 강한 탐욕을 드러냈다.

다만 나도 한윤정도, 그의 능력에 노출됐을 때 어렵지 않게 저항하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상대가 정신을 잃거나 무방비 상태일 때 사용해야 성공률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아, 선배님! 저도 아르민 발터 특집 영상 봐서 알아요!"

진보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사람. 벌써 스무 번째 몸을 맞바꾸는 거래요! 그리고 몸을 바꾸면 해당 대상의 고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나 봐요. 성기사단이 발터를 쫓는 이유도, 자신들의 동료를 죽이고 그몸으로 학살사건을 벌인 원한 때문이래요."

"스무 번째 나 몸을 바꾸고 있다라……"

대충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아르민 발터는 이번에 한윤정의 몸을 노리고 있어. 놈은 반드시 다시 나타날 거야."

아직도 한윤정을 보던 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 탑주님의 지침을 말해주십시오."

"음?"

"이번 사태에 대해 마탑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전적으로 탑주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

한윤정이 마인이 됐다.

자의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떠오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툭 하면 이성을 잃고, 정신을 차리면 사람이 죽어 있고. 내가 죽인 기억은 또렷이 나고……'

'유신아. 왜 하필 나야?'

그 표정,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한윤정은 지옥에 떨어져 있었다.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한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마인 한윤정의 다른 면을 보았다.

그녀도 엄연히 재앙의 피해자다.

법이 어쩌고 사회가 어쩌고 그런 현실적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이번 일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일단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한윤정을 막는 거야.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야."

정서진과 진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

그때 허공에 빛무리가 터져 나오며 에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아! 알아냈어?"

"없었습니다."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한번 마인이 된 인간을 되돌리는 방법은 찾지 못했습니다."

"……."

씁쓸하긴 하지만 예상했던 바다.

"하, 하지만 당장은 없어도 차후에 방법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진보라가 말했다.

"몬스터 사태로 현대의 생명 공학기술은 눈부실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요! 에렌델에서 찾아 내지 못한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요! 그리고 아직 2층 대서재의 봉인된 서재도 다 해제하지 못했으니까, 그쪽에 방법이 있을지도……"

한윤정을 붙잡아서 치료법을 개발할 때까지 봉인한다. 낙관론이긴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뭐가 어떻게 됐든, 경찰이나 아르민 발터보다 우리가 먼저 한윤정을 찾아야 해."

결심했다. 나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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