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98화
나는 스마트폰을 그녀가 볼 수 있도록 돌렸다. 거리가 꽤 되지만 마인의 몸이 된 그녀라면 충분히 보일것이다.
내가 화면에 띄운 건 에아가 입수한 한윤정의 스케쥴표.
빼곡 빼곡 들어찬 시간표는 빈틈이 없다. 없는 시간도 쪼개고 또 쪼개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1랭크 던전에 들어가고, 트레이닝 센터에 다니고, 틈만 나면 마력 운용 연습, 명상, 각종 마나 기술 습득에 이론 공부까지.
그동안 그녀가 흘린 피와 노력이 느껴진다.
"나는 그저, 네가 프라이드가 높아서 남의 도움을 안 받는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근 몇 달간 쌓인 대출 이자만 몇천. 그 돈도 모두 훈련에 투자했다.
틈만 나면 학생회에 찾아와서 어떻게든 눈에 들려고 노력했고, 부산물을 줍는 '스케빈저' 활동을 하며 던전에 익숙해지고 전투를 배우려고 했다.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그녀는 남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내색한 적 없다.
그녀는 내게 동정받으려 하지 않았고.
그녀는 내게 도움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녀는 계속 나와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프라이드.
굳이 그 이유를 꼽으라면.
"야, 너 혹시 나 좋아했냐?"
정말로 잘 모르겠으니 일단 한번 찍어볼 뿐이다.
[죽어. 새끼야.]
그녀의 몸에서 보라색 광선 다발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다급히 데바스타로 집중 포격 범위로 벗어난 다음, 데바의 눈으로 보고 이어지는 2차 투사체들을 발로 뛰어 피해냈다.
"시기, 질투, 열등감, 더 나아가서 원망, 소외감, 적의까지. 밑바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야."
나는 정면에 쉴드를 펼쳐 폭발을 막아냈다. 어마어마한 화력에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린다.
"네가 계속 나를 피하길래, 나한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 왜냐면 내가 그랬거든. 잘 나가는 친구 새끼들을 볼 때 딱 그런 기분이었거든!"
내가 가진 몰입력과 저질적인 근성은 사실 열등감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나도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며 괴로워하고 발버둥쳤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공인 4급 헌터와 전력외 플레이어.
우리는 같은 시간을 소모했지만 이루어낸 성과는 다르다. 내가 공인 4급이 되어 모두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을 때, 아마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상황과 비교하게 돼서 괴로우니까.
점점 간격이 벌어지니까.
하지만 그 감정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당연한 거고, 자연스러운 거다.
나는 오른발에 데바스타를 켜고, 그녀가 발사하는 무수히 많은 광산다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야. 꼭 대등하지 않으면 어때?"
내 몸이 순식간에 그녀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녀는 내 접근을 대비하고 있었던 듯 바로 팔을 휘둘러 반격해 왔다.
"나는 네 친구야. 그 사실만이 중요해. 내 위치가 어떻고 네 위치가 어떻고 그까짓 건 아무 상관 없어."
한윤정이 휘두르는 팔을 연달아 피한 나는 데바스타를 재차 발동하여 깊게 파고들었다.
"네가 날 보고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느껴도, 내가 상관없어."
흔들리는 그녀의 눈앞으로 온 나는,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인간의 따뜻한 살갗이 아닌, 차가운 껍질의 감촉이 느껴진다.
"내가 상관없다고 X발! 그냥 내가 너랑 친구 하고 싶다. 아니, 내가 매달려서라도 너한테 친구해 달라고 조르고 싶다. 너 대체 뭘 걱정하는 건데?"
그녀는 진실하고, 타협하지 않으며, 활력이 넘친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덩달아 좋아 지는, 그녀는 그 자체로도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녀와 함께 지낸 누구나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맹세할게."
내게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 없고.
내가 떠나갈까 봐 두려움에 떨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난 언제나 네 편이야."
나는 있는 힘껏,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
"……."
마음속에 담아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깊은 정적이 흐른다.
나는 그녀의 마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어, 애인으로서는……. 그건 좀 나중에 생각하자."
"푸훗!"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시뻘건 눈동자에 뿔이 달리고 외피같은 것으로 뒤덮였던 피부가 녹아내리며, 인간의 피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꼴에 찼냐? 김유신 주제에."
빙긋 웃음 짓는 그녀의 눈에는 작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도 마주 웃어보였다.
"네가 마인인 건 상관없는데, 애인으로 지내다 헤어지면 다시 친구로 못 돌아가잖아."
"……넌 진짜, 울컥하다가도 김 다샌다."
우리는 더 말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탑주. 한윤정의 마인화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수습이 된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다.
"……근데 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이 죽였어."
"……."
갑자기 현실감이 내 목을 옥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이, 가슴과 심장을 때리고 전신을 휘감았다.
머릿속에서는 체육관 안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학생들의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툭 하면 이성을 잃고, 정신을 차리면 사람이 죽어 있고. 내가 죽인 기억은 또렷이 나고……"
목구멍에 마른침이 흘러 들어간다.
역시 서울에서 일어나는 무차별 살인 사건은 그녀가 마인이 됐을 때 저지른 짓이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정식이 잠식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인이었을 때의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지은 죄가 너무 많다.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집행부가 투입된다면 현장에서 즉결 처형. 경찰에 자수해도 상황이 좋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녀는 마인이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마인에 대한 여론과 인식은 더 없이 최악이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유신아. 왜 하필 나야?"
그녀의 눈에서 뚝뚝 방울진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그냥…… 헌터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인이 되어버린 거야?"
재앙.
이렇게도 인간을 간단히 농락하고, 파괴하는 시스템.
지긋지긋하다. 환멸이 난다.
"나 진짜로…… 괴물이 된 거야?"
"그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할……!"
순간 적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의 머리 너머로, 사람의 손바닥이 펼쳐진 채 올라오고 있었다.
"윤……!"
그것이 그녀의 뒤통수를 힘껏 붙잡았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한윤정이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다.
그녀의 몸에서 영혼 같은 것이 빠져나와 손바닥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갑작스러운 제3자의 출현. 나도 에아도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마비계 능력인가? 한윤정도 비명만 지를 뿐 저항하지 못했다.
"여기 있었군. 내 흉내를 내는 살인마."
음침하고 가래 끓는 남자의 목소리.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늙은 서양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탑주! 저자가 연쇄살인마 아르민 발터입니다!
'뭐?'
아르민 발터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한윤정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효과도 사라졌다.
"……아가씨 때문에 내 안위가 위태로워져서 말이야.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왔는데 이런 우연이 있나. 아니, 필연인가? ……재앙의 핵을 담은 그릇이라."
괴인의 눈동자에 지독한 탐욕이 일었다.
"최적의 몸이다! 이건 죽어도 놓칠수 없지!"
발터의 소매 안에서 블레이드 디바이스가 솟아올랐다.
"그 몸을 넘겨라. 그릇!"
'에아!'
-네!
나는 즉시 에아가 발밑에 깐 라이트 데바스타를 수동 발동시켰다. 부둥켜안은 나와 한윤정의 몸이 그대로 발터에게 부딪혔다.
"큭!"
부딪힌 발터가 쓰러지고 우리도 넘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으으! 아아아아아악!"
한윤정의 하얀 피부가 다시 마족의 껍질 같은 것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마인의 보랏빛마력이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기껏 진정시켜놨더니!'
흥분한 한윤정이 살기를 내뿜으며 팔을 휘둘렀다. 수 개의 마력 섬광들이 매섭게 날아갔지만, 발터는 그것을 가볍게 발로만 뛰어서 피해내고는 다시 한번 한윤정의 머리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데바스타>
번뜩이는 흑광과 함께, 내 다리가 발터의 얼굴 앞으로 나타났다.
터어엉!
발터가 가드 자세로 킥을 받아내며 물러섰다. 나도 바닥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안착했다.
"방해하지 마라. 젊은 헌터."
"방해는 네가 했지 미친 놈이!"
<아이스 자벨린>
거칠게 팔을 뻗자 초고속의 아이스 자벨린 여섯 자루가 날아갔다. 발터는 팔을 기역 자로 꺾었다. 날아오던 아이스 자벨린이 멈춰 서더니 발로 밟은 캔처럼 찌그러졌다.
우리가 공방을 주고 받는 사이, 폭주를 견디지 못한 한윤정의 몸은 다시 변이를 시작했다.
뚜둑! 뚝!
살이 부풀어 오르고 파충류의 비늘이 몸을 뒤덮었다. 인간의 형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치 뱀과 같은 형상이 되었다.
"하, 한윤정!"
내 부름에도 그녀는 지면을 헤집으며 땅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발터 둘 다 한윤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놓친다."
먼저 움직인 건 발터였다. 강하게 지면을 디딘 그의 몸이 미사일처럼 쏘아져 나갔다. 나는 그가 내달리는 방향으로 데바스타를 사용해 앞을 가로막고는 다리를 뻗었다.
다시 한번 발과 팔이 얽히며 굉음을 내뿜었다.
"크으."
발터는 뒤로 발자국을 쭈욱 그리며 밀려났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넌 좀 처맞아야겠다."
공중에서 발을 회수한 내 옆으로 네 개의 계기판 마법진들이 째깍거리며 움직였다. 전면에 대형 마법진이 펼쳐졌다.
'가라.'
<프로메테우스>
화아아악!
화염 거인의 몸뚱이가 발터의 몸을 덮쳤다. 그러나 발터가 두 팔을 세워 들자 거대한 질량이 투명한 막에 막힌 것처럼 멈춰섰다.
'…미친!'
부담스러운 기술인데 간단히 막혀버렸다. 마법 시전을 마치고 바닥에 착지하느라 집중력이 흩어진 사이, 한 박자 빠르게 발터의 팔이 연기를 뚫고 들이닥쳤다.
'빨라!'
나는 데바의 눈을 부릅뜨고 침착하게 왼손으로 쇄도하는 팔을 붙잡아내리며 오른 주먹을 내뻗었다.
퍼억
그런데 난데 없이 무릎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무릎이 꺾이며 밸런스가 무너졌고, 뭘 할 새도 없이 턱과 가슴에 2연타를 맞았다.
부웅!
세계가 360도 한 바퀴 회전하더니 등이 바닥에 떨어졌다. 발터가 내위로 올라타 거칠게 목을 잡아챘다.
"끄윽!"
완전히 당했다.
게다가 엄청난 아귀힘. 한 손으로 목을 붙잡혔을 뿐인데 숨을 쉴 수가 없다.
"어리석구나. 젊은 헌터."
두근!
시야가 흔들렸다.
두근!
생전 처음으로, 나는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내가 투명한 혼령의 형태로 떠올랐고 내 몸은 여전히 발터에게 목을 붙잡힌 채 있었다.
두근! 두근!
몸에 힘을 줘도 움직여지지 않는다. 거기에 영혼이 된 내가 발터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안돼!'
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단지 그것뿐.
그것만으로 혼이 된 내가 다시금 원래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흠."
발터는 예상했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강한 자아를 가졌구나."
번쩍!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번뜩였다.
발터는 뭔가를 예감한 듯 혀를 차며 물러섰고, 나 또한 몸을 굴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터어어어어엉!
거대한 빛의 십자가가 우리가 있던 자리에 펼쳐졌다.
"하하하하! 멈추십시오!"
연달아 십자가가 펼쳐지며 발터의 후속 움직임까지 봉쇄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하얀 옷을 남자들이 이곳을 포위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뉴스를 봐서 알고 있다.
한국에 왔다는 바로 그 바티칸의 '성기사단'이다.
"이단 아르민 발터, 거룩하신 분의 이름으로 그대를 심판하겠습니다."
성기사단의 리더, 마르첼로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르첼로를 본 발터는 묘한 낯으로 혀를 찼다.
"오랜만이군, 마르첼로. 지구 반대편까지 나를 잡으러 왔나."
"당연하지요. 당신을 심판하기 위해선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겁니다."
바로 그때.
"심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늘에서 석상들이 떨어진다.
폭격을 방불케 하는 질량 병기의 위력에 바닥이 지면째로 뒤집히고 흙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물론 중간에 낀 내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다급히 공중에 쉴드를 펼치고 뛰어올라 폭격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그건 내 사냥감이다, 벌레."
이집트에서 파견된 파라오, 메네스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뒤에는 수십 명의 '묘지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야?
"방해하면 네놈부터 죽인다."
"와. 그거 무섭네요."
한 차례 시선을 주고 받던 메네스와 마르첼로가 거의 동시에 아르민 발터를 향해 팔을 세웠다.
"잡아라."
"죽이세요."
흰 사제복의 무리오E 헐벗은 황금갑주의 헌터들이 일제히 전장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