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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95화 (95/337)

나 혼자만 마탑주 095화

"미, 미안한데 잠깐 지나갈게요! 잠시만……!"

웅성웅성!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도저히 못지나가겠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에아!'

-알겠습니다.

에아가 내 발아래에 리프 부츠 마법진을 그렸다. 나는 달라붙는 학생들을 위험하지 않게 살짝 떼어놓고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부웅! 북적거리는 인파를 한 번의 도약으로 뛰어넘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다.

"오오오오!"

"김유신 헌터님!"

……역효과다.

고개를 드니 한윤정은 아예 전력질주로 도망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뭔가 잘못했나? 아무리 그래도 왜 저렇게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거지?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나는 달리면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따라잡는 건 금방인…….

"어머나! 김유신 학생!"

그런데 코너를 도는 순간, 오연희 교수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교, 교수님!"

"아카데미에 왔으면 연락을 하지! 공인 헌터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죠? 어머, 일부러 내 수업을 들어주러온 건가요? 오호호! 고맙네요."

"아, 아니 교수님 그게 아니라……."

나는 눈동자를 움직여 교수 너머를 바라보았다. 망했다. 한윤정은 벌써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자, 자, 들어가죠! 안 그래도 요즘 김유식 학…… 아니, 김유신 헌터의 시범이 없으니까 괜히 수업이 썰렁하던 참이었거든요. 온 김에 후배들에게 좋은 이야기도 좀 해주고."

"하하…."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던 강의까지 하고 나와야 했다.

* * *

-저쪽입니다. 탑주!

"오케이."

오연희 교수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한윤정의 마력을 탐지하고 움직였다.

빠르게 리프부츠를 밟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왔다.

-탑주. 여깁니다.

기척을 죽인 나는 슬쩍 벽에 등을 붙이고 고개만 움직여 바깥의 광경을 살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건물 뒤 공터.

그곳에서 한윤정은 홀로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켜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러 안 본 건가?'

나는 새로운 메시지를 입력했다.

-지금 어디냐니까? 이야기 좀 하자.

그녀의 스마트폰에 '띠로롱'하고 알림이 울렸다. 도시락을 먹던 그녀가 얼른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곤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스마트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여간.

"안녕."

"꺄아아아아아악!"

한윤정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무릎 위에 올려둔 도시락이 떨어져서 반찬이 조금 치마에 흘렸다.

"에이 씨! 놀랬잖아!"

"그러게 왜 톡을 씹냐?"

나는 도시락 포장 봉투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 있던 손 닦을 때 쓰는 물티슈를 뒤집어서 깨끗한 면으로 펼쳤다.

"봐. 어디 묻었어?"

"내놔!"

탁!

내 손에서 물티슈를 잡아챈 그녀는 씩씩거리며 치마에 묻은 양념을 닦아냈다. 난 피식 웃으며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기서 궁상맞게 혼자 뭐하냐?"

"……남이야 뭘 하든 말든."

나는 몰래 그녀의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 한윤정.

고유 능력 : 좌표 추적.

개인 특성 : [정밀계산 Lv.3] [수집가 Lv.1] [집요함 Lv.1]

기본 능력치 : [마력 18] [체력12] [순발 7] [근력 5]

특수 능력치 : [인내 15] [지능 7]

능력치 총합 : [64]

졸업하기 전에, 나는 비전투계 능력자들도 사냥터에 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고 갔다. 하지만 한윤정이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한영이랑 은오. 둘 다 3학년 못 올라오고 성적 부족 누락으로 퇴학당했어."

박한영. 최은오. 두 사람 다 우리랑 같이 들어온 비전투계 능력자들이다.

좋은 녀석들이었는데.

"너는 공인으로 올라가고, 다른 애들은 퇴학당했고…… 이제 남은 건 나뿐이네. 하하."

자조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느낄 수 있었다.

"1랭크 사냥터는 어때?"

"좋아."

그녀는 먼저 그렇게 말했다.

"……자리가 잘 안 나기는 하지만."

한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적어서 인구 밀도에 비해 사냥터가 적은 편이다. 아카데미 출장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냥권을 따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플레이어들의 능력치를 올리는 행위, 즉 '경험치 획득'은 단순 반복에 의한 효율이 최악이다.

같은 몬스터를 기계처럼 쓰러뜨려봐야 경험치 효율은 극히 떨어진다.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적을 상대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인스턴스 던전에 목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고.

플레이어들은 저랭크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진도를 밟아나간다. 대충 1랭크 몬스터들이 쉬울 정도가 되면, 2랭크 몬스터를 잡을 수준까지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비전투계 플레이어들은 그렇지 않다.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1랭크 몬스터를 한참은 더 잡아야 2랭크 몬스터를 사냥할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고유 능력이 성장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랭크가 높아질수록 이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3랭크 던전 졸업하고 4랭크 올라가 공인 시험 바라보는 데만 해도 수년은 더 걸린다.

그래서 비전투계들은 잘 해도 공인 5급 헌터가 한계라고들 한다.

'…….'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사실 나 또한 '그 절망감'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낸 건 아니다.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중, 우연히 새로운 길이 열려서 그쪽으로 갔을 뿐이다.

나는 이제 전력외도, 비전투계 능력자도 아니다. 더 이상 한윤정과 같은 '절망'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앞날에 대해 섣불리 훈수 둘 수도, 조언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돈 좀 빌려 줄까?"

나는 번외자로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비로 던전권 사서 남들보다 많이 돌면 될 거야. 3랭크 몬스터 잡을 때까지만 출혈 감수해. 3랭크부터는 파주에 좀비 사냥터 알지? 사실 내 소유거든. 거기서 4랭크 찍고 공인 시험 준비하면……"

"제안은 고맙지만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동정은 필요 없어."

동정이 아니다.

……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런데 이건, 무슨 감정일까.

울컥하는 뭔가가 가슴을 치고 올라온다.

"야. 한윤정."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럼 반대로 물을게. 동정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냐?"

"……."

"나도 비전투계였어. 네 어려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을 뿐이야. 헌터가 되고 싶다며? 졸업도 간당간당 한 주제에 네가 지금 앞뒤 가릴때야?"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등을 돌리며 대꾸했다.

"말 다 했지? 간다."

그녀는 그대로 내게 등을 보인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일어나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가 내팔을 강하게 쳐냈지만, 가녀린 팔은 헌터가 된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튕겨 나올 뿐이었다.

"……."

"……."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때 같은 길을 걸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부탁이니 놔 주시겠어요? 김유신 헌터님."

경멸이 실린 경어로, 그녀가 말했다.

"헌터님이 절 동정하는 건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도움을 강요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요."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 * *

그녀와의 만남 이후, 나는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탑에 돌아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왔던가? 택시를 타고 왔던가? 그것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바보같이 내가 왜 아카데미까지 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탑에 돌아온 뒤에야 '아 졸업장.' 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미 늦었다.

"응?"

1층에서 포션을 만들고 있던 진보라가 기웃기웃 내게 다가왔다. 앞치마에 묶음 머리를 하고 있었다.

"선배님. 왜 이렇게 죽을상이에요?"

"원래 이랬어."

그녀는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흐으응, 이번엔 뭐 때문에 과몰입 모드이신 걸까."

"야……."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카데미 다녀오신다고 했구나!"

나도 모르게 뜨끔한 표정이 나왔다.

"아카데미에서 무슨 일 있었죠? 그쵸?"

어느새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착석한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

"뭔가 고민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 이래 봬도 저 이제 학교에서 영향력 꽤 세다구요!"

곤란하네.

……뭐, 솔직히 혼자서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올 것 같고. 적어도 인간관계 문제에 대해선 그녀가 나보다 훨씬 우월하지 않을까.

속는 셈 치고 한번 말해보기로 했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한테 들은 이야긴데."

나는 그런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진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이랑 윤정 언니 이야기네요."

"푸흡!"

냉수를 들이켜던 내가 컥컥거리며 입가를 닦았다.

"……나는 그렇다 쳐도, 한윤정인건 어떻게 알았어?"

"유명하니까 알죠."

"윤정이가 유명해?"

진보라가 손가락을 착 세워 보였다.

"기억 안 나세요? 선배님 아카데미 다니실 때 이슈메이커였잖아요. 폭풍의 전학생 김유신! 그거 그거 여자애들이 가만 놔두겠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살랑 살랑 흔들었다.

"일단 김유신에 대해서 수다를 떨다 보면 자연스레 애인은 있나 없나 하는 화제로 넘어가겠죠? 거기서 소문에 살이 붙는 거예요. 김유신의 애인 후보는 누가 있을까? 여러 사람들이 후보에 오르는 가운데, 당연히 그동안 계속 같이 다니던 윤정 언니도 유력 후보에 등극하면서 여자애들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예요. 이건 정말 당연한 수순이라고요."

……한윤정이 내 여자 친구 후보?

그래. 그게 그렇게 될 수도 있구나.

어쩐지 그 녀석, 계속 나를 피하던 이유가 부담스럽고 오해받기 싫어서 그랬던 건가?

"아, 물론! 윤정 언니가 선배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건 다른 이유겠죠."

"다른 이유? 뭔데?"

"돌직구로 갈까요? 변화구로 갈까요?"

진보라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어쩐지 긴장감이 몰려온다. 뭔가 여기서 대답을 잘 해야 할 것 같은데.

"돌직구."

"흐응, 그래요. 그럼……"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며 등을 돌렸다.

"인간의 프라이드라는 건, 상대성이 있어요. 상사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는 사람이라도,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는 굳건한 가장이 되고자 하는 것처럼요. 윤정 언니도 비슷한 거예요."

"……음?"

"모르시겠어요? 윤정 언니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님 앞에선 프라이드를 내세우고 싶은 거 예요."

"그게 뭔 소리야! 걔가 무슨 이유로?"

진보라는 그대로 돌아선 채로 걸어갔다. 그러곤 뒤를 한번 살짝 돌아보더니 손을 이마에 착 올렸다.

"포션조제관 진보라! 일하러 갑니다! 오늘 물량 많아요!"

그러곤 포션 조제실로 도망쳐 버리는 그녀였다.

……알려 줄 거면 다 알려 줄 것이지.

나는 한숨을 쉬며 소파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댔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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