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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85화 (85/337)

나 혼자만 마탑주 085화

진보라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처음 눈을 뜨며 본 것은 자신의 두 다리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팔다리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헝겊이 물려 있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주위를 살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게 오래된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지만, 여기가 어디쯤 있는 곳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시시덕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나, 납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공포에 질린 진보라는 필사적으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했다.

분명히 더미 공장으로 출근하던 중이었다. 한 아저씨가 차를 멈추고 길을 묻길래 가르쳐 줬는데 갑자기 무언가에 입이 틀어막혔고, 그 후엔 정신을 잃었다.

"오, 아가씨. 이제 일어났어?"

그녀가 깨어나자 남자들이 다가왔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상황,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이구, 많이 놀랐어? 괜찮아, 괜찮아."

길을 물어봤던 바로 그 중년 남자가 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접촉조차 너무 소름 끼치고 싫어서 진보라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애가 뭐 이리 예쁘장허냐. 헌터가 아니라 뭐 모델 같은 거 잡아 온거 아녀?"

"아카데미 학생이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놀아도 돼요?"

"아서라. 인질이다. 그리고 여기 던전 아니야. 흔적이 남는다고."

"우웁! 우브틉!"

진보라가 의자를 흔들며 날뛰자 중년 남자가 히죽 웃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꾸우우욱.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에 진보라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음, 그래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어야 착한 아이지."

진보라가 조용해지자 남자는 반대쪽 손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사실 아저씨도 딱 아가씨 나이쯤되는 딸이 하나 있거든. 그래서 더 안타까워. 우리 말만 잘 들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제발."

입에 물린 헝겊이 느슨해지자 진보라가 애원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아가씨 잘못은 아니야. 문제가 있다면 아가씨의 보스 쪽이겠지."

그 말에 진보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배님은 지금 어디…… 우읍!"

남자는 느슨해진 헝겊을 다시 강하게 묶었다.

"아저씨 이야기하는데 다른 남자 이야기하는 거 아니야."

"하하하! 저 양반 또 시작이다."

"개 또라이라니까 진짜."

바로 그때,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서는 힐러연합의 총수 오봉규도 있었다. 모두가 그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인질 건들지 말라니까."

오봉규가 눈치를 주자 중년 남성은 얼른 진보라의 허벅지에서 손을 떼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리고 양 팀장은 딱 저만한 딸내미도 키우잖아."

"그러니까 더 흥분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미친 놈."

깔깔깔깔!

사방에서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

진보라는 치가 떨렸다. 지금 사람을 붙잡아 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잠시 그들의 신경이 다른 곳으로 쏠린 사이 몰래 손을 움직여 보였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서 아공간을 만들 수도 없었다.

후우우우웅!

그녀의 얼굴 옆으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진보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자 뒤편에 금이 간 벽에서 후두둑 잔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게."

오봉규가 주먹 쥔 손을 내리며 말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진보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나는 마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앞서 진보라를 찾고 있던 정서진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보라 씨의 흔적은 연구 재단으로 가는 길목에 끊어져 있었습니다."

"출근은 제때 했다는 소리네."

"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잘못이야. 여지를 주지 말고 바로 끝냈어야 했는데."

"이건 탑주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휴대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에도 역시 발신자 표시 제한이었다.

-네 직원은 우리가 데리고 있다.

빠득.

나는 이를 갈며 메시지를 내려보았다.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요구사항을 늘어놓고 있었다.

첫째, 연합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삭제할 것.

둘째, 해당 사항을 경찰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

셋째, 알케미아의 김유신이 포션 능력자를 데리고 오늘 17시까지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도착할 것.

이 중 하나라도 어길 시 인질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GPS 탐색 완료. 북인천 근방의 물류단지로 사료됩니다 탑주.

시키지 않아도 빠르게 위치를 검색한 에아가 내게 보고 했다.

-잦은 몬스터 출현으로 개발이 중지된 지역입니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탑주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의심됩니다.

에아가 알아낸 정보를 정서진에게 알려주었다.

"우릴 유도하고 있군요."

정서진도 그녀와 같은 의견을 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녀석들의 의도가 뭐라고 생각해?"

"일차적으로는 연합의 폐단을 알고 있는 우리의 입을 막으려는 거겠죠."

"포션 능력자를 데리고 오라는 이유는?"

"약점을 잡기 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

정서진이 척척 대답했다.

"첫 번째 조건이 연합에 대한 모든 자료를 삭제하라는 거였지만, 저쪽에서 정말로 우리가 모든 자료를 삭제했는지 확신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목숨줄을 쥐어서 입을 틀어막는 게 차선이란 거네."

"예. 베일에 싸여 있는 포션 능력자의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알케미아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힐러연합이라면 그 선에서 끝나지 않겠지.

"하지만 당장은 놈들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어. 보라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내 지침에 정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같이 갈 힐러 능력자는 누구로……"

"당연히 너지."

정서진이 움찔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가람 매니지먼트로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님. 접니다. 상의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요."

움직일 때 움직이더라도, 최소한의 보험은 들어놔야겠다.

* * *

얼마나 이곳에 오래 갇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랫동안 밧줄에 묶여 있어서 그런지 팔이나 다리도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떨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회장이라고 불렀던 오봉규가 다녀간 뒤, 남자들은 세 명에서 네 명 정도 로테이션으로 이곳을 지켰다.

그들은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소파에 앉아 스크린으로 야구 중계를 틀어놓거나, 중국 음식을 시켜 먹는 등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물론 진보라에게도 음식이 주어졌지만 그녀는 식사를 거부했다.

나중엔 대놓고 에로 비디오를 틀어놓고 낄낄거리다가, 진보라 쪽을 힐끔힐끔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이런 수모와 더러운 성희롱을 견뎌내는 건 그녀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역겨운 쓰레기들이 힐러라니, 믿을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나며 공포가 한결 가시자,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 차올랐다.

당장에라도 그들의 얼굴을 걷어차주고 싶었지만 의자에 묶여 있는 지금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훔쳐 들어보니 그들의 목표는 아무래도 유신인 것 같았다.

자신을 납치해서 유신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할 것이다. 어쩌면 보복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분했다. 도움이 되기는 커녕, 이렇게 붙잡혀서 민폐나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분했다.

"어이구, 우리 보라 씨. 아직도 밥 안 먹었어?"

그리고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인간은 진심으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 중년 남자는 감시 구성원이 다른 사람들로 바뀌어도 계속 이곳에 남아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거 아저씨가 도시락 전문점에서 사 온 거야. 요즘 애들은 뭐 좋아하는지 몰라서 직원한테 추천해 달랬는데 치킨마요 도시락이 제일 잘 나간다더라고. 진짜 안 먹을 거야? 아, 팔 묶여 있어서 그래? 말을 하지. 아저씨가 먹여줄까?"

팍!

진보라는 도시락을 발로 차서 엎었다.

"아가리에서 냄새나니까 작작 좀 씨불여."

"……."

"꼽냐? 야, 이거 풀어. 한판 뜨자."

스크린으로 축구 경기를 보던 남자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낄낄거렸다.

"왜, 명색이 프로 헌터가 자신 없냐?"

남자의 인상이 싸늘해졌다가 다시 빙그레 웃음 지었다.

"씨알도 안 먹힐 도발은 좋지 않아. 보라 씨. 그래도 그 표정 아주 흥분되는데. 그래, 그래, 좀 더 도발해 봐."

진보라가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정확히 남자의 콧잔등에 묻어서 주르륵 뺨을 타고 흘렀다. 무너져 버린 남자의 표정을 보며, 진보라는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됐냐 찐따야?"

"……."

남자가 히죽 웃으며 혓바닥으로 뺨을 핥았다.

"아아주우 좋아아."

그가 손바닥을 확 펼치고 다가가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인질에 손대지 말라고 했잖나."

힐러연합 회장, 오봉규였다.

"…… 어차피 여흥으로 즐길 거 아닙니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결국, 중년 남자 쪽이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갔다. 진보라는 속으로 안도하며 오봉규를 노려봤다.

"……이제 그만해요. 사람 감금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기나 해요?"

"암, 잘 알지."

오봉규가 뚜벅뚜벅 그녀의 주위를 걸었다.

"적어도 자네보다는 내가 더 잘 안다고 보증하네. 많이 해본 사람이 더 잘 알지 않겠나?"

섬뜩한 느낌이 진보라의 등을 타고 흘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이 풍기는 공포에는 좀 처럼 적응할 수 없었다.

눈빛부터가 사이코패스의 그것이었다.

"인간은 이런 상황이 닥치면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네. 울고불고 사정하는 사람, 악에 받쳐서 반항하는 사람, 동정심으로 호소하거나 미래를 예감하고 체념하는 사람도 있지."

"……당신."

"하지만 마지막엔 다들 똑같더군."

고개를 쭉 내민 오봉규가 속삭이듯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죽여달라고.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한다네."

"……!"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지."

오봉규는 그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스크린으로 걸어갔다.

"준비는?"

"다 됐습니다. 회장님."

"켜보게."

스크린 채널이 CCTV의 화면으로 바뀌었다.

그곳 또한 커다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중앙의 큰 화면에는 세 사람의 힐러연합 헌터가 무전기를 들고 완전 무장상태로 서 있었고, 다른 곳곳에도 사람들이 숨어서 대기하고 있었다.

"김유신은?"

"이제 오고 있습니다."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진보라는 입을 크게 벌렸다. 선배님이 온다고?

"외부 화면을 띄우겠습니다."

조직원이 리모컨을 조작하자 공터쪽의 CCTV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한 차량이 공터로 들어와 멈춰섰고 두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모자와 후드티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쓴 모습이었다.

진보라는 체형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김유신과 정서진이다.

오봉규가 무전을 했다.

"타깃인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똑바로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교활한 놈이야.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잘 대처하게."

진보라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화면에 나오는 장소가 자신이 잡혀 있는 이곳은 아닌 것 같았다.

'……제발, 제발 선배님! 함정이에요!'

그녀가 속으로 애타게 빌었지만 두 남자는 결국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문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타깃이 도착했습니다.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던 오봉규가 무전기를 들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얼굴을 보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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