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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82화 (82/337)

나 혼자만 마탑주 082화

태평하게 대꾸한 나는 손뼉을 짝짝 쳤다.

"그럼 갤러리분은 이만 퇴장해 주시고."

"……."

힐러는 오봉규의 눈치를 힐긋 살폈다. 오봉규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원하는 걸 말해."

오봉규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나는 손가락을 펼쳤다.

"첫째. 저 친구가 피해자에게 잘못을 사과하도록 하고 훔쳐온 유물도 돌려주게 하십시오."

"물론 그렇게 하겠네."

"둘째. 알케미아에 대한 모든 정치적 공세를 중지하고 우리에게 했던 만행을 대중 앞에서 발표하십시오. 그 뒤에 정당한 검찰 수사도 받으세요."

오봉규의 얼굴이 경악과 분노로 물들었다.

"지금 우리 보고 죽으란 소린가!"

"그게 싫다면 제가 가진 모든 자료들이 언론사에 뿌려지겠죠. 불붙은 곳간에 기름통이 떨어지는 격일 겁니다. 여론 때문에 검찰은 물론, 집행부까지 움직이게 될 지도 모르죠."

집행부라는 말에 오봉규도 멈칫했다.

헌터계에서 초법적인 권한을 가진자들. 현장에서는 살인까지 허가받은 이들이다. 그들이 관여하면 정말로 힐러연합의 뿌리가 뽑힐지도 몰랐다.

"회장님.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 예전처럼 조직을 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는 다시 한방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달았지만, 이번에는 입맛에 맞았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바닥에 엉덩이 딱 붙이고, 여론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제발 생각을 바꾸세요. 이제 힐러연합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나는 그의 표정을 감상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USB를 회수했다.

"오래는 못 기다려드립니다. 길어도 사흘."

USB를 주머니에 넣고, 문을 나서며 말했다.

"제 자료들이 TV에 나오는 순간이 타임 오버라고 생각하세요."

* * *

살았다.

뒤늦은 안도감이 밀려든다.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고 덤벼들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생각없는 놈들은 아니었다. 나는 휴대폰을 돌려받고 무사히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후우우."

힐러연합의 건물을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을 쉰 나는 기다리고 있는 정서진의 차량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음마다 짜릿함이 몰려 들었다.

* * *

정서진은 중간에 일이 있어서 헤어졌고, 나 혼자 마탑으로 돌아왔다.

진보라와 에아가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 어머. 오셨어요? 선배님."

나는 진보라의 당황한 표정을 캐치했다.

"뭘 그렇게 들킨 표정을 하고 있어?"

"……아하하!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네요."

진보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의 재료를 보여 주였다. 인덕션 전기레인지에, 냄비에, 소고기에, 각종 채소와 버섯까지.

"어? 이거 소고기 전골 재료네."

"정답! 맨날 편의점 음식이나 배달음식 시켜 먹는 거 질리지 않아요? 오늘은 제가 몸보신 제대로 시켜드릴게요!"

그녀가 소고기 팩을 뺨에 대며 눈을 찡긋했다. 이제 저런 귀여운 척에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나는 덤덤히 재료들을 뒤적거렸다.

아, 젠장. 깻잎도 있다.

"요리는 누가 하는 거야?"

"물론 저죠!"

"저 또한 주방 보조로서 돕기로 했습니다. 탑주."

……우리 식구 여자들은 영 못 미더운데.

내 표정을 감지한 진보라가 입을 삐쭉거렸다.

"이거 집에서 몇 번 연습해왔거든요! 진짜 자신 있어요!"

"그, 그래. 기대할게."

바로 요리가 시작됐다. 진보라는 인덕션 전원을 켜고 냄비 위에 멸치육수를 끓였다. 다시마에 건새우에 황태포까지 들어갔다. 요즘은 저렇게 육수 내는 재료도 세트로 파는 모양이다.

냄비에서 육수가 끓는 동안 에아는 채소를 썰었고 진보라는 소고기 팩을 뜯었다.

비닐포장이 벗겨지며 완연한 선홍빛의 샤브샤브용 소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 조명의 빛이 반사되어 번들번들하고 반짝이는 모습이 무척 먹음직스러웠다.

아, 꼭 요리해야 해? 그냥 저 고기만 프라이팬에 구워 먹고 싶다.

"선배님. 방금 그냥 고기만 구워먹고 싶다고 생각하셨죠?"

"……너 요즘 에아랑 같이 놀더니 독심술 익혔냐."

"으으, 두고 봐요 진짜!"

진보라는 투덜거리며 간이 도마를 세팅했다. 그리고 배춧잎과 깻잎을 왕창 가져와 옆에 쌓아 놓았다.

"원래 전골에 배춧잎이 이렇게 많이 들어가?"

"밀푀유나베 만들 거거든요."

"밀폐…… 뭐?"

"모르시면 그냥 봐요!"

그녀는 우선 도마 위에 넓은 배춧잎을 깔았다. 그 위에 깻잎을 올리고 샤브샤브용 소고기를 올렸다.

"선배님. 소고기 두 장? 세 장?"

"세 장 세 장."

어느새 나도 모르게 요리에 몰입하고 있었다. 진보라는 내 말대로 소고기 세 장을 예쁘게 겹쳐 깐 다음 그 위에 다시 차례대로 배추, 깻잎, 소고기, 배추를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아. 이 요리 알아! 이게 밀폐용나베구나!"

"밀푀유나베요."

주방칼을 든 그녀는 배추와 깻잎과 소고기의 층을 알맞게 등분하여 썰었다. 이어서 같은 작업을 몇 번 반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에서 놓치지 않으며 전화를 걸었다.

"서진아. 너 언제 탑에 오냐?"

-지금 알케미아 사무실에 잠시 들렸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보라가 전골 만들고 있는데 올래?"

-명복을 빕니다. 탑주님.

또 어떻게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진보라가 '넌 와도 국물도 없을 줄 알아!' 하고 빼액 소리 질렀다.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에아가 주방 보조인데?"

우당탕!

잠시 책 같은 것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갑니다.

뚝.

통화가 끊겼다. 나는 쓰게 웃으며 진보라의 눈치를 봤다.

"씨잉! 진짜 아. 내가 서러워서 요리학원 등록한다."

진보라는 투덜대면서 에아가 잘게 썰어준 채소들을 냄비 바닥에 깔았다. 그다음 썰어둔 밀푀유를 냄비 바깥쪽부터 차곡차곡 세워서 채워넣기 시작했다.

배추의 흰색, 깻잎의 녹색, 소고기의 적색까지. 색깔 조화가 상당히 아름답다. 어느새 가운데만 남기고 빈틈없이 밀푀유들이 들어찬 모습은, 냄비 안에 꽃잎이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비워둔 가운데 공간에는 쑥갓과 별 모양으로 모양을 낸 표고버섯을 꽂아서 마무리했다.

"오오, 외견은 진짜 그럴듯하다."

"그쵸! 그쵸!"

정신없이 스마트폰 셔터를 터뜨리던 진보라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맛도 보장해요! 실패하기 힘든 조합이거든요."

이제 육수만 부어서 끓이면 완성이라고 한다. 에아는 3층에서 골렘 제작에 몰두하고 있을 은솔을 부르러 갔다.

"소꼬기!"

밥 먹자는 소리에 은솔이 신이 나서 달려왔고 잠시 후 정서진까지 마탑에 들어왔다.

"허억! 허억! 느, 늦었습니까?"

"……진짜 빨리 왔네. 헬기라도 타고 왔냐?"

"지각했으면 빨리 접시 세팅이나 도와요!"

테이블에 접시와 식기를 놓고 모두가 둘러앉았다. 중앙에는 전기레인지를 놓고 그 위에 밀푀유나베가 든냄비를 놓았다.

"우와아아!"

"흠."

은솔과 정서진 모두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에 놀란 반응이었다. 진보라가 멸치 다시마 육수를 가져와서 냄비 위에 자작하게 붓자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곧 냄비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양배추 사이에 끼어 있던 선홍빛 소고기도 점점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변해갔다.

"좋아요! 그럼……"

진보라가 국자로 육수 맛을 보더니 말했다.

"오케이! 드세요!"

"와아아아!"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모두가 밀푀유를 하나씩 접시로 가져왔다. 에아가 구글 레시피를 보고 만든 간장 소스에 배춧잎을 살짝 찍어서 한입 베어 물으니 세상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인정한다. 보라야. 요리 까방권 3개월 줄게."

"헤헤! 겨우 3개월이에요? 시원하게 3년은 주시죠!"

진보라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뭔가 좀 변한 것 같다?"

"네? 뭐가요? 요리 실력요?"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서진은 밀푀유도 밀푀유지만 냄비 바닥의 숙주나물과 버섯을 집중공략하고 있었다. 에아가 채소 담당인 건 어떻게 또 귀신같이 알았는지 모르겠네.

"밀푀유는 프랑스어로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입니다. 여러 겹의 파이 사이에 크림, 잼, 과일 등을 넣어만든 간식을 뜻하죠. 그리고 일본어의 전골을 뜻하는 나베가 합쳐져 밀푀유나베. 퓨전 일식 요리의 일종입니다."

밥 먹으면서도 아무도 묻지 않은 설명을 줄줄 늘어놓는 정서진이었다. 물론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듣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열심히 먹고 있는 은솔의 두 볼은 도토리를 머금은 다람쥐처럼 탱탱해져서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전골을 끓이면 끓일수록 소고기 기름이 둥둥 흘러나와 육수의 맛이 더 고소해졌다.

그렇게 밀푀유가 순식간에 동이 나자, 진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료를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가져왔다.

"짜안! 칼국수 사리가 왔습니다!"

어우야.

이 친구가 뭘 좀 아네.

진심으로 밀려드는 감동에 나는 콧잔등을 눌렀다.

"까방권 1년으로 연장해 줄게."

"오호호호! 고마워요!"

진하고 고소한 전골 국물에 칼국수까지 넣어 끓였다.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며 면이 탱글탱글하게 익자 모두가 전투적으로 달려들어 면발을 흡입했다.

역시 식사의 마무리는 칼국수 아니면 볶음밥이지.

간만에 식사다운 식사였다. 우리는 숙주나물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냄비를 싹 비웠다.

디저트는 마트에서 사온 딸기였다.

"마시썽. 음냐음냐."

은솔은 밥 먹다가 몽환경이 왔는지 졸기 시작했다. 원격 조종 능력이 극한으로 발휘되어 허공에 딸기를 띄워서 자기 입으로 옮기는 모습은 대단했다.

나와 정서진은 딸기를 먹으며 힐러연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흘이나 시간을 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응. 그거 그냥 해본 소리야.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쯤 바로 뿌리려고."

"그렇군요."

"또 두 분이서 무슨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어요?"

진보라가 두 번째 디저트로 바나나를 잘라서 초콜릿 헤이즐넛 스프레드를 발라 가져왔다.

"별거 아니야. 아, 그리고 힐러연합문제는 이제 해결됐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다행이네요! 밥 먹고 이제 뭐 하실 거예요?"

"4층 시련 도전해 봐야지."

"어머, 또요? 몸 상하겠어요. 천천히 해요."

나는 그저 웃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이번 힐러연합 사태도 그렇고, 뭔가 일을 벌일 때마다 곳곳에서 테클이 많이 들어온다. 마탑을 지키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리고 예정된 재앙을 막기 위해서라도.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진보라는 하품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아카데미에 등교하기 전, 이른 아침에 더미 공장에 들러서 완성된 포션을 옮기는 일은 그녀의 하루 첫일정이 되었다.

"흥. 흐응.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연구 부지를 향해 걷던 그녀는 관계자 통행증 목걸이를 꺼내서 목에 걸었다. 그러곤 스마트폰을 켜 SNS에 접속했다.

이번에 포스팅한 밀푀유나베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녀는 일일이 댓글을 확인하며 답글을 달아주었다.

-보라 씨 요즘 포스팅 업뎃이 더디네요. 예전에는 하루에 5개꼴로 올라왔는데. 요즘 무슨 일 있어요?

그러고 보니 거의 4일 만에 포스팅을 올린 것이었다. 진보라는 빙그레 웃으며 답글을 달았다.

-죄송해요. 요즘 바빠서요.

진보라는 스마트폰을 끄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때 그녀에게 일상이란 SNS에 올릴 자료를 찾는 탐색행위에 불과했다.

맛집에 찾아 가서 사진을 찍고, 예쁜 디저트를 먹고, 행복한 척 즐거운 척 잘 나가는 척 그런 포스팅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들어서 올렸다.

그리고 그 사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 때, 비로소 기쁨을 느꼈다.

내가 행복한 것 보다, 내가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는 게 더 중요했다.

하지만 요즘은 왠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외롭지 않았다. SNS에 의존하지 않고 하루하루에 충실할 수 있었다.

"아. 잠시 길 좀 물을게요, 아가씨."

그녀의 옆으로 차 한 대가 속도를 낮추며 멈춰섰다. 차창이 내려가며 50대의 중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네! 어디로 가시나요?"

"중례 시장으로 가려고 하는데 여기서 가까워요? 내비게이션에도 안찍혀서."

"아, 중례 시장이요? 일단 여기서 우회전으로 꺾으셔서……"

'……!'

덥석!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진보라는 화들짝 놀라며 눈동자를 굴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웁! 웁!"

"응? 왜 그래요 아가씨?"

"우웁! 웁웁!"

진보라가 팔을 휘저으며 절실히 도움을 요청했지만 순박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한은 없지만. 미안하게 됐어."

그녀의 몸이 허공에 녹아들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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