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79화
힐러연합의 선전포고라.
"근데 이것들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지 않냐? 우리는 이제 2호점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잖아. 아직 포션의 보급률도 낮고."
내 말에 정서진이 대답했다.
"자기들의 메시지를 무시했다는 거겠죠. 혹시나 해서 유닉스의 상황도 조사해 봤지만 그들이 배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흐으음."
아직 포션 사업은 시작에 불과한데 큰 암초와 맞닥뜨렸다. 이번에는 힐러 연합이라.
"어, 어떻게 하죠? 선배님."
"탑주.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이 올 것으로 사료됩니다."
고민이 됐다.
저번 칼람 때처럼 갑자기 길드가 사라져 버리는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그리고 칼람과는 달리 이것들은 양지에서 활동한다. 위험한 짓은 섣불리 하진 않겠지만, 언론을 이용한 공격이 우리에겐 더 위협적이다.
'그래, 결정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서진아."
"네, 탑주님."
"힐러연합에 논란을 일으킬 소스들, 가능한 만큼 모아줘. 대표님한테 물어보니까 이것들도 성대하게 저지르고 다니는 것 같던데."
"전면전으로 가시려는 거군요."
"그래. 솔직한 본심을 털어놓자면."
나는 소파에 앉아 깍지를 꼈다.
"포션이 나온 이상, 하위 힐러들은 이제 구시대 유물에 불과해. 시대에 뒤떨어진 것들은 지금 몰락시키나 나중에 자멸하거나 매한가지니까. 제대로 한번 작업해 보자."
내 얼굴을 본 진보라가 살포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왜?"
"표정이 악당 같아요. 선배님."
* * *
우리는 꼬박 이틀 내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힐러연합에 대한 자료들을 조사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편의점 초코바를 한입 깨물었다.
"이것 좀 보세요 선배님!"
진보라가 내 쪽으로 노트북 화면을 돌리며 말했다.
"막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겠는데요? 연합에 대한 악소문들이 이렇게나 많아요!"
"그러니까 문제야."
내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어중간한 건으로 터뜨리면, 대중들은 그냥 '힐러연합이 힐러연합했다.'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가능성이 농후하거든. 치명적이고 선을 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줄 수 있는 건이 필요해."
"……아, 그렇겠네요."
어이가 없긴 하다. 워낙 이미지가 바닥이라서 어중간한 갑질 프레임으로는 약발도 안 먹히는 케이스라니.
헌터계 언론에서 힐러연합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도 아마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이미 몇 차례 물어뜯어 보긴 했는데, 힐러연합을 적으로 돌리는 리스크에 비해 별 이슈화가 안 된 모양이다.
조폭이 시장 상인에게 살해 협박을 했느니, 도주하던 조폭이 경찰에 검거됐느니 이런 기사들의 조회수는 그리 높지 않다.
왜냐고? 조폭이 쓰레기 짓을 하는 건 당연하니까. 유명 연예인들은 식당에서 입 닦을 때 휴지 두 장 썼다는 거로도 논란이 되는데 말이다.
지금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다. 연합 힐러들의 더럽고 거만한 이미지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누가 힐러연합 쓰레기인 거 모르냐.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데리고 쓰는 거지.
이게 대충 플레이어 커뮤니티의 반응이다. 괜히 잘못 건드려서 힐러들에게 찍혀 헌터 생활 꼬일 바에는 그냥 똥 밟았다 치는 게 낫다는 것이다.
게다가 힐러연합은 힐러들이 뭉쳤다는 사실만으로도 눈에 보이는 확실한 권력을 쥔 셈이다.
나라나 협회에서 제재를 가하면 더러워서 국적을 바꾼다느니 뭐니 오히려 역으로 성내는 것들이다.
잘못 건드리면 전 힐러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다. 그들을 공식으로 비난할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탑주님."
정서진을 전화를 끊고 나를 불렀다.
"힐러연합 피해자의 직접적인 진술과 기록까지 확보했습니다."
"수위는?"
"극상입니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었다.
"잘 했어. 일단 한번 만나보자."
* * *
-네, 고객님. 알케미아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확인된 바 없는 루머는…
-서비스 이용에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고객님. 상품을 구매하신 ID 와 전화번호를 남겨주시면…… 아니, 욕은 왜 해요!
나는 알케미아 사무실에 와 있다.
전화는 불타고 있었고 10명밖에 없는 사무실 인원 중 5명이 고객센터 전화연결로 씨름하고 있었다.
"이거 면목 없네요."
나는 쓰게 웃으며 팀장을 보았다.
"여러분을 부르자마자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요."
"아, 아닙니다 대표님! 불러주신 것만으로 감사…… 안녕하세요. 고객님! 알케미아 서비스 센터입니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우리는 정신없는 사무실을 떠나 조용한 접대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김유신입니다."
"유창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사를 주고 받고 자리에 앉았다. 정서진이 커피를 타왔고,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유창식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유창식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가면허 플레이어이자, 팀 '원프라이드'를 이끄는 파티장이었다.
유창식과 그의 파티원들은 함께 많은 던전을 공략하며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시간만큼 탄탄한 팀워크를 발휘했고 업계에서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아 길드의 일거리를 대신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현장 근처에서 우연히 새로운 던전을 찾아 내 ' 최초 발견자' 권리를 따냈다.
던전명 바실리스크 소굴. 4랭크 일반 던전 중에서도 가치가 최상급인 곳이었다.
헌터 협회에 따르면 중독 능력을 가진 몬스터들이 다수 있어 반드시 힐러 능력자를 대동하라는 지침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힐러 인맥은 없었다. 결국, 힐러연합에 손을 빌려야 하는데 소문이 나쁜 곳이라 망설여졌다.
여기서 파티원들 간의 의견이 갈렸다. 이 던전의 권리를 팔고 돈만 챙길지, 아니면 어떻게든 힐러 용병을 구해서 직접 던전에 도전할지.
-형. 우리 계속 필드 던전만 다니면서 근근이 먹고 살 순 없잖아요. 이건 우리 파티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예요!
-은수는 다음 달에 결혼하고, 천영이는 올해 5급 시험도 치르잖아. 우리도 이제 좀 직접적인 성과를 내야 할 때야.
결국 바실리스크 소굴은 '원프라이드'가 직접 공략하기로 했다. 그리고 힐러연합에 연락해 힐러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힐러는 다른 파티원의 두 배가 넘는 마정석 수입 비율과 각종 디테일한 우대사항 요구했고, 연합에도 별도의 소개비를 내야 했다.
용병인 힐러에게 너무나도 유리한 조건이 맞춰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힐러까지 포함한 원프라이드 멤버 모두가 던전에 들어갔다.
바실리스크 소굴은 대박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던전이었다. 바실리스크 가죽은 값비싼 부산물이었고, 능력치가 오르는 양도 필드던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이번 사냥으로 파티원 두 명이 올스탯 200을 훌쩍 넘어갔다. 이제 당당히 공인 5급 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더욱 일치단결하여 3일간의 강행군 끝에 보스 몬스터, '로드 바실리스크'를 쓰러뜨렸다.
'이럴 수가……!'
'유물이야!'
무엇보다 대박인 것은, 로드 바실리스크가 지키고 있는 고대 유적에서 이계의 '유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무려 마나 쉴드를 켤 수 있는 방패 아이템. 그리고 포지션 분배 룰에 따라 유창식이 가질 차례였다.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유창식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유물 보유자' 타이틀은 고유 능력에 강점이 없는 플레이어들이 가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루팅이 포지션 룰이었다고? 나는 들은 적 없는데?'
연합의 힐러가 본색을 드러냈다.
참고 또 참았던 유창식도 이번에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공짜로 던전에 들어와서 좋은 조건이랑 대우는 다 받아놓고 이젠 유물까지 차지하겠다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형! 안돼요!'
'말려!'
유창식은 반발했지만 힐러는 던전밖으로 나가는 포탈 앞에 서서 웃었다.
'거기 두 친구. 그 새끼 좀 붙잡아봐.'
협박은 위협적이었고.
'당신들, 언제까지 이런 조그만 파티에서 있을 거야?'
'힐러연합에 찍히면 길드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처신 잘 해라. 어차피 니들도 이제 여기 수준 안 맞아서 나가려고 했잖아?'
유혹은 달콤했다.
가족 같이 지낸 원프라이드다.
하지만.
파티원들은 부양해야 할 진짜 가족이 있었다.
결국 유창식은 자신의 파티원들에 의해 제압당하고 유물을 빼앗겼다.
그 난리 중에 몸에 지니고 있던 던전캠이 바닥에 떨어졌다.
"새끼, 꼼수 부리기는."
그는 던전캠을 수차례 발로 밟아부숴버렸다.
이어서 힐러는 깔끔하게 유창식을 던전 안에서 죽이려고 했지만, 파티원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목숨만큼은 건지게 되었다.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유창식이 말했다.
"그날로 모든 파티원들과의 연락이 두절됐고 원프라이드는 해산됐습니다. 배신감보다는, 그냥 허탈했습니다. 처음엔 원망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해했습니다. 나 하나의 욕심때문에 다른 파티원들의 미래까지 빼앗겨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문득."
그가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비참하더군요."
무슨 위로를 건넬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가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이게 그 던전캠입니다."
유창식이 박살 난 던전캠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척 봐도 상대가 무척 나빠 보였다.
"정말 기적적으로 데이터가 살아 있었습니다. 발로 밟아 부쉈던 힐러도 직접 켜보진 않더군요."
정서진은 놀란 얼굴로 던전캠을 살펴보았다.
"던전캠은 고가의 장비로 알고 있는데요. 이런 걸 어떻게……."
"아는 후배가 공인 헌터였습니다. 힐러연합이랑 일한다고 하니까 혹시 모르니 가져가라고 빌려주더군요. 결국 다 부서져서 돌려주지도 못하게 됐습니다만."
우리는 바로 던전캠의 자료를 컴퓨터로 옮겨 실행해 보았다. 정서진이 마우스를 달칵거리며 자료를 다운로드하는 도중에, 나는 의문이 생겨 물었다.
"혹시 저희들 이전에, 이 자료를 가지고 언론사에 찾아가 보셨나요?"
"물론 찾아가 봤지요."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상대가 힐러연합이라는 말에 다들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더군요. 해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찾아오는지 아느냐고. 힐러연합에 대한 자료는 넘치지만 뿌리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그랬군요."
"다운로드 다 됐습니다."
정서진이 PPT 슬라이드로 영상을 띄웠다. 손상 때문에 영상이 다소 지직거리긴 했지만 보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던전캠에 찍힌 원본을 보았고.
"……하."
나는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