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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76화 (76/337)

나 혼자만 마탑주 076화

눈을 뜨자 마탑 안이었다. 내 앞에는 여전히 4층 시련으로 가는 시공이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탑주! 탑주! 괜찮으십니까?"

에아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내 가슴을 쓸어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아니, 상처를 입은 흔적조차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야?"

"탑주는 허구의 공간 마법 안에서 죽었습니다. 진짜 신체에 영향이 가지는 않았으리라 사료됩니다."

"……."

가상현실에서의 죽음이란 건가.

하지만 너무 사실적이라 그런지, 좀 처럼 충격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이렇게 무력하게 당한 적은 처음이다.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나랑 같은 마나량이라고 했는데 이 정도의 차이가……'

나는 그대로 대자로 뻗었다.

생각이 복잡했다.

선대 마탑주를 만났고, 결투를 했고, 압도적인 차이로 죽었다.

그래도.

'다시 붙어보고 싶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꺾어야 할 목표가 생긴다는 건 정말로 짜릿한 일이다.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다. 조금만 더 붙어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첫 층 시련에 도전했던 초심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갑자기 시야가 핑 돌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

정신이 핑그르르 돌았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며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다.

"탑주."

에아가 내 몸을 포근히 끌어안았다.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할 때입니다."

"가,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고 해도 죽음은 죽음입니다."

후유증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심장에 틀어박힌 그 얼음의 시린 감촉을 기억할 수 있다.

이 몸 상태와 컨디션으로 재도전하는 건, 역시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 좀 쉬러 가자."

* * *

푹 자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안톤에게 도전했다.

강했다.

이번에도 10분을 넘지 못했다.

'이번엔 익사라니.'

얼굴에 물의 어항을 단 채 고통스럽게 버둥거리다가 의식을 잃은 기억이 난다. 안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1층 로비로 돌아와 에아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공략에 고심하고 있었다.

-띠링!

"음?"

문자 수신음에 스마트폰을 켜서 확인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이다.

-포션 사업을 포기해라.

"푸핫!"

이 새끼들은 또 뭐야?

뭔데 이런 장난질이지?

"에아. 2층에 서진이 좀 불러와 줄래?"

"알겠습니다. 탑주."

잠시 후 정서진이 2층에서 내려왔고 내가 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으음,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칼람 건도 있고 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죠."

나는 팔을 빼뒷머리를 받쳤다.

"이번엔 또 뭘까? 포션 능력자를 내놓으라거나 레시피를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업을 포기하라고?"

정서진은 진중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듣고 보니 이상하긴 하군요. 포션이 상용화되면 곤란한 사람들을 위주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곤란한 사람들이 있겠어?"

포션은 공익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가격은 좀비싸긴 하지만, 포션으로 인해 헌터들의 던전 안정성과 귀환률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저렴하든 비싸든 일단 플레이어라면 포션이 나온다는 것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포션 사업이 확장되면 자기들도 몇 병 가져볼 확률이 늘어나니까 좋은 일이다.

"혹시 마인이 아닐까? 포션이 헌터들의 생존률을 크게 높이고 있잖아. 그리고 헌터들은 몬스터들의 가장 큰 적이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번 사태로 그들의 정체가 집중 조명되고 있어서 마인들은 숨죽은 채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시기에 일을 벌이는 건 현명하지 않죠."

"흐음."

정서진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아, 있습니다. 포션 사업이 커지면 입지가 줄어드는 자들."

"누군데?"

"회복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들. 좀 더 세력을 추정하자면 '힐러연합'입니다."

"……오호."

회복 계열 능력을 가진 '힐러'들은 귀한 편이다. 흔히 말해 귀족 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힐러연합은 이러한 힐러 능력자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길드'다.

오로지 회복계 플레이어만 가입할수 있으며, 각 길드에 힐러들을 파견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물론 힐러를 용병으로 데려오려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동안 '현장에서의 회복'은 힐러들 만의 성역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션이 활성화되면, 힐러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죠."

"제 밥그릇 지키려 든다는 거네."

확실히 포션이 시장에 활성화되기 시작하면 회복계 능력자들의 입지가 줄어들 수는 있다.

"타이밍도 대충 맞습니다."

정서진이 말했다.

"바로 어제 알케미아 2호점 계획을 발표했거든요."

"그 소식을 듣고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건가……. 일단은 우리 예상일뿐이니까 한번 조사해 줘."

"알겠습니다."

* * *

협박 문자가 한 통 오긴 했지만, 그것만 제외한다면 포션 사업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선 우리는 늘어난 매출 규모에 맞춰서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사무실을 차리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자재 유통도, 점포 관리도, 프로모션도 전부 외주를 줘서 처리했지만 이제는 직접 우리가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중간에 있는 정서진이 너무 고생하기도 했고.

예전과는 다르다. 이제는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있고 사무실 임대료도 감당할 수 있다.

이미 한번 IT기업을 차린 적이 있는 만큼, 정서진의 일 처리는 막힘이 없었다.

젊고 유능한 인재 10명을 끌어모았고 빠르게 점포 업무 지원과 홈페이지 운영을 시작했다. 아직은 작은 사무실이지만 규모는 앞으로 점점 더 커져 나갈 것이다.

나는 다음 지시를 내렸다.

'두뇌는 구축했으니 다음은 팔 자리 차례야. 지금 우리고 일하고 있는 유통 회사들, 저렴한 곳부터 사들이자.'

내 지시를 들은 정서진이 물었다.

'운용 비용의 합리화가 목적입니까?'

'거기에 더해 보안 문제도 있지. 예전에 칼람 놈들이 정보를 캐낸답시고 우리랑 일하는 기사들 납치해서 고문했잖아. 그 때문에 우리랑 일하는 걸 포기하는 업체도 나왔고.'

'어떻게 잊겠습니까.'

'우리랑 일하는 영세 유통 업체는 계속 외부 위협에 시달리게 돼. 외부와 협력해서 보안에 구멍이 생길수도 있고. 이제 자본도 있고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무실도 있으니까 그냥 우리가 품자.'

이제 내 이름과 내가 가진 세력이 어중간한 길드의 위협 정도는 막아줄 정도가 된다고 생각한다.

내 뒤에는 헌터 협회가 있고, 나와 고정적으로 거래해서 신용을 쌓은 길드들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우리는 부도 위기였던 작은 유통업체를 사들였다.

계약을 위해 허물어가는 회사에 찾아 갔더니, 사장님이 내 손을 붙잡고 우리 식구들 살려줘서 고맙다는 외침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모든 기사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했고 지금의 배에 달하는 월급을 약속했다.

이제 더미 공장과 점포를 오가며 물건을 옮기는 일은 외부 인력이 아닌 알케미아의 정규직 기사들이 맡는다.

일자리를 잃기 직전이었던 기사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입었고, 이번 일로 사기도 크게 높아졌다. 이걸로 일말의 보안 구멍도 막았다.

물론 사무실 사람들이나 운송 기사들 그 누구도 마탑의 정체는 알지 못한다. 사업 파트와 마탑 파트의 확실한 분업. 이 부분이 가장 큰 핵심이다.

최종적으로는 나나 정서진이 손을 떼도, 마탑에서 포션만 공급하면 알아서 알케미아가 돌아가게끔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러니까."

퉤!

나는 바닥에 피 섞인 침을 퉤 뱉으며 입가를 소매로 슥슥 닦았다.

"이제 나만 잘 하면 되는데."

"싸우다 말고 무슨 혼잣말이야?"

내 앞에 있는 거대한 벽.

13대 마탑주 안톤.

소년으로 돌아간 그는 행동이나 말도 꼬마처럼 변했다. 지팡이를 장난스럽게 휘두르며 놀고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들어갑니다."

"헤헤! 얼마든지 와!"

지금까지 이번 4층 시련에 대해서 알아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우선 첫째. 안톤은 나와의 전투에 대한 기억이 리셋되고 있다.

현재 나와 안톤의 전투는 7회차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시련이라는 장소의 특이성 때문인지 그의 기억은 1회차 전투에 머물러 있었다.

즉, 이쪽은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안톤과 무한히 싸우며 경험치를 쌓고 그의 약점을 파헤칠 수 있지만, 안톤은 나를 단 한 번 상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싸운다는 점이다.

다만.

"너 이번 이 몇 회차야? 아직 너무 어눌한데."

안톤은 이 전투가 내 도전에 의해 반복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듯했다.

그리고 둘째. 지금까지 내가 겪은 모든 시련이 그랬듯 이번 시련도 교육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윈드 커터는 빠르지만 궤적이 너무 뻔해. 대인전에 사용하려면 수식에 변동을 줘야 할 거야.'

'너 말이야. 마나에 완전히 몰입하는 데까지 예열이 너무 오래 걸려. 마법사의 전투는 시작되고 초 단위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아. 단번에 감을 잡는 연습이 필요해.'

'쉴드 마법진은 펼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늦어. 펼치는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걸 놓는다는 개념으로 생각해. 이미 버릇이 들어버려서 교정하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바꾸고 넘어가.'

안톤은 내가 마법을 쓸 때마다 하나하나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고 있었다.

기억이 리셋되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하면 같은 지적을 했다.

이 다음에 내가 어드바이스를 흡수해서 개선된 모습을 보이면 '이거 내가 알려준 거지?' 하고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다음 단계의 과제를 냈다.

책으로 마법을 익힌 내 한계점을 안톤이 채워주고 있다. 새로운 마법을 가르쳐준다기보다는,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점을 짚어주고 실전 감각을 채워주는데 주력했다.

시련이 아니라 마법사 선생님에게 과외받는 느낌이다.

아, 물론.

"큭!"

삐끗하면 선생이 학생을 죽이려 달려든다는 점이 일반적인 과외와는 달랐지만.

3랭크의 프로즌 니들이 어깨에 박혀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머릿속의 수식을 소화했다.

<프로즌 니들>

이쪽도 현인의 눈으로 마법진을 복사해 그대로 돌려주었지만 그림같이 올라온 쉴드에 막히고 말았다.

"야!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갑자기 안톤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안톤은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던 넘어갔지만(죽였지만) 이 부분만큼은 진심으로 엄하게 화를 냈다.

"잘 들어! 타인의 마법을 베끼며 살면 평생 이류가 될 뿐이야!"

3공정 화염계 마법이 정면으로 쏟아진다. 내가 정신없이 리프 부츠와 쉴드를 밟고 도망치는 사이에도 설교는 계속 되었다.

"그딴 쓰레기 같은 마인드가 남아 있다면 당장 버려! 남이 하는 걸 신경 쓰지 말고, 네가 품은 것들을 극한으로 단련해!"

결국 폭발의 화력에 휘말린 내 몸이 붕 떠올라 바닥에 세게 떨어졌다.

으으, 진짜 더럽게 아프네.

안톤이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내 심장에 몇 번이라도 구멍을 내버릴 듯 살벌했다.

"……대선배의 가르침. 다 알겠지만 딱 하나는 잘 안되더라고요."

"갑자기 뭔 소리야?"

"예열을 빠르게 하라는 거요."

나는 자꾸만 시야를 가리는 이마의 피를 소매로 슥슥 닦아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나 자신을 속여서 몰입하는 것도 안 되고,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서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역효과만 나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아, 대선배님 상대로는 꼼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벌어야겠다."

"……응?"

"제가 대선배님 마법을 따라 하면 항상 그렇게 평정을 잃고 화를 내셨죠. 바늘구멍 같던 마법 컨트롤도 영 흔들리시고."

내가 안톤의 전투에서 유일하게 경쟁력을 가지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경험과 데이터.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눈을 떴다.

"덕분에 예열 끝냈습니다. 이제 제가 가진 걸 보여드리죠."

<카피 매지컬 포지션>

허공에 거미줄처럼 마법진들이 얽히며 증식하기 시작했다. 안톤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했더니 또 그 이상한 물량 마법진이야? 발사 시작점이 훤히 들통나는 마법은 아무리 많이 매달아도 소용없다니까."

"글쎄요."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한번 겪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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