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66화
조금 더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달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주택가 앞에 던전 게이트가 푸르스름한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두 분 잠깐만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 던전에 들어가시려고요? 녹색던전이던데."
고개를 돌려보니 플레이어로 보이는 젊은 남녀였다. 남자는 방패와 검을 차고 있고, 여자는 특별한 무장 없이 가방만 메고 있다.
내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저희 둘 다 새 던전을 클리어할 여력은 안돼서요. 적당히 잔당몹 잡으면서 마정석 챙기고 겸사겸사 포탈도 확인할 생각입니다."
"아, 그런 거군요!"
남자가 여자에게 '괜찮지?' 하고 물었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글 올리신 분 맞죠? 괜찮으시다면 저희도 같이 가도 될까요?"
"우리도 이대로 철수하기엔 아쉬워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돌까 했거든요."
아무래도 게시판에 올린 내 글을 보고 온 것 같았다.
"사람이 많으면 저희야 안전하고 좋죠. 저는 김유신이라고 합니다."
"차진구입니다. 포지션은 탱커입니다……"
"임소희예요. 보조 딜러 포지션이에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우리는 빠르게 통성명을 주고 받았다.
홍연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홍연입니다. 포지션은 딱히 가리지 않습니다."
"오, 인상적인 소개네. 반가워요."
남자는 그렇게 말했지만 여자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호, 호, 홍연? 설마 그 협회장 여동생?"
"어? 아, 그러네! 진짜 네!"
두 사람은 연예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홍연은 익숙한 일인 듯 차분하게 대처했다.
한참을 호들갑을 떨던 차진구가 나를 보며 말했다.
"홍연과 같이 다니시다니, 혹시 공인 헌터분 되십니까?"
"아쉽게도 헌터 자격은 아직 못 땄네요."
"아, 그럼 다행이네요. 저희도 올해 5급 준비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이에요. 프로시면 괜히 저희가 더 부담스러워서. 하하!"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양희종이나 조윤지의 선례가 그랬듯, 프로들은 가면허들에게 대접받고 싶어 한다. 던전은 더 쉽게 돌겠지만 피곤한 상황은 피할 수 없겠지.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선호 포지션대로 스크럼을 짰다.
탱커인 차진구가 전방에, 딜러인 나와 홍연이 중열에, 임소희가 후열에 서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럼 들어갈 게요."
"네!"
어쩌면 마지막 던전일 수도 있는 곳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포탈 너머 던전으로 들어오자마자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리는 숲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다들 잘 들어오셨죠?"
차진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탱커 포지션인 만큼 그가 리더를 자처했다.
"혹시 두통이나 어지럼증 증상 있으신 분?"
나와 홍연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자기는 어때?"
"난 괜찮앙."
커플이었구만. 차진구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체온을 재는 시늉을 했고 그녀는 입을 가리며 새침하게 웃었다. 놀고 있네, 놀고 있어.
"앗, 실례!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의 시선을 느낀 차진구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일단 몬스터의 기척은 없네요. 20분 동안 각자 흩어져서 단서 찾고 이 자리에 다시 모입시다. 너무 멀리 가진 마시고요."
"네."
흔히 말하는 단서 타임. 보스존의 위치를 추정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다. 그 단서들은 필드 곳곳에 널려 있다.
우리는 20분 후 다시 모였다.
"변이된 이계수를 잘라봤는데 나이테가 한쪽으로만 기이하게 쏠려 있었습니다."
"북남쪽 17시 방향에 몬스터의 대변을 다수 찾았어요.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네요."
"강을 찾아냈습니다. 6시 방향으로 흐르고 있네요."
뭐, 대충 이런 식이다.
모두가 찾아낸 단서를 이야기했고 나는 결정적인 단서를 말했다.
"저기 돌 언덕 위에 전투 흔적이 있었습니다. 앞선 파티가 싸웠던 것 같은데요."
"오오! 스타트 좋네요."
앞선 파티의 움직임은 큰 참고가 된다. 모든 단서들이 한 방향을 지목했으므로 우리는 그쪽으로 이동했다.
전흔(戰浪)은 계속 되었다. 바닥이나 나무 위에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몬스터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가장 앞장서서 몬스터의 시신을 살피던 차진구가 말했다.
"3랭크의 사미우스네요. 무리 지어다니는 녀석들이니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살짝 언덕을 우회해서 가죠."
이미 누군가 클리어했던 만큼, 던전 탐험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제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특별히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자기, 다리 안 아파?"
"아, 부끄러우니까 그만 좀 해! 벌써 세 번째 물어보는 거 알아?"
임소희가 툴툴댔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우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분도 혹시 커플 아녜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아, 타이밍이…….
"오호호! 이심전심! 커플 맞으시네!"
임소희는 우리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계속 놀려 댔다. 홍연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래도 움찔 하는 반응이라도 있으면 놀리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이 녀석도 영 재미가 없는 타입이다.
"다들 여기 좀 봐요!"
앞에서 뭔가를 살피던 차진구가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웬 멧돼지 같은 중형 몬스터가 쓰러져 있었다.
"이건 4랭크 중에서도 상당히 까다롭다는 시시포스의 시체입니다."
이번엔 홍연도 호기심이 생긴 듯 붉은 머리를 넘기며 시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시시포스는 호수 지형에서 나오는 몬스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흐음, 근처에 호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냇물을 따라 움직이고 있으니까 어쩌면 앞에 큰 호수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겁니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은 몬스터의 시체를 향해 있었지만 청각과 촉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침착하자. 이제 와서 티 내면 곤란하다.
떨림을 자제하고 몰입했다.
마나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확실히 바뀌었다.
이제.
……온다!
쿠우우우웅!
굉음이 터져 나온다. 치켜드는 맞바람에 머리칼과 옷깃이 정신없이 펄럭인다.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니 난데 없이 굵직한 나무 기둥 같은 것이 보인다.
가로로 뻗어 나간 그 나무 기둥은 홍연과 차진구가 있던 자리를 지나저 멀리 고목에 부딪혀 있었다.
어찌나 큰지 홍연은 파묻힌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밀어버린 것과 같은 나무뿌리가 뒤에서 나를 집어삼키려 움찔거리고 있었다. 다만 내 뒤에는 유리창 같은 쉴드가 펼쳐져 막고 있다.
"……큭!"
쉴드 너머로 인상을 굳히고 있는 임소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두팔이 나무처럼 크게 변형되어 있었다.
그녀가 던전 진행 중에 선보였던 빛 계열고유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힘.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언제쯤 본색을 드러내나 싶었는데. 이게 다야?"
"……!"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알고도 따라왔다니 악취미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우드득!
홍연을 집어삼킨 나무 팔에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꿇어! 네 귀여운 여자 친구를 살리고 싶다면."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귀를 팠다.
"싫은데."
"……이 자식!"
쉴드에 막혀 있던 나무뿌리들이 좌우로 뻗어 나와 공격해 왔다. 나는 가볍게 스텝을 밟아 피했다.
-캬아아아아아악!
임소희의 입이 괴물처럼 찢어지며, 변조된 매캐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마나의 흐름이 바뀌었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니 변화는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로부터 시작됐다.
겉면이 갈라지며 생물의 눈알 같은 것이 생기더니, 이내 나무 줄기들이 맹렬한 기세로 솟구쳐올랐다.
이 지형 전체가 함정이라는 건가.
"근데 니들 말이야."
하늘로 올라간 나무뿌리들이 창처럼 변해 지면으로 내려오려는 그때.
주위의 모든 나무 기둥에 붉은 상처가 일자로 그어졌다.
"쟤를 인질로 잡는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웃긴 거 아니냐?"
촤아아아아악!
나무들이 붉은 선을 따라 두부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솟구쳤던 뿌리들도 이내 힘을 잃고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떨어지는 식물들의 비를 맞으며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마인들."
임소희의 표정이 굳어지다 못해 일그러졌다.
마인 (魔人).
인류의 변절자.
신체는 물론 사상과 정신까지 타락해 ' 몬스터화'된 자들.
마인화 또한 재앙의 일종이다. 인류였던 자가 사회 속에 스며들어 인류의 멸망을 목표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고랭크 몬스터들보다도 까다롭다.
아직 마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생활한 베테랑 헌터들도 마인을 보지 못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일반인들 중에서는 도시 전설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
사람들은 몬스터의 감염 상태이상에 걸려 그렇게 됐다고 여기는 정도지만,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경향이 있다.
"고효인! 그냥 끝장내버려!"
처음 듣는 이름이다. 두 사람 말고 다른 동료들이 더 매복해 있는 건가?
바로 변화가 일어났다. 지면이 출렁이며 모래 늪처럼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지면을 딛고 있던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
시커먼 웅덩이 끝에 짐승의 이빨같은 것이 툭툭 튀어나왔다. 웅덩이 한복판에는 커다란 혓바닥까지 생긴다.
어느새 우리는 땅이 아니라 괴물의 입 안으로 삼켜지려 하고 있었다.
"홍연."
나는 미리 빼둔 오른발에 데바스타 마법진을 준비하며 말했다.
"혹시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없습니다."
그녀가 검을 세우며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겠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저건 그냥 '인간이었던' 괴수니까요."
"그렇게 합리화가 빠른 성격이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상대가 인간이든 뭐든 좋습니다."
그녀의 눈빛에 살벌한 예기가 감돌았다.
"방해하면 그게 누구든 없앨 뿐입니다."
어느새 늪은 우리의 무릎까지 잠겨들었다. 이빨과 입술이 솟아오르며 점점 웅덩이가 괴물의 입처럼 변하고 있다.
-탑주. 데바스타 마법진 작성 완료했습니다.
에아의 목소리에 나는 손바닥을 오른발에 스치듯 가져다 두었다.
-흐, 소용없다! 이제 무슨 짓을 하든 못 빠져나가!
웅덩이에서 사람보다 몬스터에 더 가까운 괴성이 울려 펴졌다. 이 녀석이 그 고효인인가? 나는 오른발을 늪 안으로 파묻었다.
"여기서 나가면 나무 괴물 쪽은 네가 맡아."
"네."
그리고, 데바스타를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