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65화
미궁 던전의 완전 개방 20시간 전.
헌터 협회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마탑은 마탑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탑주님, 준비 완료했습니다.
"시작하자."
정서진이 마탑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자료들을 입력했다. 그리고 그모니터 화면은 에아가 내 현인의 눈앞으로 똑같이 출력해 주고 있었다.
지도에는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수 많은 던전들이 펴져 있었다.
차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광경이다. 물론 다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자, 천천히 해보자. 우선 우리가 처음에 설정한 경북 범위로."
-네.
화면의 한반도 전체 지도가 경북지역으로 범위가 한정되었다.
"협회 자료 받았지?"
-예. 신나라 대표님에게 메일로 받았습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단 오늘 열린 던전들은 모두 지워."
시간이 없다. 지금은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나는 최근 시간대에는 미궁으로 가는 던전이 없을 거라고 가정한다.
잠시 후, 화면에 나오는 빨간색 던전 일부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확인해야 할 던전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렇게 찔끔찔끔 소거해서는 안되겠는데.'
이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 하려다간 밑도 끝도 없다. 그래, 기왕 승부수를 던지는 거 좀 더 과감하게 나가보자.
"그냥 첫째 날에 열린 던전 빼고 다 지워."
나는 미궁 보스존으로 향하는 던전이, 사실은 첫째 날부터 있었다고 가정했다.
미궁 던전의 완전 개화까지 '7일'이 걸리는 이유. 최근에 정서진이 추가로 발견한 에렌델 측의 연구 자료를 인용하자면, 미궁 던전과 휘하던 전들의 연결 프로세스 구축에 걸리는 시간이 7일이라고 한다.
다른 전문가들은 '이상 현상의 불확실성' 어쩌고 하면서 망설이겠지만 이쪽은 마탑의 정보를 바탕으로 과감히 소거할 수 있다.
-지웠습니다.
정서진이 첫째 날 외에 모든 던전을 지도에서 지웠다. 전체의 절반 이상이 넘는 던전이 사라졌다.
"혹시 첫째 날에 열린 던전들 중에서 아직도 클리어하지 않은 던전은 있어?"
-경북 지역엔 없습니다.
"오케이 그럼……"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여기서 재확인된 녹색 던전만 남겨."
보통의 상식으로는, 재확인이 끝난 던전은 더 뒤질 필요가 없는 게 맞다.
하지만 상식선에서 움직이는 건 협회가 할 일이고, 나는 다른 느낌으로 가닥을 잡았다.
내가 집중하는 건 '의도적인 악의'다.
-됐습니다.
"오케이."
우리는 이런 식으로 점점 더 표본이 적어질 때까지 소거해 나갔다.
남은 건 스무 군데 정도.
"제일 수상한 건 역시 이쪽이야."
협회가 재확인 정책을 펼치자마자 이상할 만큼 빠른 속도로 재확인된 경북지역의 던전들.
-탑주. 협회 지휘부를 해킹해서 클리어된 사람들의 프로필을 가져 올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에아. 우리가 아무리 프로필을 봐도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사상을 가졌는지는 알아내지 못해.'
그렇게 정리를 마친 나는 총 일곱군데의 던전을 돌아보기로 했다.
'에아. 동선과 중요도를 고려해서 루트를 따줘.'
-알겠습니다.
나는 차에서 지쳐 뻗어버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세 시간쯤 자게 해줬으니 이제 괜찮겠지.
"자, 여러분! 일어나세요!"
내 외침에 모두가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장비를 챙겼다. 불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후아암, 다음 던전 공략 지시온거야?"
양희종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부터 우리 파티는 협회의 지시를 무시하고 단독행동으로 진행할 겁니다."
내 선언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들 너무 지치셨어요. 근처에서 재확인이 필요한 던전 위주로 돌게요. 서진이가 루트를 짜놨어요."
협회는 우리를 또 새로 열린 던전에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몸으로 던전에 들어갔다가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면 결국 자기 손해.
여기서는 융통성 있게 움직이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양희종이 말했다.
"이제 20시간도 안 남았어. 내가 되먹지 못한 헌터라는 건 인정하지만 적어도 이 나라가 위기라는 자각은 있다. 지금은 어중간하게 공략된던전에 들어가서 포탈을 확인할 바엔, 확실히 클리어가 안 된 새 던전을 몇 개라도 도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재확인이 필요한 던전을 돌아야죠."
이번엔 조윤지가 끼어들었다.
"던전 재확인은 시간 낭비야! 아직 보스존이 안 나온 것뿐이라고!"
"뭐, 물론 이건 개인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만요……"
나는 소파 등받이에 쿠션을 기대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보스존으로 향하는 던전은 처음부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실수했든, 꼼수를 썼든, 악의를 가지고 저질렀든. 틀림없이."
나는 이 일곱 군데의 던전을 선택한 이유를 세세히 알려주었다. 모두가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후우."
양희종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결국 이것도 네 비약일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네."
사실 마탑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5급들에게 완전한 신뢰를 부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도.
"가망 없이 빨간 던전을 도는 것보단 낫겠네. 좋아, 난 찬성."
양희종은 찬성표를 던졌다. 조윤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네요."
진보라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얼른 출발하죠! 부탁드려요, 기사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대를 붙잡았다.
"우리나라 헌터가 다들 여러분 같았으면 얼마나 좋을지…… 출발합니다."
* * *
우리 파티는 12시간 동안 경북 지역을 드나들며 하드한 던전 일정을 소화해 냈다.
누군가 한번 클리어한 던전을 다시 도는 것이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몬스터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지형 문제나 보스존 수색은 우리 힘으로 극복해야 했다.
선입 파티가 돌았던 루트와 달라지면 보스만 없지 거의 새로운 던전을 도는 난이도였다.
피로가 가중되어 있었기에 결국 부상자도 나왔다. 양희종은 다리 골절, 조윤지도 마나 고갈 증상으로 혼절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아직 프로도 아닌 진보라는 말할 것도 없이 피로 누적으로 골골거렸다.
이동 중에 가끔 죽은 눈으로 창밖을 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애써웃어 보이며 밝은 척했다. 저 몸에 붙어버린 가식도 못 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미궁 던전의 완전 개방까지 7시간 남았다.
모두가 차에서 쓰러져 잠들어 있는 사이,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왔다. 운전기사에게는 솔로 플레잉을 하러 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4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곧바로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지시해두었다.
'……앞으로 세 군데. 이 중 하나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회복 포션을 꼴꼴 들이켜며, 나는 유명 플레이어 커뮤니티에 접속해 경북지역 파티 모집글을 올렸다.
물론 이 상황에도 던전을 돌겠다는 건, 같이 죽을 사람 구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도망치지.
-지금 남아 있는 애들이 한탕충이겠냐? 위기의식을 가지고 하는 거야.
-남은 시간은 가족이랑 보내세요.
평소 농담 따먹기나 하던 커뮤니티에서조차 다들 세상의 종말을 앞둔것처럼 숙연한 분위기였다.
현장에 얼마나 사람들이 남아 있을까. 이제는 공인 헌터들 조차도 포기하고 안전지대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 최악의 경우에는 나 혼자서 들어갈 각오도 해야 할 듯했다.
반쯤 포기하고 길을 걷고 있는 그때, 갑자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벨이 울렸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고.
[ㅇㄷ?]
초성 단 두 자로 이루어진 메시지를 받았다.
"……흠."
초면에 이런 단답을 받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장난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답장을 보냈다.
[여기 경북 안동시에 한동 사거리인데요. 게이트 위치 확인하셨죠?]
[ㅇㅋ.]
[오시는 거 맞죠?]
[ㅇㅇ.]
절로 한숨이 나온다.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이 사람 아니면 혼자라도 가야했다. 나는 미리 말해둔 목적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날이 어두워지며 도시의 분위기는 허하다 못해 음침하기까지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지냈다는 흔적이 곳곳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고 상가고 텅텅 비어 있었다. 유리창이 박살 난 편의점 너머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유령 도시.
불어오는 밤바람에 전단지가 휘날린다.
아마 지금 대한민국 도시들 대부분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는 어울리지 않게 감상에 젖은 채로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도로를 거닐었다.
그러다 목도했다.
불이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벤치에 등을 기대어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문득, 묘했다.
뼛속까지 고독함이 스며들 듯한 텅빈 배경의 도시에, 여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넋을 놓고 보게 된다.
미술관에서 대가의 그림에 꽂힌 사람처럼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여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헤이즐넛 빛깔의 눈동자가 움직여 이쪽을 가만히 응시한다.
"……당신이 여기 왜……"
그 목소리에 나는 현실감을 되찾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하고 생각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홍연?"
그녀는 다름 아닌 8강전에서 죽어라 싸웠던 그 후배였다.
"……."
"……."
우리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동시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님. 온 거 맞죠?]
그녀의 스마트폰에 알림벨이 울린다. 그녀가 어색한 손짓으로 스마트폰 액정을 두 번 꾹꾹 눌렀다.
[ㅇㅇ.]
"너였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누군가 했더니 진짜. 그 성의 없어 보이는 초성 좀 안 쓸 수 없어?"
"……제 맘입니다."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친구들이랑 채팅하다 보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
그녀는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하긴 지금 그런 게 무슨 상관이겠냐.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너도 경북에서 헌팅하고 있었어?"
"첫날엔 강원도에 시작해서 여기까지 내려왔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지쳐 나가떨어져서 혼자 왔습니다."
"나도 그래."
처음으로 그녀와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홍연이 천천히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자 은빛 갑주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가죠."
"그래."
여기서 이 녀석을 만난 건 예상밖의 상황이다.
나는 그녀의 '벽'으로 남아 있어야 할 입장이긴 한데…… 뭐, 협회장이 홍연과 함께 싸우지 말란 소린 안했으니 괜찮겠지.
그녀의 말대로 시간이 얼마 없었다. 지금은 그 누구의 도움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다.
"……."
"……."
목적지까지는 여기서 10분 거리.
그 10분 동안,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괜히 어색했던 나는 힐끔거리며 그녀를 살폈다.
'갑자기 막 도전하겠답시고 덤비지 않는 건 다행인데.'
홍연이 원래 이런 분위기였던가?
그녀는 한없이 차분하고, 또 고요했다.
협회장이 말했던 대로 어떤 내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피차 내기하듯 입 다물고 있기도 그렇고, 일단은 일 이야기부터 꺼내보기로 했다.
"던전에 대해서 질문 없어?"
커뮤니티에서 파티 모집 글을 올릴때, 공략할 던전의 위치를 설정해뒀었다.
"이미 재확인이 끝난 던전에 데려가는 건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아?"
"짐작은 갑니다."
홍연이 입을 열었다.
"이상할지 만큼 빠르게 '재확인'을 받은 던전. 맞죠?"
"……."
역시 똑똑하네.
다른 설명은 필요 없을 듯했다.
미궁 던전의 완전 개방까지, 이제 6시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