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57화
"꿈만 같아요."
"뭐가?"
"여기서 이렇게 다 같이 노는 거요."
나는 픽 웃으며 딱딱해진 튀김 하나를 입에 넣었다.
"새삼스럽게 뭔 소리래. 넌 더 재밌는 곳도 놀러 가고 그랬을 거 아냐."
"그랬죠."
진보라가 맥주잔을 내려놓고는 다리를 모아서 끌어안았다.
"근데요. 근사한 홀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과 파티를 즐겨도, 시끌벅적한 강남 클럽을 가봐도, 뭔가 그냥 허해요. 분명히 사람들은 주위에 가득 한데. 같이 온 친구들도 재밌는데. 그 사람들이랑 놀고 있는 와중에도 문득문득 느껴요. 아, 외롭다- 하고."
"……."
"실은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거든요. SNS도 그래서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폰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밀려드는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가시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마음이 편해요! 그냥 제가 이장소가 좋고 여기 사람들이 좋아요! 가족처럼 따뜻하고 안락한…… 흠흠. 어우, 나 취하긴 취했나 봐."
정서진은 조용히 맥주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마시고 잊는 게 좋겠군요. 내일 아침에 떠올리면 이불 뻥뻥 차는 걸로는 안 끝날 겁니다."
"흥."
그녀는 맥주잔을 빼앗듯 낚아채서 꿀떡꿀떡 마셨다. 정서진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좀 더 취하면 질질 짜면서 사연 늘어놓을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하지 마. 너희 둘 다 터지면 감당 안돼."
정서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저 녀석이 이렇게 웃는 모습은 진짜 오랜만에 보네.
"흐으응, 저는 그쪽이 제일 별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진보라가 텅 비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재벌 3세라매? 아무리 후계자 싸움에서 밀렸다지만 우리랑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여기서 필사적으로 일하는 거예요?"
"그야."
맥주잔을 만지작거리던 정서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다른 세계에 사는 여러분께 인정받고 싶으니까요."
의외의 답이었는지 진보라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무엇보다, 마탑은 제 의지로 선택한 곳입니다."
정서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제 회사가 내 가족들에게 붕괴되는 모습을 몇 번이고 손 놓고 지켜 봐야만 했습니다. 이번 만큼은 그런 운명을 바꾸고 싶습니다."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녀석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아, 선배님은 어때요?"
진보라가 손으로 꽃받침을 하며 물었다.
제대로 취했구만 이 녀석.
"……뭐, 최고 수혜자는 누가 뭐래도 나지. 마탑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면 아직도 밑바닥을 헤매고 있었을 거야. 그때 신중하겠답시고 에아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눈앞이 깜깜하네."
"어머! 마탑주 제안을 거절하려고 하셨어요?"
"그때 에아가 제안하는 투가 좀 수상했거든."
"뭐라고 했는데요?"
조용히 뒤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던 에아가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다급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장난기가 올라 있던 나는 그녀의 흉내를 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세계의 마법을 총괄하는 마탑주가 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이 이상 있을 수 없는 영광! 뭘 망설이는 겁니까?"
"……타, 탑주!"
"꺄하하하! 진짜 그랬어요?"
왁자지껄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아는 나를 새침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앞으론 탑주의 모든 흑역사를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하겠습니다."
"미안. 미안."
우리의 웃음 소리에 은솔이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무슨 일이야?"
"미안해. 많이 시끄러웠어?"
"우리도 이제 자러 가죠."
진보라는 은솔을 1층의 침대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정서진은 2층으로, 나는 9층으로 올라갔다.
"읏차차."
내 전용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쭉젖혔다. 에아가 빛무리와 함께 내 옆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삐쳐 있는 듯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에아."
"예, 탑주."
"엑시오 콘서트. 일주일 뒤에 있는 거 예매해놨어."
그녀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그냥 해본 말이었습니다! 탑주의 귀한 시간을 쪼개서 보러 가실 필요는……"
"아, 왜 그래. 나도 엑시오 좋아한다고."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쭈뼛거리며 뭐라고 웅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조그맣게 말했다.
"아, 안녕히 주무십시오."
빠르게 사라지는 에아를 보며, 나는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술기운이 아직 안 가셔서 그런가.
그저 모든 게 행복했다.
* * *
홍연과의 8강 이후, 아카데미는 졸업한 것이나 다름없게 됐다. 나는 수업에도 안 들어갔고, 던전 출장 핑계 댈 필요도 없이 정당히 마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염원하던 아카데미 졸업이고, 그렇게 소망하던 공인 5급 헌터다.
속이 뻥 뚫리는 성취감은 있었다.
하지만 사실이 정도야 마탑주가 됐을 때 당연히 이룰 수 있었던 것들이고.
지금의 내 야망은 더 커졌다.
한 사람 몫을 하는 프로 헌터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내친김에 에아의 말대로 세계정복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마탑이 있다면 뭐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백수가 된나는 1층 로비의 황금 소파 위에서 빈둥대며 스마트폰을 두들기고 있다.
메신저에 접속했는데 메시지가 거의 수천 개씩 쌓여 있었다. 여러모로 처음 보는 광경이다.
[리버 길드의 최영 팀장입니다. 경기 무척 흥미롭게 봤습니다. 저희 길드가 내세울 점은 열정과 기획, 영업뿐이지만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리버 길드는…….]
[유신아! 조기 졸업 축하한다! 클럽애들 다 난리야! 파티 한번 해야지?]
[유신아 축하해! 나 기억나지? 임윤지야. 작년에 같은 수업 들었던……]
[김유신 학생. 나 담당 교수 이윤현인데. 내일 6시쯤에 내 사무실에 한 번 들르게. 취업 자리에 대해 이야기를…….]
[안녕하세요! 천호 매니지먼트에서 귀하를…….]
무표정한 얼굴로 주르륵 메시지를 내리던 나는 어느 한 부분에서 멈칫했다.
[4강 들었다며? 졸업 축하해.]
한윤정의 짤막한 축하 메시지. 사실이 녀석을 홀로 남겨두고 졸업해버린 게 조금은 마음에 걸리긴 했다.
바로 답변을 보냈다.
[고맙다. 경기 봤냐?]
[당연히 봤지. 진짜 현실감 없더라.]
[뭔 현실감?]
[그렇잖아. 홍연이랑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저 사람이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낑낑거렸던 그 김유신이 맞나? 뭐 그런 생각 했지.]
나는 장난스럽게 답변을 작성하려다가 지웠다. 그리고 다시 썼다 지우기를 세 차례 정도 반복하다가, 결국은 이렇게 보냈다.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진짜로.]
[말만이라도 땡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입력 했다.
[윤정아. 혹시 나랑 같이 일해볼 생각 없냐?]
[됐네요. 학교 일로도 바빠.]
무슨 일인지 들어보지도 않네.
뭐, 한윤정이라면 거절할 줄 알았다.
그녀를 마탑에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나 형평성 문제로 보나, 지금의 한윤정에게 관리자 자리를 줄수는 없다.
만약에 준다고 한들, 한윤정은 각자의 분야에서 괴물 같은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정서진, 진보라, 은솔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될 것이고 자괴와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과연 그게 진정으로 한윤정에게 행복한 길일까? 그건 의문이다.
[그리고 고마워.]
[뭘?]
[던전 출장 권리가 재편돼서 비전투계 애들도 사냥터에 갈 수 있게 됐어. 이거 네가 한 일이지?]
…하여간 눈치 하난 빨라요.
[내일부터 1랭크 던전에 들어가. 나 포기 안 해. 죽도록 노력해서 헌터가 될 거야.]
[그래, 힘내라. 진심으로 응원할게.]
조금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래야 한윤정이지.
외유내강의 한윤정과, 외강내유의 홍연. 두 사람이 서로를 조금씩만 닮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배니임-"
소파에서 빈둥대고 있는데 옆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어요?"
진보라였다. 앞치마 차림에 머리도 뒤로 묶은 모습이었다. 벌써 오늘 할당량을 만들기 시작했는지 앞치마에는 알록달록한 색소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녀는 입술을 삐쭉이며 소파에 드러누운 나를 바라보았다.
"태평해 보이셔서 부럽네요, 우리 김 헌터님."
"그거 도와달란 소리지?"
"아, 아닌데요? 저 혼자 할 수 있는데요!"
나는 말없이 여분의 앞치마를 두르고 그녀와 함께 솥 앞으로 갔다.
"뭐부터 하면 돼?"
"어머나, 일부러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에. 그럼 일단 거기 액체 포자부터 넣어주실래요?"
하여간.
일단은 나도 '포션 조제' 특성 보유자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녀의 보조를 하곤 했다.
"이번엔 어디 예약이야?"
"칼로스 길드예요. 냉기 저항 포션 30병 주문이네요."
"워우, 추운 던전 가려나보네."
우리는 능숙하게 손발을 맞춰가며 포션을 만들어나갔다.
"읏차!"
재료들을 솥 안에 털어 넣은 다음, 진보라는 자기 키만 한 국자를 붙잡고 내용물을 휘휘 젓기 시작했다.
"잠깐 쉬어. 젓는 건 내가 할게."
"네에? 아. 지, 진짜 괜찮아요!"
"내가 한 대도."
나는 진보라의 국자를 빼앗아서 직접 솥 안의 내용물을 휘저었다.
그녀는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내심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어디 앉아서 쉬고 있어."
"우이씨, 상급자가 일하고 있는데 불편해서 어떻게 앉아요!"
라고 말하며 자연스레 뒤로 걸어가 소파에 앉는 그녀였다.
"……."
진보라와 같이 부대끼며 지낸 지한 달이 다 됐지만, 아직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갑자기 다리를 쭉 뻗고 왼 다리는 모아서 팔로 감싸는 포즈를 취했다.
"……뭐하냐?"
"어때요? 다리가 길어 보이는 섹시한 포즈."
그녀는 패션쇼에 온 것처럼 이런 저런 포즈를 내게 선보였다. 자기 딴엔 치명적인 척, 한 손을 허리에 올리고 '유후!' 하는 소리를 냈지만, 치명적인 건 잘 모르겠고 좋게 봐줘도 귀엽게 보이는 정도였다.
"정신 사납게 갑자기 왜 그래?"
"선배님이 일하시는데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잖아요! 눈요기라도 해드려야죠! 막 힘이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어디 가까운 정신과 상담 좀 받아봐라."
"너무해!"
관심이 필요한 여대생을 상대하는 건 여러모로 피곤했다.
철없는 여동생이 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래도 요즘은 그녀의 4차원에 적응해서 그런지 나름 귀엽게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님!"
"왜?"
"공인 헌터가 되면 길드에 들어가 실 거예요? 그래도 헌팅은 계속해야 강해질 수 있잖아요."
"아직은 고민 중이긴 한데, 적당히 내 일정에 맞춰줄 수 있는 매니지먼트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
헌터들의 소속은 보통 세 가지로 갈린다.
협회.
길드.
매니지먼트.
헌터 협회는 간단히 말해 공무원이고, 공익을 위해 싸우는 헌터들이다.
물론 수입은 셋 중에서 가장 낮지만 가장 강한 권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다. 연금도 나오니까 은퇴 이후에 치킨 튀길 일도 없다.
다음은 길드. 가장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 대부분의 헌터들이 이쪽으로 들어간다.
막대한 계약금은 물론, 본인 스타일에 맞는 던전 캐칭, 스케쥴 관리, 전문 트레이닝, 헌팅 디바이스 제작및 법률 자문, 세무서비스, 이동수단까지 전부 다 지원받을 수 있다.
다만 길드에 의해 통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매니지먼트는 주로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 하는 헌터들이 계약하는 곳이다.
일종의 프리랜서같은 개념으로, 던전 캐칭 같은 복잡한 절차나 전투외적인 부분들을 전문 회사에 아웃소싱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팀원들끼리 합숙하고 철저하게 한 팀으로 움직이는 길드와는 달리, 매니지먼트 소속의 헌터들은 할당된 던전에 도착하면 다른 헌터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가게 된다.
사실상 가면허 플레이어 시절에는 이런 솔로 플레잉 생활을 많이하게 되는데, 그런 패턴이 굳어져서 프로가 된 이후에도 이쪽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들도 많다.
길드가 한 팀이라면 매니지먼터는 용병 같은 느낌이다.
'으으음, 그럼 어디가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