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마탑주-52화 (52/337)

나 혼자만 마탑주 052화

나는 마탑으로 들어와 정서진과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는 은솔이 내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탑주님, 한 가지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정서진은 현재 진행 중인 포션 사업에 예상외의 거머리가 들러붙었다고 말했다.

길드 칼람(Calam).

한국 10대 길드에 속할 정도로 대형 길드는 아니지만, 헌터계에선 악명이 자자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납치, 협박, 고문은 기본. 이들과 관련된 던전 실종 사건이 수십 건을 넘는다.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심증이나 의혹만 있을 뿐, 증거가 없었다. 중요한 증인들도 칼람과 관련됐다고 하면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입을 열지 못했다.

이런 위험한 자들이 냄새를 맡고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칼람이라면 던전 관련 범죄 저지르고 다니는 애들 아냐? 걔네가 왜 갑자기 사업을?"

-저도 그 부분이 의문입니다.

"……끙, 그럼 놈들의 동기로 짐작가는 건?"

-포션 제조 능력자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우리와 협력한 유통업체 기사들 몇 명이 실종됐습니다.

실종이라는 말에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사람을 납치했다는 거야? 아무 상관 없는 민간인 운전기사들은 왜?"

-그게 놈들의 방식입니다. 아주 작은 단서부터 시작해 핵심까지 치고 올라오죠. 벌써 몇몇 운송업체는 우리가 칼람의 표적이 된 것을 알고 계약을 취소하기까지 했습니다.

"……."

갑자기 긴장감이 올라오면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괜히 셔츠를 풀어헤쳤다.

"……서진아. 넌 무사한 거야?"

-예, 모든 일을 대리인을 통해 진행했으니 보안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설마 유닉스의 눈을 피하고자 만든 보안 체계가 칼람을 막기 위해 쓰일줄은 몰랐다.

정서진은 깊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칼람은 집요한 놈들이고, 언젠간 꼬리가 밟히게 될 겁니다.

결국, 저와 탑주님의 연결고리가 발각된다면 보라 씨와 은솔 양, 그들의 가족, 그리고 마탑까지 모든 것이 위험해집니다.

"……끄응."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로 마탑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뭐?"

-칼람의 표적이 된 이상, 마탑의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밖에서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사업 경과를 보고하겠습니다.

그 말에 번뜩,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방법이라면…….

정서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있습니다. 탑주님께서 길드에 들어가시는 겁니다.

"길드……"

-탑주님께서 10대 길드 소속이 되고, 전면에 나와 포션 사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칼람이 길드 소속이 된 탑주님을 건드리는 건 해당 길드와의 전면전을 뜻하니 놈들도 포기 할 수밖에 없겠죠.

확실히, 세력을 등에 업으면 칼람도 우리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된다.

칼람은 약자에겐 무자비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영리하게 꼬리를 말고 고개를 숙인다.

그게 칼람 같은 조직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정서진은 설명했다.

-그리고 길드에 들어가면 길드의 유통라인과 네임벨류를 이용해 포션사업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받겠지만, 그나마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포션 사업을 뒤로 미루는 건 어때?"

-칼람이 꽁무니에 붙은 이상, 사업을 미룬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뭐, 그렇겠지.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상대는 그냥 산업 스파이 정도가 아니라, 목적을 위해선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괴물들이다.

그런 더러운 것들이 달라붙은 이상모두의 안전을 위해 세력을 등에 업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내게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제4위 길드, 스노우에 들어가는 것.

스카우터 멋대로의 착각이긴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번 조기졸업을 통과하면 길드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거 반드시 8강에서 이겨야겠는데.'

그러나 이 문제는 협회장의 제안이 얽혀 있다.

확답은 하지 않은 상태.

만약 제안을 무시하고 8강전을 진행했다가는 협회장에게 찍힐지도 모른다. 뒤끝있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지만 적으로 돌려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다.

홍연과의 결투자체도 걱정이다.

첫 결투는 상대의 방심을 이용해 이겼을 뿐이고, 그때처럼 데바스타로 날로 먹는 건 불가능하다.

'골치 아프네.'

분명히 모든 일이 순조로웠는데, 어느 순간 뭉친 실타래처럼 꼬이고 있다.

정서진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항상 상황에 따른 대처는 했어.'

포션 사업을 안일한 생각으로 준비한 건 아니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기에, 정서진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유통 루트를 개발했다.

보안도 철저했다.

모든 계약은 대리인을 내세웠고, 유통업체가 부산물을 보관하는 창고나 포션을 제조하는 장소도 마탑이 아닌 다른 곳으로 설정해 뒀다. 겉으로 보면 그냥 식음료 업체다.

하지만 칼람의 접근이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변수가 있었다.

결국, 칼람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력을 등에 업는 것이다.

스노우 길드는 내 조기졸업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조기졸업을 위해선 8강전을 이겨야 한다. 8강전은 홍연이라는 최강의 난적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협회장의 제안이 있었다.

"으, 머리야."

그때 내 무릎을 베고 있던 은솔이 꼼지락거리며 눈을 비볐다.

"……오빠야."

"아, 미안. 깼어?"

"오빠야는 안 자?"

"조금 있다가."

그녀가 다시 꼼지락거리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편안함을 느끼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서서히 눈이 감긴다.

"……."

나는 모두와 함께하는 지금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길드 소속의 헌터가 되면 지금과 같은 생활은 힘들어질 것이다.

아카데미에서는 적당히 던전 출장스케쥴 짜고 마탑에 짱박혀 있어도 괜찮았지만, 길드에 들어가 프로 헌터가 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길드에 들어가면 연수 기간 동안 정신없이 헌터가 되기 위한 트레이닝을 받아야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팀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후엔 길드의 요청에 따라 던전에 들어가서 미친 듯이 굴려지겠지.

어쩌면 마탑에 있는 시간보다 길드나 던전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칼람을 몰아내기 위해선 내가 길드에 들어가는 수밖엔…….

"……아니, 잠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너무 돌아가는 상황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나?

자꾸만 상황에 휘둘리니까 모든 게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만 한다.

이러려고 마탑주가 된 게 아니지 않은가. 이러면 예전 밑바닥일 때의 나와 다를 게 없다.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자.

마법을 사용하기 전, 몰입하기 전에, 언제나 내가 그러는 것처럼.

다른 놈들 사정은 어찌 되든 좋다.

내 생각.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결정했다.

협회장의 명함을 꺼내서 곧장 직통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누구?

"협회장님. 김유신입니다."

우탕탕탕!

잠시 수화기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오, 그래!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스마트폰을 귀에서 뗐다. 목소리가 크다.

이 사람도 은근히 내가 연락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냥 내 착각일 수도 있고.

-그렇게 내 제안을 차고 가더니, 생각이 바뀌셨나 봐?

"바뀌긴 했죠. 새로운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흐음, 아예 판을 다시 깔겠다는 거야?

"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우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8강전 기권이나, 제가 해외로 도망치는 건 역시 미봉책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승부를 피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고, 목표 자체가 소멸해 버릴 수 있습니다. 이래서야 홍연에게 제대로 된 동기를 부여할수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협회장은 긍정했다.

그런데도 나를 보내려는 이유는, 내 패배로 홍연의 목표가 깨졌을 때의 충격이 더 치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판을 흔들려면 그녀의 전제자체를 깨는 수밖에 없다.

"그냥 제가 홍연을 8강에서 잡을게요."

-……뭐?

나는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홍연이 저를 꺾는 게 목표가 됐다면, 그걸로 녀석이 멘탈을 잡고 성장할 동기를 줄 수 있다면, 알겠습니다. 제가 제대로 책임지겠습니다. 앞으론 눈도 못 마주치도록 꺾어놓죠, 뭐."

-내가 말했지 않나? 정면 승부로는 못 이긴다고.

"사실 아카데미 공식전 같은 게 '정면 승부'는 아니죠. 룰을 활용하면 충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홍연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약점? 그게 뭔데.

"그녀는 저처럼 구질구질하지 못합니다."

합회장은 가만히 내 말을 곱씹어보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풋,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고.

그다음은.

-캬하하하하하하!

한바탕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나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했다.

-새끼, 어떻게 할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뭐, 협회장의 입장에서도 내가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카데미의 총장으로서 홍연을 1년 더 남기고 싶어 하니까.

"믿어주시는 겁니까?"

-절반 정도는. 하지만 아직까진 허세처럼 들려. 네가 지면 어쩔래?

"어떤 대가든 치르겠습니다."

-……어린놈의 새끼가. 내 앞에선 말을 골라. 그 말, 제대로 책임질 수 있어?

수화기 너머로 살기가 넘어오는 것 같았다. 잠시 숨이 턱 막혔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좋아. 대신 성공하면 네 부탁을 하나 들어주마.

"뭐든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녀는 현직 헌터 협회장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그녀가 하지 못하는 일 따윈 없다.

"딜 하죠."

-좋아.

그녀가 낄낄 웃었다.

-기대하고 있을게? 우리 학생회장.

* * *

그 문제의 결투 이후, 홍연은 자취를 감췄다.

전 운영부장 윤슬아는 홍연을 찾아 다니느라 진을 뺐다. 저택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홍연은 없었다.

그러다가 정보가 들어왔다.

전라남도 신안군의 작은 섬.

그녀는 생전 처음으로 바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왔다.

"저어, 계시나요?"

허름한 관리사무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경비원이 눈을 떴다.

"어엉? 누구여?"

"아카데미 학생인데요."

"아카데미? 사냥터 이용하려고? 에잉 쯧쯔, 문의라도 하고 왔어야지. 얼마간 섬을 통째로 전세 낸 사람이 있어. 미안하지만 다른 곳을……."

윤슬아가 손을 휘저으며 말을 잘랐다.

"아뇨, 아뇨. 사냥하러 온 게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왔는데 혹시 여기 홍연 안 왔어요?"

"홍연이 누구여?"

경비원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윤슬아가 흥분해서 말했다.

"아저씨 홍연 몰라요? 그 협회장 여동생 있잖아요! 약간 빨간 머리에 칼 들고 예쁘장하게 생긴 애!"

"아아, 맞어! 그 학생이 지금 여기 이용하고 있어!"

드디어 찾았다! 윤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만 나누고 올게요."

"누구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 어어? 잠깐!"

그녀는 등에 멘 가방을 바닥에 던져놓고는 사냥터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을 고양이처럼 능숙하게 기어올라갔다.

그렇게 철조망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오자.

'저기 있다!'

몬스터가 바글거리는 섬의 한복판을 걸어 다니는 홍연의 모습을 발견했다.

"회자아아아아앙!"

홍연이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철조망을 내려와 달려온 윤슬아가 그녀의 팔에 매달렸다.

"으아앙 회장!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톡도 안보고! 다들 얼마나 찾았는데!"

그녀가 공허한 눈으로 윤슬아를 바라보았다.

"전 이제 회장도 뭣도 아닙니다만."

홍연이 조용히 정정하자 윤슬아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도 뭐 이런 말 있잖아! 한 번 회장은 영원한 회장…… 아하하! 암튼 빨리 서울로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어."

홍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꽂아둔 검을 세웠다.

"조금 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8강전까지는 돌아가겠습니다."

"아, 그거 들었어? 네 16강 상대는 기권했고, 8강은……"

"예. 김유신 선배와의 재대결이더군요."

그때였다. 섬의 몬스터들이 소란을 듣고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 연아! 일단 도망치자! 내가 시간을……!"

윤슬아가 나서려고 하자 홍연이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김유신 선배에게 패배한 직후, 그런 무력한 기분은 처음 느껴봤습니다."

"……연아."

"사명감을 제외하고 생각하자면, 사실이 힘이 지겨웠습니다. 헌터가 되어야 하는 운명조차도, 앞으로의 제 미래도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플레이어로서의 그 무엇도 제 심장을 뛰게 하지 못했습니다."

스릉.

그녀가 들어 올린 검은 태양광에 반사되어 찬란히 빛났다.

"하지만 이제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직접 겪어보니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크게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마치 세상이 두 갈래로 갈라지듯,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붉은 선에 두동강 났고 섬의 나무들까지 모조리 반으로 갈라져 하늘 높이 떠올랐다.

윤슬아의 어깨가 전율로 떨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몬스터의 육편들을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던 홍연은, 조용히 선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는 김유신 선배를 꺾어야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