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51화
"연이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가지 주워서 좀 휘두르다 보면 그냥 검술 특성이 생겨. 그렇게 몇 번 더 휘두르다 보면 검의 신묘한 이치까지 깨우쳐 버리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농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반복 숙달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야. 세상의 그 어떤 무술이나 전투기술도 몇 번 만 휙휙 하다 보면 통달해 버려. 학습이 필요 없는 절대적인 성장. 그게 연이가 가진 고유 능력의 정체다."
"대단하네요."
협회장은 후, 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보이지? 내가 볼 땐 그건 그것대로 저주야."
"예?"
"그 능력은 원할 때마다 켜고 끌수 있는 게 아니야. 평생을 붙어서 떨어지지 않지. 그 '괴현상'이 인생 내내 지속된다고 생각해 봐. 어떻게 세상만사에 진지해질 수 있겠어?"
어느새 나는 몸을 기울여 협회장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럼 패배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게 설마……"
"맞아. 눈물과 절실함, 그리고 피흘리는 아픔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어. 걔가 제대로 된 노력을 해보겠어? 아니면 근성이 있겠어? 지금의 연이는 모티베이션이 없는 빈 껍데기일 뿐이야."
납득했다. 최강의 능력을 너무 이른 시점에 얻은 게 독이 된 케이스인가.
"세상의 축복을 몰아받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세상이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애를 키우니까 애 멘탈도 망가지는 거야. 내가 장담하는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그런 헌터는 오래 못 살아남아."
신이 내린 압도적인 재능.
하지만 재능만 너무 압도적이다 보니 헌터에게 필요한 다른 요소들이 성장하지 못했고, 심지어 결여되어 있는 게 지금 홍연의 상태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며 픽 웃었다.
"이번에 네가 연이한테 큰 충격을 선사해줬지."
"……아."
"동등한 조건에서 동등한 아카데미 학생과의 정면 승부에서 패배. 아마 충격이 컸을 거야. 전진뿐이던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으니 드디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겠지. 어쩌면, 너라는 새로운 벽을 넘어서기 위해 오기가 생길지도 몰라. 그 애에겐 여러 의미에서 패배가 절실히 필요했어."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협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렌즈를 낀 내 현인의 눈 쪽으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진다. 부담스러웠던 내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너 다음 8강전 대진표 봤냐?"
"못 봤는데요."
"새끼, 학생이 나보다 관심이 없어."
오늘은 포탈 고블린 사냥 준비로 너무 정신이 없었다. 이제 스마트폰을 켜서 확인해 보니 무려 4시간전에 8강 대진표가 확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장이 낄낄 웃었다.
"봤지? 너, 8강에서 또 내 동생이랑 붙어."
'이런 미친……'
어차피 올라가다 보면 한판 붙게 될 운명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또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할게 있는데."
"제안요?"
세상 거리낄 것 없는 또라이 협회장이 내게 제안이라……. 더럽게 부담된다.
"이번엔 네가 져줘야겠다."
"……?"
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설마 동생분 졸업 때문에 승부 조작 강요를……"
"그럴 리가 있냐, 븅신아!"
그녀가 팔걸이를 내려치자 소파 귀퉁이가 퍽! 하고 박살이 났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꼿꼿이 세워졌다.
"오히려 그 반대야. 나는 1년 정도만 더 연이가 학교에 남아줬으면 하거든. 이건 총장으로서의 욕심."
"……."
"뭐, 말 그대로 이건 그냥 내 욕심일 뿐이고, 이번 일이랑은 상관없어. 정확히는 네가 8강전에서 기권을 해줬으면 한다."
"어째서죠?"
그녀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지금의 넌 죽었다 깨어나도 연이를 못 이겨."
이번엔 내 눈썹이 꿈틀했다.
"8강전에서 연이는 제대로 칼을 갈고 나올 거야. 영상 보니까 기묘한 기술을 쓰긴 하던데, 전력을 다하는 연이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는 확실히 기습이었고, 운이 좋았다.
홍연과의 전력 승부. 그냥 친선 결투가 아니라 대련 룰에 입각한 공식전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뭣보다."
협회장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연이에게 있어 첫 패배를 안겨준 녀석이야. 네가 원했든 원치않았든 그렇게 되어버렸어."
첫 패배.
그 말의 무게감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이제 넌 연이한테 하나의 큰 벽인거야. 널 꺾겠답시고 열심히 준비하던데, 그렇게 독기 품은 얼굴은 나도 오랜만에 봤거든."
잠시 회상을 하는지 희미하게 미소짓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가 이번 8강전에 무참히 깨져 버리면? 결국, 연이는 이번에도 너무 쉽게 목표를 달성해 버리는 꼴이 되고, 기껏 세운 목표가 사라지게 돼."
"……."
그녀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이게 얼마 만에 생긴 벽인데? 이번 벽도 쉽게 깨지면 연이가 느끼는 후유증은 배가 될 거야. 세상만사에 허무감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르지. 걔라면 그러고도 남아."
극단적인 잠재력을 가진 내유외강의 플레이어.
그런 그녀에게는 이번 일이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협회장은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권해라, 학생회장."
협회장은 내게 기권을 종용한다.
"지금 이 상태가 딱이야. 연이와 싸우지 말고 때를 기다려. 가급적이면 네가 오랫동안 연이의 벽으로 남아줬으면 하거든."
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논지를 짚었다.
"제가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권하는 건 누가 봐도 싸움을 피하는 거고, 홍연이 그런 저를 제대로 벽으로 인식해 줄지는 의문입니다."
"……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그럼 잠적 좀 타줘."
…등골이 오싹해졌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벌여왔던 파괴 행각들은 잔혹하고, 또 기괴하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또라이나 사이코라는 이명이 따라붙은 거다.
"……뭐, 억측하지는 마. 그냥 어디 몇 년 정도 헌터 유학이라도 다녀오란 소리야. 대신 모든 비용은 협회에서 충당할 거고,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너는 내가 확실히 챙긴다."
"……."
조금 긴장이 가라앉자 머리가 굴러 갔다.
이례적인 제안이긴 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한국 최강이자,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헌터다.
몇 년 정도 해외에 나가 있는 것으로, 나는 헌터계 최고의 라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저는 비전투계 능력자였습니다. 지난 2년간 아카데미의 혜택을 받은 것도 별로 없고, 홍연과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왜 몇년을 더 희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기권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협회장의 시선이 나를 가늠해 보듯 움직였다.
"지금 네 고집 부릴 때야?"
몇 년 정도만 양보하면 앞으로 수 십 년이 편해질 기회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이번 조기졸업으로 헌터가 될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홍연이 어찌 되든 솔직히 제 알 바는 아닙니다."
홍연이 앞으로 헌터계에 미칠 영향력을 모르는 건 아니다.
"적어도 제가 갈 길은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들, 결국은 남의 사정이다. 내가 수년간 마탑을 묵혀두고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깟 패배감 때문에 사람을 마음대로 해외로 내보내겠다고? 그쪽이 막나간다면 이쪽도 신사적으로 나올 생각은 없다.
"……."
짙은 정적이 일었다.
저 괴물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는 전율에 몸이 떨린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 이건 배짱 싸움이다.
"…… 좋아."
마침내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가 났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웃고 있다. 그녀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내게로 휙 던졌다.
다른 건 없고, 딱 번호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업무용 아니고 내 직통. 생각 바뀌면 언제든지 전화해."
"……."
나는 조용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히 가세요."
"낄낄낄! 아, 고놈 진짜."
협회장이 유쾌한 미소를 흘리며 손을 흔들며 나갔다.
'하아아.'
살았다.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여기서 좀 세게 나간 이유가 있다.
그녀는 결국 내 협조가 필요하고, 나도 시작부터 헌터 협회에 찍히고 싶진 않다.
분명히 타협점은 있다.
하지만 이쪽에서 바로 타협안을 내놓는다면, 내가 받는 대가가 작아질 수 있다.
그녀 쪽에서 먼저 협상은 열려 있다고 밝혔으니 이건 호재다.
아, 물론 협회장은 나를 제대로 된협상 상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성깔 부리는 풋내기 정도? 그래서 목숨을 건진 건지도 모르고.
협회장이 가게를 나서자 매니저로 보이는 협회 직원이 굽신거리며 나타났다. 피해보상이 어쩌고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사 뒤처리하느라 고생이겠네.
나는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슥슥 문질러 닦고는 카페를 떠났다.
* * *
[한국 힐러연합은 포션에 대한 철저한 안전 검증이 필요하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라디오 뉴스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트럭 안, 운전기사는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었다.
"그래, 나중에 또 통화해. 지금 일하는 중이야. 주말에 한잔 또 걸치자고. 어, 그래."
통화를 마친 트럭 운전기사가 운전대를 돌렸다.
쿵!
"어이쿠, 깜짝이야!"
차체가 크게 덜컹거렸다.
어디 부딪치기라도 했나? 그가 백미러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터어엉!
이번엔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으아아악!"
끼이이이익!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옆으로 회전하더니 결국 근처의 건물에 부딪혔다.
"끄으윽!"
어마어마한 충격에 기사는 신음을 흘렸다. 이마에 피를 흘러나와 시야를 가렸다.
그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와장창!
유리창이 박살 나며 손이 불쑥 들어와 차 문을 열어젖혔다.
"누, 누구야?"
덥석!
단숨에 기사의 목덜미를 잡아챈 손이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기사가 신음하고 있는 사이, 검은 슈트를 입은 사람 넷이 주위를 둘러쌌다.
"좋게 좋게 가자."
아까 창문에 달라붙었던 남자가 기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스크 너머로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서, 서초구의 물류 창고."
"바이어를 대라."
"바, 바이어?"
"네가 싣고 있는 물건을 요구한 사람 말이다."
쩌억!
괴한 중 한 사람이 트럭을 맨손으로 뜯어냈다. 그 너머로 보인 것은 할리와 흑산 등 포션의 재료였다.
"……자, 잠깐만!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시키는 대로 물건을 전달받은 장소에 운반할 뿐이라고!"
마스크를 쓴 남자가 턱짓 했다.
"데려가."
쑤욱.
순식간에 뒤로 돌아온 한 남자가 기사의 목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기사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벌써 네 명짼데. 생각보다 단서가 없네요."
주사를 놓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건 철저히 양측 비밀을 보장한 형태의 외주 계약이라, 유통 회사든 운전기사든 이 물건이 포션 재료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밟을 꼬리가 좀 처럼 보이지 않아요. 이런 것들 턴다고 뭐가 나오겠습니까?"
"됐고, 일단 데려가."
마스크 쓴 남자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몸에 칼 좀 대면 생각나게 될 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