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50화
"허억! 헉!"
지상으로 내려온 뒤 한참을 달리고 있었지만, 녀석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쪼그만 게 왜 이렇게 빠른 건지 모르겠네.
-탑주, 모퉁이 너머에 다수의 마력반응이 감지됩니다.
"오케이."
드디어 따라잡은 건가. 그녀가 말한 모퉁이를 도는 순간, 나는 바로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이게 다 뭐야?"
무수히 많은 식물형 몬스터들이 분수대 공원을 정글처럼 점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고, 골목 쪽에서는 포탈 고블린이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샥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하여튼 넌 잡히면 각오해라.
"에아."
-검색 완료. 개체 수 18기. 식물형 몬스터 7종 확인 완료. 약점을 현인의 눈으로 표시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몬스터들의 신체 구석구석이 푸른 과녁으로 표시가 되었다. 나는 순간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카피 매지컬 포지션>
<스핀 가이드 에로우>
수십 발의 스핀 가이드 에로우 마법진들이 내 뒤에서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전개를 진행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자 식물형 몬스터들이 입을 벌리며 달려 들었다.
'완성된 마법진부터 사격 개시.'
사방팔방에서 회전하는 가이드 에로우들로 허공이 가득 메워졌다. 제멋대로 날아가는 듯했지만 화살은 정확히 표적에 박히고 있었다.
나는 식물형 몬스터들의 사이를 지나가며 계속해서 캐스팅에 집중했다.
놈들이 나를 노리고 달려 들었지만 어딘가에서 날아온 가이드 에로우들에 의해 줄기가 날아가고 몸체가 공격당하고 뿌리가 박살 나 쓰러졌다.
쉴드를 칠 것도 없었다. 주위의 식물형 몬스터들이 모조리 조각나며 무너지고 있었다.
[이동 시전 특성이 Lv.2에 도달했습니다.]
[마력이 3 올랐습니다.]
'크으으! 좋아.'
사실은 이동 시전 숙련도 연습이었다.
마나 몰입 상태를 깬 나는 눈을 뜨고 다시 고블린을 쫓았다. 아까 녀석이 있던 골목을 통과해 도로 쪽으로 나오자.
부우우우웅!
내 앞으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 트럭 위에 녀석이 올라타있었다.
"가지가지 하네."
이번엔 차량 추격전인가?
괜히 구질구질한 추격전으로 가기 전에 끝내야겠다.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나는 오른손과 오른발에 동시에 반씩의 마법진을 그린 다음, 오른손을 발밑에 맞닿게 했다.
시커먼 연기가 내 신발 밑창에서 올라왔다. 새로운 마법의 출력량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돌진 자세를 잡고, 그대로 마법을 발동했다.
<데바스타>
지면에 해골형상을 남기며 내 몸이 쏘아져 나갔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날아가는 순간에도 집중력은 최고조로 발휘되며 세상을 느리게 만들었다.
내 몸은 순식간에 달리는 트럭 위까지 도달했다. 고블린은 방심하고 있었고, 자루를 뒤적거리며 이번엔 어떤 걸 쓸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악물고 팔을 뻗었다.
딴짓하고 있는 포탈 고블린의 뒷덜미가 손에 잡히자, 망설임 없이 녀석을 밖으로 내던졌다.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오며, 포탈 고블린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콰아아아앙!
녀석이 건물 벽에 충돌했다. 나도 반동 때문에 날아갔지만 에아의 쿠션 쉴드가 여러 장 깔리며 피해를 최소화했다.
"끅, 하아아."
내장이 뒤집히는 기분이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포탈 고블린을 내던진 쪽으로 뛰어갔다.
-키시시시식!
녀석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드디어 잡았다."
내가 검지를 치켜들자, 지면에서 어스 클레이모어가 발동해 녀석의 두 어깨를 꿰뚫었다.
-키이이이이이이이익!
"날 개고생시켰겠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탑주님.
이어폰에서 정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래?"
-포탈 고블린의 몸은 비싼 자재입니다. 최대한 손상하지 않고 확보해야 합니다.
"쩝, 알겠어."
나는 녀석의 머리 위로 아이스 자벨린 마법진을 영창했다.
"고통 없이 보내주마."
포탈 고블린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덜덜 떨고 있었다. 음, 그런데 뭔가 좀 허전한데?
잠깐.
자루가 어디 갔지?
녀석이 들고 있던 자루가 보이지 않는다. 포탈 고블린에게서 가장 중요한 게 없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가죽자루가 도로 옆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 틈에!'
끝이 묶여 있던 가죽 자루가 돗자리처럼 확 펼쳐졌고, 그 안에 시커먼 포탈 같은 것이 펼쳐졌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것은 포탈이라고 하기엔 기괴했다. 마치 검은 호수가 허공에 펼쳐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미 내 아이스 자벨린이 포탈 고블린의 숨통을 끊었지만 저것은 멈추지 않았다.
-탑주, 위험합니다! 4랭크 기간테스! 5랭크 네스트! 5랭크 오델라스! 그 외에 5랭크 다수!
포탈 고블린이 5랭크 몬스터를 꺼냈다고? 이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쿠웅! 쿵!
그때 제일 먼저 포탈에서 몸을 드러낸 괴물이 있었다.
온몸이 이빨 같은 것으로 뒤덮여있는 그것은 새하얀 해골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6랭크 그란델! 피하셔야 합니다!
탑주!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란델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려는 그때.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허공에 새빨간 발톱 자국이 그려졌다.
"……!"
그 압도적인 붉은 칼날은, 검은 호수를 그대로 삼등분 해 대기 중에 흩뜨려 버렸다.
밖으로 나왔던 몬스터들의 육편이 잘려나가 하늘에서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전율했다.
살면서 이런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란델도 토막 난 자신의 동료들을 보며 멈춰섰다.
후웅.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새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여성이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란델이 발톱을 일으켜 팔을 휘둘렀지만.
어느새 그녀는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발톱의 반대 방향에서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바닥을 들어 그란델의 뺨을 톡 때렸다.
쩌어엉!
시뻘건 광채가 솟구치며, 그란델의 몸이 세포 한 조각까지 분해되어 사라졌다.
뒤늦게 몰아친 후폭풍이 뻗어 나가 저 멀리 보이는 산에 부딪히자 뿌옇게 모래 먼지가 올라왔다.
"……."
압도적이다.
일격에 6랭크 몬스터를 해치운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혀, 협회장님! 회의 중에 말도 없이 뛰쳐나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헌터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뭘 또 쪽팔리게 우르르 몰려오고 있어? 다 꺼져."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헌터들의 몸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멍해 있는 상태였다.
그때 그녀가 고개를 되돌려나와 눈을 마주했다.
몸에 착 맞는 진회색 줄무늬 정장을 걸치고, 아까 휘두른 한쪽 팔은 소매를 빼서 어깨에 걸쳐두고 있었다. 그 사이로 드러난 몸에는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마력 붕대가 상체 전반을 칭칭 두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나?"
그녀가 씩 웃었다.
"우리 학생회장."
헌터 아카데미의 총장이자 현직 헌터 협회장.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가 내 눈앞에 있다.
* * *
나는 근처의 카페에 들어와 있었다.
여기서는 유리창 너머로 내가 사고 친 흔적들이 실시간으로 정리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협회 소속의 도시 복구반과 스케빈저 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전투마다 헌터들이 그렇게 난리 치는데도 왜 별로 흔적이 남지 않는가 싶더니, 이런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여자.
소파 등받이에 거만하게 두 팔을 올려놓고 다리를 꼰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잘 해줬다."
협회장이 말했다.
"포탈 고블린의 부산물과 마정석은 네 거야. 5랭크 애들 것도 몇 개 더 얹어줄게."
"감사합니다."
잠시 조용히 창가를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소개가 늦었네. 내가 누군지는 아냐?"
"당연히 알죠."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당신을 모를 리가 있나.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야, 야. 비행기 태워줘도 뭐 안나와."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쑥스러워하며 손목을 휘휘 저었다.
"사상 최강의 노처……"
쾅!
앞에 놓인 테이블이 빛의 속도로 날아가 뒷자리의 유리창을 박살 냈다.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을 받으며 뒤를 돌아보자, 순식간에 수백 미터 상공으로 치솟은 테이블이 하늘의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쭉 뻗은 다리를 꼬며 싱긋 웃었다.
"왜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니?"
"…… 잘못했습니다. 제가 잠깐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봐요."
사과했다. 사과만이 살길이다.
그냥 이유 없이 뻗댄 게 아니라, 협회장은 이런 당돌한 컨셉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역시 인맥 소스는 믿을 게 못 되는구나.
"내 학교 학생이라 산 줄 알아. 다른 헌터 후배였으면 바로 반죽음이었어, 새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게 더 무섭다.
그녀가 카운터 쪽으로 팔을 휘두르며 '야! 여기 에스프레소 한 잔 더 내놔!' 하고 외쳤다.
물론 그녀의 난동에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원은 애처롭게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왜 능력도 좋고, 돈도 많고, 미모도 괜찮은데 저 나이까지 노처녀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떤 남자가 저 성깔을 감당해?
"암튼 만나서 반갑다, 학생회장. 네 소식은 여러 가지로 듣고 있어."
그녀가 다리를 바꿔 꼬며 말을 이었다.
"일단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네."
"예?"
"내 동생 참교육시켜 준 거 말이야. 영상 찾아 봤는데 그거 진짜! 푸하하하!"
다시 상기하는 거지만 홍연의 언니가 바로 이 협회장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동생이 당했다는데 배를 잡고 깔깔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게 감사받을 일인가요?"
"당연하지!"
그때 마침 점원이 덜덜 떨며 다가왔다. 허리를 바짝 숙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에스프레소 나왔습니다. 고객님.' 하고 중얼거렸다. 가엽게도 눈에는 작게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협회장은 돌아보지도 않고 커피잔을 집고는 가보라는 듯 손목을 휘휘저었다.
이때 점원의 사라지는 모습은 마치 해방되어 자유를 외치는 노예를 연상케 했다.
"사실, 지금의 내 동생한테 필요한건 승리가 아니라 처절한 패배였거든."
그녀는 한결 차분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걔는 뭐랄까…… 그래. 요즘 애들말로 하면 '재능충'이야.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심각할 정도요?"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가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돈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