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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48화 (48/337)

나 혼자만 마탑주 048화

-대상 침묵 확인. 고생하셨습니다, 탑주.

'수고했어. 이걸로 4학년까지 클리어네.'

서서히 자욱한 연기가 걷히며 슈트가 완전히 박살 난 채 쓰러져 있는 장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김유신 <1, 000/1, 000>

-장현진 <0/1, 000>

"승자는 2학년 김유신이다!"

직원이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와아아!"

"압도적이야! 4학년이 손도 못 쓰고 당했어!"

학생들은 환호했고, 스카우터들은 미친 듯이 노트북을 두들기거나 어딘가로 황급히 전화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체육관 무대에서 내려오자 진보라와 부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니이임!"

"수고하셨습니다, 회장."

신이 난 진보라가 나를 얼싸안으며 껑충껑충 뛰었다. 부회장이 내게 정중히 고개 숙이자, 나도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곧 졸업하신다니 아쉽네요. 퍼포먼스로는 역대 학생회장 중 최고인데."

"……하하, 부회장님은 조기졸업신청 안 하셨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웬만한 길드에 들어가도 이런 혜택과 대우는 어디서 못 받을 걸요. 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해 먹고 나가야죠."

그렇긴 하지. 마탑주가 되기 전에는 나도 어떻게든 아카데미에 붙어 있으려고 했으니까.

"선배니이임."

그때 진보라가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를 몇 주간 겪은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달콤함의 농도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진보라는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 그래?"

"첫 16강 이겼으니 기념 촬영 한 번 어때요? 부회장님도요! 새로운 학생회 임원들끼리 같이……!"

나는 즉시 리프 부츠를 밟고 도망쳤다.

* * *

마탑에 돌아오자마자 1층 로비의 황금빛 소파에 편안히 드러누웠다.

안락한 쿠션감에 기분이 더 없이 노곤해진다.

요즘 들어 나처럼 성공한 가면허 플레이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한민국 아카데미 학생회장에, 세계 유일의 마탑주에, 전 헌터계가 주목하는 알케미아 브랜드의 사장이다.

공식전 16강은 멋지게 승리했으며 이제 8강전을 남겨두고 있다. 사실상 이 8강전만 승리하면 조기졸업확정이고, 나는 특전으로 공인 5급 헌터가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탑주, 전에 말한 새로운 칵테일입니다."

"아, 고마워."

그리고 이렇게 편안히 소파에 누워미녀 호문쿨루스의 서빙도 받을 수 있다니.

출세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콜록! 켁!"

무척 익숙하면서도 이계적인 맛에 저절로 상체가 세워졌다.

"어떻습니까? 탑주."

"……이거 그냥 깻잎 물 맛인데."

"깻잎 모히또는 실패로군요. 레시피가 잘못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결단코 자기가 못 만들었다고는 말안 하네.

내가 보기엔 깻잎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은데. 국물 안에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다음엔 애플파이 소주에 도전해보겠습니다."

"……뭐?"

"다음 귀환 때 구매하실 재료 목록을 작성하겠습니다."

"그냥 물 마시면 안 될까?"

에아가 눈에 힘을 주었다.

"다음번엔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빠야, 오빠야."

로비에서 놀고 있던 은솔이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으며 앙탈을 부렸다. 그렇게 낯을 가리던 은솔은 요즘 마탑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모습이다.

"솔이도 그거 마셔볼래!"

그녀가 지옥의 깻잎 모히또를 향해 손을 뻗자 나는 다급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안돼! 이건 주스가 아니라 술이야."

"술? 나 많이 마셔봤어."

은솔의 충격 고백에 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 언제?"

"옛날에. 할렘가에서 아저씨들이 줬어!"

"……."

내가 왜 그 악마의 마을을 그냥 놔두고 왔을까. 그 인간들 찾아 가서 다 죽여 버리고 천국 가고 싶다.

"아무튼 앞으로 술은 절대 안돼. 솔이가 좀 더 크면 먹자, 알았지?"

"응!"

은솔은 다시 쪼르르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죽일까요?"

언제 왔는지 진보라가 섬뜩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악력으로 깨진 포션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그런 충동이 생기긴 하는데, 지금쯤이면 벌써 다른 곳으로 떠났겠지."

"어휴, 진짜. 몬스터는 싫지만, 이번 만큼은 그 사람들 붙잡아서 잘근잘근 씹어먹어 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보라가 아차싶은 표정으로 입을 톡톡 쳤다.

"나도 차암. 이쁜 말, 이쁜 말."

이 와중에도 내숭은 포기하지 않는 그녀였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아귀에 박살난 포션 병을 가리켰다.

"어머, 이게 왜 깨져 있을까? 닦을 거 가져 올게요!"

"제가 하겠습니다."

에아가 손을 휘젓자 병 파편이 날아올라 한데 뭉쳤다. 뒤이어 밀대가 허공을 날아와 바닥을 빡빡 닦았다.

마탑이 언제나 청결함을 유지하는 이유였다. 에아가 쓰레기를 버리러 간 사이, 나는 진보라에게 물었다.

"어제 예약받은 냉기 저항 포션은?"

"다 만들어서 입구 앞에 놔뒀어요. 어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고요."

그녀가 피곤한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포션 사업이 상상 이상으로 대박이 나버리는 바람에 진보라도 다른 관리자들 못지 않게 고생하는 중이었다.

"서진이가 유통라인 구축하면 레드엘릭서도 팔기 시작할 건데. 할 수 있겠어?"

진보라는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차라리 죽여주세요."

우리는 자급자족하는 단계를 넘어서 포션 대량 공급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진보라 혼자서 그 많은 물량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아! 포션 만들 사람을 더 뽑는 건 어때요?"

진보라가 제안했다.

"으음, 인력을 늘려서 일감을 나누는 것도 괜찮지만…… 역시 마탑에 대해 아는 사람은 무조건 적은 게 좋은데."

마탑의 '금제'가 만능은 아니니까 말이다. 비밀을 아는 사람의 수가 적은 게 최선이다.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해야겠군요."

로비에 앉아 있던 정서진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녀석은 깻잎 모히또에 빨대까지 꽂아서 쪽쪽 빨아 마시고 있었다.

……어우야.

저 깻잎 국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다니,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의견을 내며 고민해 보았지만, 결국은 보안 문제가 있더라도 1층 인력을 더 뽑자는 의견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의 부분에서 새로운 해결책이 나왔다.

"이 정도 작업이라면 골렘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3층 관리자 은솔이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해 준 것이다.

골렘으로 만드는 포션이라니! 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가능하다면 더할 나위 없는데. 정말로 될까?"

"응! 해볼게!"

은솔은 바로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작은 메모장을 들고 쪼르르 뛰어왔다.

"새로운 골렘을 만들려면 이 재료들이 필요해!"

"재료?"

"응!"

"그거야 당연히 마탑주가 구해줘야지."

그 말에 은솔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메모장에 적힌 재료 리스트를 보았다.

뭐, 대부분은 정서진의 유통 루트나 E-마켓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던전에 직접 가서 부산물을 구해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윽, 한 덩이에 3천만 원?'

플라키루스의 관절. 이건 E-마켓에서도 재고가 거의 없었다.

말랑말랑한 살덩이 따위가 뭐 이리 비싸단 말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건 대체 재가 없을까?"

은솔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내가 가리킨 플라키루스의 관절을 보았다.

"응, 이것만큼은 대체재가 없어."

"그, 그래?"

"포션 제조는 섬세한 작업이라서 골렘의 팔이랑 손 관절에 들어갈 재료가 중요해."

왜 이렇게 비싼 지 알아보니 주로 고급 슈트의 관절 부위에 들어가는 필수품인 모양이었다.

포션 판매로 돈이 들어오고 있긴 하지만, 그 수익은 전부 사업예산으로 빠지고 있었다. 아직 사업 초반이라 이쪽도 빠듯했다.

이건 따로 자금을 내야 할 것 같은데…… 그때 은솔이 귀신같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안돼?"

크흑.

그녀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려온다. 갑자기 상황에 몰입된다.

가난한 살림에 하나뿐인 딸이 값비싼 수학여행 통지서를 들고 왔지만,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안 가도 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딸이 있으면 어떤 부모가 수 학여행을 안 보내겠는가. 빚을 내서라도 보내지. 젠장.

"아냐, 아냐. 구할 수 있어."

"정말? 고마워 오빠야!"

신이 난 은솔이 방방 로비를 뛰어다녔다.

아빠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로비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는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아."

"예, 탑주님."

"내가 무슨 말하려는 지 알지?"

"돈 될 만한 재앙을 찾아 보겠습니다."

역시 말이 잘 통한다니까.

열심히 노트북을 두들기며 좌표계산을 하던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찾았습니다! 돈 될 만한 재앙."

* * *

휘이이이이이잉!

나는 뜬금없이 강남의 한 빌딩 옥상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쌩쌩 불어닥쳐서 추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모습이 한없이 작고 까마득하게 보였다.

어휴, 아찔해라. 나는 귀에 낀 이어폰을 붙잡고 말했다.

"진짜 여기가 맞아?"

-좌표상으론 확실합니다.

정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야! 화이티잉!

뒤이어 은솔의 목소리도 들렸다.

학생회장의 권한으로 아카데미의 헌터용 통신 장비를 빌려서 착용해봤다.

마탑에 있는 두 사람과 대화할 수 있었고, 옷 앞섶에 장착한 초소형카메라를 통해 그들도 내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균열은 처음이라 긴장되네.'

도시에서의 몬스터전은 '균열'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던전은 지구와 몬스터들의 서식지가 연결되는 현상이고, 던전 내부의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일정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균열은 도시 한복판에 열리고, 그 안에서 즉시 몬스터가 떨어진다.

균열은 관측 가능한 것과 관측 불가능한 것이 있는데, 정서진이 이번에 밝혀낸 균열은 비관측 균열이었다.

협회에서 관측에 성공했다면 균열이 나오기도 전에 헌터들을 주위에 배치해 놨겠지.

뭐가 됐든 좋다. 와라.

순순히 은솔의 수학여행…… 아니, 골렘 재료를 뱉어내라.

-탑주, 대기의 마력 흐름 변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이어폰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선명한 에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렸다.

"좋아, 준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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