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47화
"선배님! 선배님! 드디어 나왔어요! 아일라 길드가요!"
노트북 영상을 보고 있던 진보라가 소리쳤다.
아침 일찍 일어나 깡 생수를 들이 켜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노트북으로 뛰어갔다.
"클리어했대?"
"네! 균열은 사라졌어요."
엄청난 기자 인파들이 몰려들어 던전에서 귀환한 길드원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다들 질척이는 녹색 액체 같은 것을 온몸에 끼얹은 모습이었고, 뒤편에는 구급차에 실려 이동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와아아아아!]
귀가 먹먹할 정도의 환호성과 함께, 이날 최대의 영웅이자 아일라길드의 대표인 안세현이 등장했다.
그 역시도 온몸이 질척이는 녹색액체로 가득했다. 갑옷 상당 부분은 부식된 듯 녹슬어 있었고 상당히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안세현입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반듯한 자세와 표정으로 돌아왔다. 목소리에도 생동감이 생겼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악몽의 늪은 어떤 던전이었습니까?]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늪지대 지형이라 기동성을 살려서 빠르게 늪을 돌파할 수 있는 장비로 세팅했는데, 사실은 독극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 같은 곳이었습니다. 길드원 전원이 헤엄쳐서 건너야 했고, 그 상태로 몬스터들과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수중 전투가 능한 멤버들을 기용했더라면 더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대단하네요! 던전 공략에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면요?]
[보스전보다 늪지대의 독성이 더 까다로웠습니다. 길드원 모두가 중독 효과에 힘들어했고 최악의 컨디션으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아.]
안세현이 코트를 뒤적거리다가 빈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 저희 길드에 협찬으로 들어온, 해독 효과가 있는 포션입니다.]
그가 병 주변을 빙 훑으며 브랜드를 찾았다.
[음, 알케미아라고 하는 곳인데요.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포션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겁니다. 나중에 꼭 한번 찾아 뵙고 감사의 말씀 드리고 싶네요.]
"꺄아아아악!"
옆에서 진보라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선배님! 들었어요? 들었죠? 5위 길드의 대표가 우리한테 고맙대요!"
"……하하. 진정해."
"게다가 찾아와서 직접 인사하고 싶다니! 와아아! 어쩜 좋아? 진짜!"
인터뷰는 계속 되었다. 포션에 대한 이야기가 더 나와줬으면 좋았겠지만, 기자들의 질문은 바로 문태영 영입 이슈와 연애설 건으로 넘어가 버렸다.
뭐, 이 정도로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송이고, 이 한 마디의 파급력은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력을 몸소 느끼게 되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안세현 인터뷰와 인터넷 반응을 돌려보고 있던 진보라가 다시 꽥 소리질렀다.
"선배님 대박! 포털사이트 검색어순위 10위에 '포션'이 올랐어요!"
"축하드립니다, 탑주님."
어느새 로비로 내려온 정서진도 씩 웃으며 E-마켓 화면을 보여주었다.
"난리도 아니군요."
문의 글이 미친 듯한 속도로 빗발치기 시작했다.
* * *
돈이 들어온다. 돈이 미친 듯이 들어온다.
안세현 인터뷰 당일 '중독 저항 포션'이 병당 200만 원, 하루 만에 도합 4, 000만 원을 벌었다.
그리고 스노우 길드와 칼란 길드가 냉기 속성 던전 동시 공략 때문에 포션 경쟁이 터져서 병당 500까지 치솟았고,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하루 만에 1억 가까이 되는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다만 시장 반응은 여전히 갈렸다.
[새로운 헌터 용품! 포션에 대한 고찰.]
[바람 같이 나타난 포션 능력자의 정체는?]
[아일라 길드, 포션 능력자 영입의사 있다.]
[E-마켓 미국 본부, 판매자에 대한 개인 정보 제공은 불가.]
[요즘 핫한 상태 이상 포션! 믿고 마셔도 되는가?]
[한국 힐러연합, 포션은 품질이 보증되지 않은 물건. 부작용 심각히 우려.]
아직 상태 이상 포션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반반이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신뢰성. 이부분은 시간이 조금 지나야 해결될 것 같다.
그리고 상태 이상 저항 포션 자체가 아직 '하급'에 불과했기에, 높은 레벨의 상태 이상과 만났을 때는 그 효과가 떨어진다는 단점도 드러났다.
그런데도 정서진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린 급할게 없습니다. 일단은 E-마켓 사업에 주력하면서 천천히 유통 루트를 구축해 나가죠."
이번 대박으로 가장 신이 난 건 정서진이었다.
E-마켓을 통해 확보한 자본으로 빠르게 포션 대량생산을 위한 절차들을 밟아나가는 중이었다.
점포 운영이나 헌터 용품 입점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보안 문제라는 선결 과제가 있었다.
그래서 E-마켓 외의 시장 진출은 최대한 천천히 하기로 했다. 현재각 길드와 대기업에서 눈이 시뻘게 져서 포션 능력자를 찾고 있었다.
"오늘 포럼 봤어? 한국에 포션 능력자가 나타났대!"
"쓰읍, 부럽다. 그 정도면 거의 돈을 연성해 내는 능력 아니냐?"
"진짜."
"언젠가 나도 써볼 수 있겠지?"
"꿈 깨셔. 그거 E-마켓 한정 판매라서 계속 매진이래."
나는 지금 아카데미에 와 있다.
건물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포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꽂힌다.
아직 프로 헌터도 아닌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정도 영향력이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아이템 하나하나에 민감한 헌터들은 더 민감하게 반응할 터.
조금씩이지만, 내가 헌터계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네.'
마탑은 마탑대로 잘 풀리고 있다.
이제는 내 개인 활동에 집중할 차례다.
나는 아카데미 건물에서 벗어나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오오! 저기 왔다!"
"새로운 학생회장!"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관중석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보인다.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쏟아졌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하나. 바로 조기졸업 시험 때문이다.
조기졸업 시험은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큰 이벤트다.
총 일주일 동안 치러지게 되는데, 16강부터 시작해서 4강까지 살아남으면, 그 4명은 자력으로 조기졸업자격이 주어진다.
졸업만 한다면 헌터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시장에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치르게 될 경기는 16강전이다. 체육관 무대 위로 올라오자 내 상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홍연과의 결투 잘 봤어, 회장."
머리를 뒤로 묶어서 치렁치렁 늘어뜨린 남자. 꽤 그럴듯한 헌터 슈트를 입고 있다.
"4학년 장현진이라고 해."
"김유신입니다."
"함께 싸우게 돼서 영광이야. 솔직히, 대진표 보고 그냥 기권할까 생각했는데 너랑 싸워본 경험 자체가 좋은 커리어가 될 것 같아서."
키이이이이잉!
슈트 곳곳에 박혀 있는 마정석이 회전하며 푸른빛이 일었다.
몬스터의 부산물과 현대 과학이 합쳐져서 탄생한 헌터 전용 배틀 슈트. 상당히 고가의 제품으로 보인다.
본래 아카데미의 친선 결투에는 개인 슈트를 입을 수 없지만, 지금은 공식전이다. 규정에 맞기만 하면 어떤 장비도 착용할 수 있다.
물론 룰은 여전히 상대방 마나 슈트 게이지를 0으로 만드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지만, 장현진은 자신의 슈트 안에 마나 슈트를 껴입고 있었다.
아주 작정하고 나왔군.
"네 장비는?"
"전 괜찮습니다."
시설 직원에게 마나 슈트를 받아바로 몸에 걸치자, 장현진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괜찮겠어? 홍연과의 전투에 대해선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한마디로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실은 마땅한 장비가 없어서요. 원래 무기는 잘 안 쓰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그런 거라면 뭐……"
머리를 긁적이던 장현진의 눈빛이 한 순간 진지해졌다.
"나도 4학년이고, 순순히 질 생각은 없어. 한 수 부탁한다, 회장."
"잘 부탁드립니다."
나와 장현진이 전투자세를 취했다. 시설 직원이 다가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2학년 김유신과 4학년 장현진의 조기졸업 16강 공식전을 시작한다."
우레와도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내 이름이 사방에서 연호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고 있는 게 마치 홈그라운드에 온 기분이다.
삐이이이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버저음이 울려퍼졌다.
"뭘 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
시작하자마자 장현진이 검을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속도가 상당해서 마치 잔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상대는 가속계열 능력자입니다, 탑주.
'오케이.'
나는 오른팔을 세우고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원격 시전으로 쉴드를 꺼냈다.
그러나 장현진은 잘 훈련된 플레이어임을 증명하듯, 가속 상태에서도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내게 다가왔다.
단순히 빠른 것만이 아니라 반사신경도 우수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장현진이 경쾌하게 검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나는 어깨를 옆으로 트는 것으로 간단히 공격을 피해냈다. 방어 기술도 아니고, 그대로 피해 버릴 줄은 몰랐는지 장현진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어지는 동작으로 건틀릿을 두른 오른손을 내질렀고, 그는 대경실색하며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터어엉!
푸른 불똥이 튀어 오르며, 장현진의 몸이 뒤로 수 미터나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가드의 반동으로 팔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크으으…… 이게 말이 되냐? 체술이 약점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아니죠."
방금의 격돌로, 장현진은 애초 생각하고 있던 전략의 큰 틀을 수정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덤벼들지 못했고, 나는 느긋하게 마법을 캐스팅했다.
"안 오시면 제 주특기로 갑니다."
<파이어 캐논>
화르르르르르륵!
에아가 준비하고 있었던 마법에 내가 연산 마무리를 거드는 것으로 빠르게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장현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가라.'
사줄 지시에 따라 화염구들이 순차적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장현진은 가속 능력을 사용해 옆으로 내달렸다.
콰콰콰쾅!
퍼어어어어어엉!
사방에서 폭발이 터져 나오고 불길이 솟구쳤다. 건틀릿을 정면으로 받아낸 부담이 아직도 있는지 속도가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에아의 타겟팅은 무작정 장현진 본인을 노리는 게 아닌, 고난도로 계산된 공간 위주 폭격이었다.
이것은 조금씩, 그러고 확실히 데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보았다. 벌써 장현진의 슈트의 게이지가 절반 정도 깎여 있었다.
마나 슈트를 갑주 위에 입었다고는 하지만, 갑주에 충격을 가하면 몸에 오는 데미지를 마나 슈트가 받는 식이다. 어쨌거나 데미지 계산은 확실히 적용되는 셈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경고. 상대의 장비가 과부하되고 있습니다.
키이이이이이잉!
불길 속에도 갑주의 마정석이 돌아가는 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초보 헌터들은 슈트를 본인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장현진은 장점을 더 극단적으로 살리기 위한 것으로 선택한 모양이다.
나는 현인의 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며, 내 발밑으로 마법진을 깔아두었다.
그리고 파이어 캐논에 의해 슈트게이지가 20%를 남겨둔 시점에, 그의 몸이 빛살처럼 돌진해 왔다.
슈콰아아악!
빠르다.
하지만 현인의 눈으로 포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뒤로 살짝 물러나며 검지를 위로 끌어올렸다.
<어스 클레이모어>
콰드드드드드득!
체육관 바닥을 뚫고 올라온 지면의 검이 내 앞으로 쭉 세워졌다.
예상치 못한 기술에 반응하지 못한 장현진은 자신의 압도적인 속도 그대로 암벽에 부딪혔다.
쿠웅! 하고 체육관을 뒤흔드는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커헉!"
갑주의 삼 분의 일가량이 부서졌다. 그대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충격이었겠지만, 장현진은 불굴의 의지로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눈의 초점이 살짝 풀린 그가 다음 공격을 준비했지만, 깔끔한 몸 상태의 내가 새로운 마법을 펼치는 게 더 빨랐다.
<쉴드>
비틀거리며 물러나려는 장현진의 등을 쉴드로 가로막았다.
<쉴드>
<쉴드>
<쉴드>
이어서 검을 쥐고 있는 팔을 쉴드두 개로 고정하고, 다리, 허벅지, 옆구리에 쉴드를 깔아 역장의 감옥을 만들었다.
원격 시전과 가속 시전의 숙련이 수준급으로 올라 가능한 묘기다.
"이익……!"
장현진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쉴드를 펼친 오른손을 내린 내가 이번엔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에아가 준비한 파이어 캐논 마법진들이 장현진의 주위에 펼쳐졌다.
"우오오오오오오!"
관중석에서 열렬한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처형식이다.
흥분한 관중들의 열기를 느끼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이글거리는 화염구들이 마법진에서 발사되는 동시에 쉴드를 해제했다.
고정됐던 장현진의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쾅!
화염구는 회피 불능의 적을 집어삼키며 대폭발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