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45화
내가 반격에 나서자 길연우가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전력 외 학생들도 우리와 같은 플레이어입니다. 약간의 장비만 갖춰진다면 최하위 1랭크 몬스터 정도는 혼자서도 사냥할 수 있어요."
실제로 나도 그랬으니까.
"생각해 봐요. 전투계 능력자인 여러분도 1랭크 몬스터 잡을 때 어땠는지. 그때부터 고유 능력 활용해서 몬스터 잡았어요? 그냥 다들 삼단봉에 마나 코팅 두르고 때려잡았지."
이번엔 내 주위의 몇몇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학교란 곳이 학생이 성장할 기회를 박탈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박탈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막는 겁니다! 몸을 만든 뒤에 사냥을 하든 뭘 하든 해야지!"
"저도 그런 똥 같은 인식 때문에 2년을 깡그리 날렸죠."
역시 밑바닥을 겪어본 사람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전력 외 평가받고 몸 만들며 지냈던 지난 2년보다,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최근 한 달이 제게는 더 의미 있었어요.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같잖은 안전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내 주장을 이야기했지만, 길연우는 대단한 논리도 없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누가 봤더라면 '쟤 왜 저렇게까지 해?' 라고 생각할 정도로 바락바락 우겼다.
하지만 토론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결국, 그쪽이 말하는 주장의 근거는 '비전투계들은 1랭크 몬스터를 못 잡는다.' 라는 거잖아요? 그럼 바로 도입하지 말고 시범 운영을 해보죠. 비전투계 인원들 뽑아서 감독관 붙이고 던전에 보내봅시다."
"그, 그건……"
"왜요? 이것도 싫어요?"
나는 명백한 비웃음을 흘렸다.
"논리도 없고, 근거도 없고, 뱡향성도 없어. 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시나?"
"……이, 이!"
분위기는 거의 다 넘어온 것 같다.
그럼 이제.
"낙하산이라 각오는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렇게까지 신인 회장 기죽이기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길연우의 반대쪽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부진 몸의 4학년, 기획부장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계속 길연우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길연우가 기획부고, 이 사람이 그 선임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초면에 죄송하지만 기획부장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한테 이러시는 거 아니죠?"
당연히 길연우의 표정은 썩어들어간다.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한 모양인데, 격의 차이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학생회장이다.
기획부장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팀원 관리 못한 건 죄송합니다만, 그런 의심을 하시면 저희도 조금 불쾌한데요."
"제가 지금 의심 안하게 생겼어요?"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실은 회의 전에 길연우 씨랑 만났거든요. 갈림성 던전 인원이 꽉 차서 제가 갈 던전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그거 진짜 스케쥴 꽉 차서 그런 거 맞아요?"
웅성웅성.
부회장이나 다른 임원들은 완전히 처음 듣는다는 눈치였다. 길연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길연우 씨의 파티 제안을 거절하니까 뭐라 하셨더라. 던전 출장을 취소해 버린다고 했었지 아마? 게다가 내가 제출한 조기졸업을 없던 걸로 만들겠다고 하시던데. 이야, 기획부 무섭네요."
기획부장은 시뻘게진 얼굴로 길연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죄송합니다."
기획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였다.
"이번 일은 철저히 진상 규명해서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쉽다. 위에 올라와서 상대를 찍어 누르는 건.
나는 아카데미의 최정점에 돌아섰고, 잠깐이지만 이곳을 좌지우지할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의 학생회가 어떤 곳인가.
엘리트 헌터계 라인의 핵심. 어마어마한 자금의 유동을 관리하는 실세.
이곳에 올라서서 얻을 수 있는 재화와 인맥과 권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나야 뭐 곧 졸업할 생각이라 두려울 게 없다. 잃을 게 많으신 분들은 어쩌겠는가?
내 깽판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닥치고 숙이셔야지.
다시 회의는 재개됐고, 나는 모두에게 의견을 구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부회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대로는 비전투계 특별 전형 자체가 무의미할 지경입니다. 그들에게도 성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1랭크 구르마 사냥터 던전 출장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찬반 논의에 들어갔다.
이미 분위기는 내 쪽으로 넘어왔고 과반수가 찬성. 공식 안건으로 고려 하기로 했다.
서기가 자료들을 가져오는 사이 회의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기획부장은 길연우에게 퇴실 조치를 내리고는 함께 자리를 비웠다.
피바람이 불겠구만.
나는 부회장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동의해 줘서 고맙습니다. 선배."
"아니에요. 저도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니까요."
"근데 이렇게 쉽게 정책을 바꿀 수 있는 거라면, 왜 그동안 안 해준 겁니까?"
사실이 학교에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녀는 무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학생회에 '전력 외'였던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아하.
이 학교의 학생회에 들어올 정도라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 밑바닥 플레이어들의 권리를 대변할 사람 따윈 없었을 것이다.
다들 뭐라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입안하려고 하지, 곧 퇴학당할 애들을 누가 신경 쓰겠는가?
그렇게 서기가 자료를 가지고 와서 회의는 다시 속행했다.
첫 학생회 업무지만 특별히 어려울건 없었다. 우리는 정식으로 안건을 등록 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다 끝났죠?"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체육부장, 총무부장, 운영부장이 현재 공석입니다."
"흠, 인사권은요?"
"물론 회장에게 있습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진보라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하여간 권력 주의자……. 뭐, 저기 계속 서 있는 게 불쌍하기도 하니까 기분 좀 내볼까.
"그럼 한 명은 지정해서 앉힐게요. 총무부장에 진보라."
짝짝짝.
학생회 멤버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진보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가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당황한 척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광소를 내지르고 있을 것이다.
오늘 SNS에 올릴 거 하나 챙겼네.
"나머지 두 공석은 체육부 운영부쪽 선임자분으로 결정해서 해주십쇼. 자리 욕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결투로 승부를 봐도 좋습니다. 총무부장 자리도 마찬가지로."
화사하게 웃고 있던 진보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쫄지 마. 쫄지 마.
방금 스탯창 스캔해 봤는데 여기서 널 이길 만한 애들 거의 없더라.
"다른 안건 없으면 여기까지만 하죠."
그렇게 내가 회의를 끝냈다.
모두가 짐을 챙겨 돌아가고 있는데, 부회장이 내게 다가왔다.
"생각보다 잘 하시네요."
"고맙습니다. 그보다 부회장…… 아니, 선배.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라면?"
"회장 전권을 위임하겠습니다. 아마 저, 남은 임기 동안 학교에 거의 안 나올 거예요."
이제 학생회도 장악했겠다. 조기졸업 전까지는 던전 출장 스케쥴 잡아놓고 마탑에 틀어박혀 3공정 마법연구나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 생각보다 덤덤하시네요?"
"전 회장 홍연도 그렇게 했거든요. 학교에 온 날보다 안 온 날이 훨씬 많았어요."
익숙하셔서 다행이네. 난 더 심할지도 모르지만.
"그럼 다음 회장 자리는 선배가 하실 거죠?"
"저는 안 될 거예요."
그녀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이란 자리는 어느 정도 스타성도 받쳐줘야 하거든요. 바로 회장님처럼요."
"……?"
그녀는 그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선 등을 돌렸다.
* * *
마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뻗어버렸다.
안락한 쿠션감에 긴장감이 한없이 풀어진다. 역시 '집'에 왔다는 느낌은 기분 좋다.
"귀환하셨군요, 탑주."
허공에서 빛의 입자가 모여들며 아름다운 은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에아는 쟁반에 음료를 한 잔 받치고 있었다.
"응? 뭐야?"
"웰컴 드링크로 만들어봤습니다. 블루 레몬에이드입니다."
잔을 건네받았다. 마탑에 있던 소품답게 고풍스러운 유리잔에 청량한 파란 음료가 담겨 있었다.
"오! 이거 칵테일이잖아? 어떻게 만들었어?"
"어제 탑주가 사온 편의점 식음료를 조합해서 만들어봤습니다."
구글에서 레시피 검색해서 만든 모양이다. 편의점 재료로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신기하네.
나는 바로 한 모금 마셔보았다.
'오, 이거 괜찮은데.'
톡 쏘면서도 달달한 맛이 일품이다. 작게 부순 얼음이 목 넘김도 훌륭했다. 편의점 식음료로 만든 것치곤 퀄리티가 썩 괜찮다.
시선을 돌리자 에아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어때요? 어때요?' 하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빛이다.
"맛있어."
"흠, 당연합니다."
에아가 팔짱을 끼며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귀환하실 땐 편의점에서 사이다와 레몬, 깻잎을 부탁드립니다."
"……깻잎? 뭘 만들려고?"
"깻잎 모히또 칵테일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아니, 그건 또 무슨 혼종이야.
에아는 지난 10년간 탑에 갇혀서 인터넷 세계로만 세상을 접했다.
이제 내가 가지고 오는 물건들로 이런 저런 지적 호기심을 해소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칵테일을 홀짝이다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솔이는?"
"3층에서 새로운 골렘을 개발하는 중입니다."
"아직도? 되게 열심히 하네."
3층 관리자가 된 은솔의 성장은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이제 머드 골렘 정도는 간단하게 척척 만들어낼 수준에 이르렀고, 그녀만의 독창적인 골렘 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기계 공학 분야와 헌터 장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는데, 과학기술과 마법 공학을 결합한 파격적인 결과물을 내서 모두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불러올까요?"
"아냐, 됐어. 좀 이따 내가 올라가 보지 뭐."
은솔은 골렘을 만들 때 무척 행복해 보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오셨습니까, 탑주님."
고개를 돌려보니 퀭한 얼굴의 정서진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어쩐지 얘는 볼 때마다 다크서클이 짙어지는 느낌이다.
"야, 그러다 죽겠다. 쉬엄쉬엄해."
"사업 초기니 바쁜 건 감수해야죠. 그보다 결재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정서진은 내가 보기 좋도록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그가 지금까지 처리한 엄청난 업무량에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마탑주인 나보다 관리자 녀석들이 더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아니, 열심히인 정도를 넘어서 헌신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조금 얼떨떨하다. 아직 월급을 준 것도 아니고, 대단한 동기를 부여해 준 것도 아니다.
단지 마탑의 관리자 자격을 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주다니, 모두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재료는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될까요?"
"물론이지. 수고했어."
"그럼 내일부터는 점포 대여와 입점 계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쪽은 진짜 돈 더럽게 깨질 텐데."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파주 사냥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자금난은 조금 나아질 겁니다."
그나마 우리가 점유한 사냥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현재 우리는 사냥터 관리 업체와 계약을 맺었고, 협회 심사를 준비중이다.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냥터를 굴리기 시작하면 안정적인 수입처가 생긴다.
하지만 역시 사냥터 수입만으로는 모자란 감이 있다.
"서진아."
"예."
이쯤 되면 슬슬 생각해 둔 계획들을 시작할 때도 됐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당장 포션 판매도 병행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