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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44화 (44/337)

나 혼자만 마탑주 044화

친선전에서 홍연을 쓰러뜨린 다음 날 아침.

-꺄아아아악! 오호호홋!

폭주한 진보라의 웃음 소리가 연신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선배님 너무 멋있는 거 아녜요?

"……그만 좀 해라."

그녀는 한 가지 소재로 삼십 분 내내 미친 듯이 떠들고 있었다.

-아니, 진짜 미쳤잖아요! 그 학생회장 홍연을 발차기 한 번에 뙇! 폭풍의 전학생 루트를 완벽하게 밟고 있어요!

"……재학생이라고."

-아카데미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고요! 그 열등생 김유신이 홍연을 잡다니! 우하하!

그렇지 않아도 아카데미에 와 있는 상황이라, 캡 모자에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중이었다.

"기습이었어, 기습. 상대는 방심하고 있었고, 딴에는 배려해 준답시고 무기도 안 뽑았다가 필살기 한 대 제대로 얻어맞고 진 거지. 실전이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몰라."

-후후! 거기에 겸손함까지! 이긴 건 이긴 거라고요! 회장 벽에 처박혔을 때 표정 봤어요? 진짜 속이 다 시원……!

"끊는다."

-앗, 선배니임!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눌렀다. 이 녀석의 템포에 맞추려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모자를 한층 더 눌러 쓰고는 캠퍼스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후우우, 그건 그렇고 이제 아카데미 생활도 끝이 보이는구나.'

"거기 잠깐, 잠깐만!"

그때, 등 뒤에서 높은 볼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뒤를 돌아보니 반듯한 인상의 남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2학년 김유신 맞지?"

다짜고짜 말부터 놓는 걸 보니 상급생인 모양이다.

"그런데요."

"맞구나! 계속 찾고 있었어. 난 학생회 3학년 길연우라고 해."

학생회였나? 생각보다 거물이네.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벽 뒤에 숨은 채 긴장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는 여학생 두 명이 보인다.

"하하! 다른 게 아니라 너 내일 '갈림성' 던전 출장 잡혀 있지?"

"네."

"미안하지만 갈림성에 인원이 너무 많이 몰렸거든. 초과되는 인원은 부득이하게 출장권을 분할해서 다른 던전으로 옮겼어. 내일 넌 '달그림자 숲'에 가게 돼."

뭔가 냄새가 났지만, 그냥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길연우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제 곧 개별 공지가 갈 건데, 네겐 학생회를 대표해서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일부러 말해주러 오셨다니 감사하네요."

"하하! 그래서 말인데, 나도 내일 달그림자 숲에 가거든? 혹시 괜찮으면 우리 파티에 들어오지 않을래? 이미 네 명 정도 모아놨어."

……그럼 그렇지.

홍연과의 결투 이후, 메신저를 통해 날아오는 수 많은 파티 제안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전부 거절하거나 무시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자기 권한을 악용해서까지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나는 벽 뒤에 숨은 여학생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느끼며 말했다.

"먼저 가기로 약속한 파티원들이 있어서요."

길연우의 인상이 굳어졌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게 무슨 뜻인진 알겠지. 나는 가볍게 묵례하고는 등을 돌렸다.

"잠깐."

길연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굽신거리던 녀석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막 던전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파티를 구했다고?"

"네."

"지금 장난해?"

나도 완전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학생회랍시고 멋대로 남의 일정을 바꿔서 자기랑 맞추는 건 장난이 아니고요?"

그 말에 길연우가 움찔했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그 발언은 그냥 듣고 넘기기 힘든데. 지금 학생회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하는 건 피차 마찬가진데요, 뭘 "

뻔한 수작엔 뻔하게 대응할 뿐이다.

길연우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자들 앞에서 망신당한 게 쪽팔렸는지 격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금 홍연을 잡았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녀석은 훙분해서 줄줄 내뱉었다.

"당장 내일 던전 출장부터 취소해봐? 아니, 기왕 하는 거 제대로 전산 오류 내서 조기졸업 신청도 없던 일로 만들어줘? 이게 진짜 누굴 믿고 까부는……"

"거기!"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우리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깔끔한 무채색 코트에 안경을 쓴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윽, 부회장?"

길연우의 입에서 놀란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이 사람이 부회장이구나.

"너 또 여기서 뭐 해?"

부회장이 길연우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길연우는 별로 좋은 평판은 아닌 모양이다.

"아하하! 벼, 별일 아니었어! 그냥 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길연우는 업무 핑계를 대며 사라졌다. 도망치는 길연우의 모습을 바라보던 부회장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괜찮아요. 별일 없었습니다."

"김유신 학생, 맞죠? 그래도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네요."

"부회장님도 절 찾으셨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회는 어떻게 사람 위치를 이렇게 다 알지."

"교문에 붙어 있는 센서가 학생증정보를 읽어서 학생 출입을 기록 하거든요. 출입 떴을 때 동선 고려해서 뛰어왔죠."

"……어쩐지. 그런데 제겐 무슨 용무로 오셨어요?"

"아."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이야기할게 아니라 학생회실로 같이 가요."

"……?"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걸까?

결국 나는 그녀를 따라 학생회실까지 들어왔다.

"그럼."

학생회실에 들어온 그녀가 빙글 몸을 돌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학생회장."

"네에에?"

갑자기 뭐라는 거야?

내가 멍한 반응을 보이자 부회장은 서류 한 장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전 학생회장은 사퇴했습니다. 이제부터 김유신 학생이 회장입니다."

"……."

잠시 충격에 멍해 있던 나는 황급히 대꾸했다.

"아니, 잠깐만요! 이거 그냥 친선전 아니었어요? 직위를 걸고 한 것도 아닌데!"

"결투에서 패배한 홍연은 회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공석인 회장직은 당연히 그녀를 꺾은 유신 학생 차지죠."

"아니, 그게 무슨 억집니까! 뭣보다 저는 며칠 있으면 조기졸업시험으로 나갈 생각이라고요!"

부회장은 말없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학생회장 임명서. 무엇보다 서명란에는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협회장님…… 아니, 총장님의 지시입니다."

'이런 미친!'

그 사람이 직접 나섰을 줄이야.

협회 일로도 바쁠 텐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학교 일에 껴든거지?

나는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보았지만, 모든 절차는 손쓸 틈도 없이 끝나 버린 상태였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임기 일주일도 안 되는 학생회장이라니…….

"아, 그리고 회장이 바뀐 겸 해서 학생회 회의가 열리니 참석해 주세요."

도망쳐야겠다.

"언제죠?"

부회장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바로 1분 뒤."

우르르르르!

말 끝나기 무섭게 학생회 일원들이 학생회실에 몰려들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당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학생회실은 학생회들로 꽉 차게 되었다. 대략 40명 정도. 바글바글한 느낌이다.

'선배님! 여기에요!'

멀리서 진보라가 반갑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1학년 학생회인 진보라는 서열이 낮은지 뒤쪽에서 있었다. 1학년 몇명이 비슷하게 그렇게 섰다.

그리고.

"내가 만나봤는데 그 새끼 다 거품이야! 아까 뭔 일이 있었냐면……"

학생회실에 들어오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던 길연우는 나를 발견하고 입을 떡 벌렸다.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어?' 하는 표정이다.

"그럼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부회장이 말했다.

"교내 최고의 화재의 인물이니 별다른 설명은 필요 없겠죠. 이번에 9대 학생회장으로 취임한 김유신 학생입니다."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반면 길연우의 표정은 굳어지다 못해 흙빛이 되었다.

아, 이거 갑자기 조금 즐거워지는데.

"사퇴한 체육부장 오호승, 총무부장 김승현, 운영부장 윤슬아 외 학생회 마흔여섯 명 모두 모였습니다."

부회장이 그렇게 보고한 후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러 감정들이 느껴졌지만, 내가 생각했던 반발심이나 저항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호감, 기대감, 묘한 존경심같은 감정들이 느껴진다. 아무래도 결투에서의 인상적인 모습이 좋게 작용한 모양이다.

물론 표정이 썩은 길연우는 제외하고.

"학생회장을 맡게 된 김유신입니다."

어쩔 수 없다. 뭐라도 중얼중얼 말해보자.

"짧은 임기 동안이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부회장님."

"네, 말씀하세요."

공석이라 그런지 그녀는 내게 깍듯한 태도를 보였다.

"제가 학생 회의는 처음이라 그런데, 뭐 식순이나 절차 같은게 있나요?"

"이 자리는 정규 회의가 아니라 첫대면을 위해 모인 거예요. 앞으로의 방향성이나 하고 싶은 말 정도? 어떻게 진행하시든 회장의 마음입니다."

"그래요? 그럼 뭐……"

나는 앞에 놓인 종이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길고 지루한 수사는 넘길게요. 기왕 회장 된 김에 하나만 바꿉시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확 집중되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비전투계열 정원으로도 입학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맞죠?"

"예, 맞습니다."

부회장이 말을 받았다.

"그럼 비전투계 능력자들의 졸업률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그녀가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합격률 3% 내외입니다."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마탑주가 되기 이전에 내가 매번 부당하다고 느꼈던 일들.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서 노력하고 있는 한윤정을 위해서라도, 이런 것들은 바꿔놓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력 외 판정을 받은 학생들도 던전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던전 출장 할당에 손을 보고 싶습니다."

"잠깐만요."

기다렸다는 듯 길연우가 끼어들었다.

"아카데미의 던전 출장 기준은 협회 규정을 따른 겁니다. 애초에 가면허를 받을 실력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던전 출입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요."

주위의 몇몇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영리하네.'

이제 막 뜬금없이 선출된 신임 학생회장. 그리고 그 자리에 앉자마자 던전 출장권 변경이라는 다소 민감한 안건을 건드렸다.

내 파워를 낮추려면 지금 이 기회긴 하다. 첫인상부터 제대로 꼬여 버렸으니 이대로 축출당하기를 기다릴바엔 선제 공격을 날린 거겠지.

나는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그건 일반 플레이어들 기준이죠. 아카데미 학생들은 4랭크 이하의 어떤 던전도 들어갈 수 있잖아요? 전력 외 학생들을 위해 1랭크 구르마 사냥터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1랭크든 2랭크든 '전력외'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게 던전허가가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구르마 하나 제대로 못 잡는……!"

"지금 그 발언."

나는 길연우의 말을 자르고 치고 나왔다.

"책임질 수 있어요? 잡으면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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