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38화
-탑주!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 괜찮아."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괜찮지는 않았다.
-결국 암흑 마법을 익히셨군요.
"……그게 뭔데?"
-문헌에만 남아 있는 고대의 마법입니다. 인간들의 제국이 들어서기도 전, 암흑시대의 마종족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애초에 인간이 만든 힘이 아니기 때문에 리스크나 부작용이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위험한 마법이 대체 왜 골렘의 배때기에 박혀 있는 건데.
"뭐가 뭔진 잘 모르겠지만, 위력하나만큼은 어마어마하네."
골렘이 처박힌 벽면에는 마법진의 형태와 똑같은 광범위한 해골 형상이 흠집처럼 그려져 있었다.
무슨 잔재가 이렇게 남아? 대체 어떻게 된 마법인지 원리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으음, 글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갈림길처럼 이동 마법진이 세 개나 있었다.
우선 검은 골렘이 쓰러지면서 무너진 벽 너머에는 암흑 마법진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보스룸으로 이동한다는 플레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건 보스룸으로 가는 거고.'
그리고 내 뒤에 생겨난 마법진은 두 가지 종류였다.
녹색 마법진은 내가 흔히 아는 마탑으로 되돌아가는 포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 보는 형태였다. 푸른 빛에 복잡한 수식이 마구 그려져 있었다.
그냥 척 봐도 7공정은 넘어 보이는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다.
나는 그 앞으로 가보았다.
[세이브 포인트.]
[현재의 진행 상황을 저장하고 마탑 밖으로 나갑니다. 시련에 재도전할 시현 진행단계로 되돌아옵니다.]
[본 시련의 규칙으로 인한 추가 규칙 - 세이브 포인트 저장 이후 시련 밖에서 익힌 3공정 이상의 마법은 봉인.]
'세이브 포인트! 그래. 이제 이런 게 나와줄 때가 됐지.'
솔직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검은 골렘 시련은 유난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퇴로도 없었고, 그냥 다짜고짜 죽음의 구렁텅이에 던져졌다. 그대로 죽었어도 이상할게 없다.
……이 상태로 보스전 도전을 하란 거면 진짜. 그냥 죽으란 소리지.
-권고. 탑주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마탑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도전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역시 그래야겠지."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피로와 몸 상태로 보스전에 바로 도전하는 건 무리다.
완전히 시련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는 지금 이 진행단계를 저장하고 보스전만 따로 치르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청색 마법진 앞에 서서 보스전으로 향하는 암흑 마법진을 보았다.
금방 돌아와서 도전해 주마.
[플레이어의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해당 지점에 세이브 포인트를 설정합니다.]
[시련 밖으로 이동합니다.]
내 몸이 눈 부신 빛으로 감싸졌다.
* * *
유난히 지독했던 3층을 시련을 잠시 세이브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번 시련은 유난히 여운이 길었다.
쉴 때든 밥 먹을 때든 머릿속에서는 시련 생각밖에 안 났다. 자려고 누우면 시련에서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리프 부츠로 하늘을 나는 내 모습.
끊임없이 일어나는 골렘들.
그리고 데바스타라는 압도적인 위력의 신기술까지.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나마 확 올라간 능력치들이 내가 했던 경험이 '진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무튼, 몸 상태만 정상으로 돌아오면 당장에라도 보스전을 치를 생각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시련 밖으로 나온 이후, 나는 두번 다시 데바스타를 재현하지 못했다.
암흑 마법이라는 특이한 소재 때문에 구축 난이도가 높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몰입의 문제가 컸다.
목숨이 초 단위로 오고 가는 시련에서는 마나에 확 몰입할 수 있었지만, 평시로 돌아오니 그때에 비해마나 민감도와 적응력, 집중력까지 떨어져 버린 상태다.
결론은 그거다.
나는 여전히 벽에 막혀 있다.
"선배니임! 몸 상하겠어요. 좀 쉬면서 하세요."
소파에 앉아 데바스타를 띄워놓고 끄적거리고 있으려니, 결국 진보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탑주에겐 휴식이 더 필요합니다."
에아도 거들었다. 결국, 나는 두 사람의 시선에 못 이겨 데바스타 마법진을 허공에 흩뜨려 버렸다.
'으으, 좀 처럼 감이 안 잡혀.'
마음 같아서는 데바스타고 뭐고 그냥 확 보스전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마탑 멤버 모두가 펄쩍 뛰며 반대했다. 이 상태로 보스전에 가면 이번엔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선배님."
내 눈치를 살피던 진보라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 그냥 2층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당분간은 포션과 정보만으로도 충분……"
"그게 무슨 소리야! 포션과 정보수준의 기술력이 6개나 더 남았는데 이걸 그냥 놔두라고?"
반드시 개방하고 만다.
이제 내게 있어 시련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두들기던 진보라가 갑자기 손뼉을 짝쳤다.
"아, 선배님!"
"왜?"
"내일은 학교에 가셔야 할 것 같아요. 내일모레부터는 장기 던전 출장을 잡아놨는데 내일 하루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그래?"
그 말에 에아가 반색을 하며 나를 보았다.
"밖에 나가서 한숨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탑주."
뭐 벽에 막혀 있으니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간만에 한번 다녀오지 뭐."
* * *
"너 과제 다했어?"
"수행 평가 극혐이야, 진짜."
"대박! 대박! 어제 조교수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여학생들이 꺄르르 웃으며 지나간다. 귀여운 새내기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캠퍼스의 로망이라는 게 있다.
사실 나는 워낙에 악착같은 생활을 해와서 그런 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조기졸업 시험을 앞둔 지금에 와서야 그 비슷한 걸 느끼고 있다.
학교에 와야만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성이 있다.
-그렇다면 CC를 해야 합니다, 탑주.
대뜸 에아가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캠퍼스의 로망은 캠퍼스 커플(CC)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학창 생활이니 청춘을 만끽하실 것을 권합니다.
'그건 청춘이 아니라 만악의 근원인데?'
에아가 구글로 얻은 지식은 그 깊이가 다소 얕다는 게 단점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 수업은 뭐지."
간만에 학교 어플을 들어가서 시간표를 확인해 보았다.
-기초 실전체육 수업.
이 수업은 그리 좋은 기억이 없다.
다양한 신체 훈련을 통해 각종 기록들을 경신하는 게 주된 수업 내용이었다.
문제는 그 기록이 수업을 듣는 학생 모두에게 공개된다는 점.
그래서 전투계 능력자들은 실력을 발휘하며 즐기는 경쟁의 장이었고, 나같은 비전투계들은 언제나 쥐꼬리만 한 점수로 웃음거리가 되는 시간이었다.
아, 물론.
'엄청 기대되는데?'
나는 이제 즐기는 쪽이 됐다. 그렇게 내 뒤에서 낄낄 비웃던 놈들, 오늘도 그럴 수 있나 한번 보자.
체육 수업인지라 탈의실에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중앙 체육관 뒤편의 공터로 향했다.
벌써 트레이닝복 차림의 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2학년 수업이라기보다는 다 같이 듣는 교양 과목에 가까워서 1학년들이나 3학년들도 종종 섞여 있었다.
"어, 유신이다!"
"학교 오랜만에 왔네! 던전은 어땠어?"
평소에 말 한마디 붙이지도 않던 녀석들이 안부 인사를 건네온다. 속이 빤히 보이는 의도적인 접근이다.
나는 건성으로 받는 둥 마는 둥하며 지나쳤다.
"저 애가……"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뻔한 레퍼토리였다. 클럽장 어쩌고 스노우 어쩌고.
"어? 김유신?"
이번엔 익숙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한윤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뒤로 머리 묶은 차림은 오랜만에 본다.
"……뭐야, 네가 학교엔 웬일이야?"
조금 당황한 눈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왜. 난 학교 오면 안 되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클럽장 된 이후로는 쭉 던전 출장이었잖아."
"사실은 출장 시간이 좀 비어서."
"그, 그래?"
"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안 어울리게 왜 그래? 내가 불편하냐?"
"부, 불편하긴! 병신아!"
퍽!
그녀는 바로 내 옆구리에 펀치를 날린다.
그래, 이래야 한윤정이지.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별로 안 아팠다. 예전엔 진짜 아파서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난리였는데.
그래도 애써 예전처럼 반응해 주었다.
"혹시 나 없어서 혼자 학식 먹은 거 아니지?"
"지랄! 나도 친구 많거덩요!"
이렇게 한윤정과 떠들고 있으려니 학교에 왔다는 느낌이 확실히 난다.
오랜만에 보니 되게 반갑네.
-음, 좋습니다. 탑주. 이게 바로 CC라는 거군요.
'틀려.'
"자, 자, 여러분!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어요!"
실전체육 수업의 담당자는 김윤지 교수.
한쪽 팔이 의수다. 예전엔 공인 3급 헌터였다는데 팔을 다쳐서 은퇴하고 후임 양성에 힘쓰는 중이다.
"오늘의 측정 종목은 뭘까요오? 두근두근!"
특이사항으로는 애교가 많다.
"오늘 종목은 바로 '스윙'입니다!"
그녀의 말에 상반된 반응이 터져나왔다. 자신에게 유리한 종목의 학생들은 환호성을, 아닌 사람들은 우우하고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한윤정이 시시덕거렸다.
"놀고 있네. 무슨 종목이 나오든 우리는 꼴찌……"
그녀가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아, 이젠 아닌가?"
"나도 몰라. 고유 능력이 바뀐 뒤로는 측정해 본 적 없어."
스윙은 아주 간단한 종목이다. 공처럼 생긴 측정 장비를 멀리 던지면 된다.
비슷한 종류의 펀칭. 덤벨과 같이 육체계나 방출계 능력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종목이다.
"자, 자, 집주웅! 기본적인 동작부터 알려 줄게요."
김윤지가 허공에 홀로그램 화면을 띄우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스탭이에요. 가장 무난한 4스탭부터 알아볼까요?"
"넵!"
이렇게 또래 애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서 수업을 듣고 있으니까 뭔가 감회가 새롭다.
다시 그냥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으로 돌아온 느낌? 시련에서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진다. 조급했던 마음도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다.
'오길 잘한 것 같네.'
김윤지 교수는 모든 설명을 마치고 질문까지 받은 후 말했다.
"좋아요! 그럼 한 명 씩 나와서 측정해 볼까요?"
그녀가 서류철을 들고 호명했다.
"2학년 이미효 학생."
"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스타트라인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엉덩이를 뒤로 빼고 집게손가락으로 집은 공을 슥 들어 올렸다. 본인이 던진다기보다는 뒷사람에게 토스해 주려는 느낌이다.
바로 그때.
쿠쿵!
지면에서 암벽이 솟아올라 그녀가 잡고 있는 공을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오오오!"
곳곳에서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김윤지 교수는 스피드건처럼 생긴측정 기계를 확인했다. 속도뿐만 아니라 충격력과 투척 거리 등 복합적인 요소들까지 모두 측정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녀가 말했다.
"총 기록 5, 142 PHH입니다."
다시 한번 흘러나오는 감탄. 고유 능력을 사용해 평균을 웃도는 기록을 따냈다.
'잘 하네.'
나도 한윤정도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에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아리송한 반응을 보였다.
-어스 클레이모어의 하위호환 수준인데 이런 환호라니. 이해하기 힘들군요.
이 녀석도 보다 보면 은근히 마법부심이 있다니까.
-그럼 이제 탑주의 차례를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