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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마탑주-32화 (32/337)

나 혼자만 마탑주 032화

결국, 은솔은 할렘가 주민들을 따라서 돌아왔다.

새로운 마을이었다.

전에 살았던 곳보다는 좁았지만 아담한 시골 마을이었고, 그럭저럭 숨을 곳도 많았다.

다만 이곳은 야생 몬스터가 넘쳤다.

밤에는 홀로 힘겹게 몬스터들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낮에는.

"꼬맹이! 그 꼬맹이 어딨어?"

"좀비를 조종했다면서요?"

"그 괴물 때문에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됐어!"

어른들의 갈 곳 없는 분노를 담는 매개가 됐다.

좀비를 조종한 건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주민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들도 그동안 그녀에게 했던 일이 잔혹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복수 당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이뇬 보게? 한 대 맞으면 펑펑 울던 게 이젠 노려보는 것 좀 봐."

"역시 우리를 공격한 게 맞다니까."

은솔은 낡은 창고에 갇혀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주위로 술에 취한 사람들이 히죽거리며 다가왔다.

결국, 다시 돌아왔다.

끔찍한 일상으로.

하지만 은솔은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건 이것뿐, 더 좋은 삶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우리 이쁜이."

은솔의 얼굴을 향해 술 취한 남자의 발길질이 날아오려는 순간.

터엉!

남자의 발이 허공에 막혀 튕겨 나갔다.

"응? 뭐야."

"푸하하! 술 덜 깼슈?"

"아니, 여기 뭔가 있는데?"

투명한 역장 같은 것이 그녀를 보호하듯 가로막고 있었다.

"찾았다."

갑자기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남자들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창고의 뒷문이 벌컥 열리고, 그곳에서 유신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걸어 나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몰래 추적의 룬을 새겨두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유신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잔뜩 움츠러든 채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녀의 몸 곳곳에 이제 막 생긴 크고 작은 상처들이 보였다. 심지어 칼자국도 있었다.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제 유신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그녀도 결심이 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 형씨.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쇼."

"이건 우리 마을의 문제일세. 그때 구해준 건 고맙지만 아무리 헌터라도 마을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어."

"……X랄."

하아아아악!

유신의 주위로 무수한 마법진들이 휘황찬란하게 떠오르자 남자들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아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협회에 숨기고, 사적 이익에 활용한 것도 모자라, 분풀이에 아동학대까지? 나이 먹을 만큼 처먹은 새끼들이 잘 하는 짓이다."

유신이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세금도 안내는 범법자 새끼들 몇 명 치워도……"

"자, 자, 잠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남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신의 입꼬리가 악귀처럼 찢어졌다.

"뭐라 할 사람 없겠지?"

마법진이 빛을 뿜으며, 화염구와 마나 화살들이 맹렬히 쏟아졌다.

콰콰콰콰콰쾅!

창고에 불이 붙고 화살이 박혔다.

남자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조준하지 않고 발사했으니 다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다쳐도 싸다고 생각했다.

창고에 불이 붙고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유신은 차분한 걸음으로 소녀에게 다가갔다.

"늦어서 미안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쥐어짜 내듯 대답했다.

"……그런 걸로 사과한 사람도 처음이야."

"그러냐."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통곡과도 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유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유신은 한동안 묵묵히 소녀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나랑 같이 가자."

"……어디?"

"새로운 보금자리로."

유신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마법을 가르쳐 줄게."

* * *

은솔을 마탑에 데려왔다.

샥.

샤샥.

그녀는 낯선 집에 들어온 경계심 많은 새끼고양이처럼 1층 로비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괜찮아. 솔아."

내가 애써 달래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저 둥근 로비안이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하기야 성인이라도 처음 마탑을 방문하면 특유의 웅장하고 이질적인 분위기에 짓눌리게 되는데, 아직 정서가 불안한 아이라면 더 할 것이다.

"탑주, 귀환하셨군요."

허공에 빛무리가 모여들며 에아가 등장했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은솔은 다시 로비 안으로 샥 숨었다.

"……낯을 가리는군요."

"그러게."

"제안. 이럴 때는 갑작스럽게 다가가는 게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적응할 때까지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녀의 제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나는 소파에 편안히 누워서 스마트폰을 끄적거리며 딴짓을 했고, 에아는 정서진이 사놓은 샐러드 세트를 먹는데 집중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자, 은솔은 그제야 빼꼼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편안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 오빠야."

"왜?"

나는 여전히 스마트폰을 두들기며 답했다.

"여긴 어디야?"

"마탑이라고 해. 마법사들이 사는 곳이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럼 오빠야도 마법사야?"

"당연하지."

"저 언니야도 마법사야?"

"저는 호문쿨루스입니다."

생소한 단어에 은솔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문쿨루스는 나쁜 사람이야?"

"정정. 호문쿨루스는 인공 생명체로서 당신이 말하는 '사람'이라는 범주에 해당하지 않음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서 호문쿨루스가 나쁘냐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 의문 자체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리라 사료됩니다. 호문쿨루스의 성향은 호문쿨루스 스스로의 감정보다는 그 사용자의 성향과 방침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크므로……"

"에아, 그만."

그렇게 설명하는데 애가 어떻게 이해하겠냐.

"그럼 오빠야는 착한 사람이니까 호문쿨루스 언니야도 착한 사람이네!"

……완벽히 이해했군.

하지만 은솔은 여전히 로비 안에서만 쫑알쫑알 이야기할 뿐이지, 밖으로 나올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동영상 하나를 찾았다.

'에아, 지금 내가 찾은 이 동영상을 감상하고 네 데이터에 등록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1, 000배속으로 감상중.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감상 완료했습니다.

'좋아. 그럼 거기 나오는 눈의 여왕으로 변신해.'

그녀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의문.

'의문은 기각한다. 눈의 여왕 설정은 물론이고, 말투랑 목소리도 똑같이 부탁해.'

그녀는 여전히 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의 명을 따릅니다.

에아의 몸에 눈부신 빛무리가 터져나왔다. 먼저 복장이 변했다.

하얀 드레스와 왕관, 유리 구두를 신었고 등에는 요정의 날개 같은 것이 솟아 나왔다.

"안녕! 어린이 여러분 반가워요!"

에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겉모습은 물론, 목소리까지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눈의 여왕 캐릭터와 완전히 똑같았다.

"눈의 여왕님이다아아!"

은솔이 눈을 번쩍 뜨며 로비에서 뛰쳐나왔다.

"어머, 여기 착한 어린이가 있었네."

"요정님! 여기에요오!"

세상에. 효과 만점이다.

그렇게 쑥스러움이 많고 낯을 가리던 은솔이 밖으로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에아는 하늘을 날며 눈 모양의 이펙트를 뿌려 댔다. 은솔이 그 사이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잡히지 않는 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과연 유명 어린이 프로그램 '푸롱푸롱 푸피피'의 저력은 대단했다.

모든 어린이들의 경계를 한 번에 풀어버릴 수 있는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 대통령이라는 별칭까지 있었다.

"꺄르르르르! 여왕님! 여왕님!"

"착한 어린이에게는 여왕님의 뽀뽀선물!"

쪽쪽.

은솔의 양 뺨에 뽀뽀를 해주자 은솔은 너무나 행복해하며 에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도 에아의 뺨에 뽀뽀를 쪽쪽 해주었다.

……내가 시킨 거지만 너무 설정에 심취한 거 아니니?

"어머, 여기 어린이 친구가 하나 더 있었네요?"

갑자기 에아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요정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왔다.

"우리 어린이 친구에게도 여왕님의 뽀뽀 선물!"

"야! 야! 잠깐만!"

내가 기겁해서 소리쳤지만, 에아는 설정에 충실하라는 내 명령을 이행했다.

벨벳 같은 은빛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녀는 내 무릎 위로 과감하게 올라왔다. 막상 상황이 닥치자 나도 모르게 꼴깍하고 침이 넘어갔다.

"뽀뽀해! 뽀뽀해!"

은솔의 외침이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들렸다. 에아가 앞으로 바짝 밀착해 오며 두 팔로 내 등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분홍색 입술이 다가왔다.

"선배니임! 에아 씨! 안녕하세요! 출근했습니……다?"

진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

깊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나와 에아는 변명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충격받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던 진보라가 이내 싱긋 웃으며 물었다.

"선배님? 이건 또 무슨 플레이예요?"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라……"

"어머? 솔아!"

진보라는 뒤에 있던 은솔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 솔이 데려온 거예요? 아니, 근데 지금 애 앞에서 뭐하는 짓이에요? 미쳤어, 진짜!"

진보라가 나를 차갑게 쏘아보더니 에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에아 씨."

"안녕, 안녕. 새로운 어린이 친구가 왔네? 나는 눈의 여왕……"

"에아 씨. 똑바로 대답하세요."

"알겠습니다."

뭐 이리 쉽게 설정을 포기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실래요?"

"탑주가 제게 이상한 영상을 억지로 보게 한 후, 그것을 따라 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이제는 나를 보는 진보라의 눈빛에 경멸이 깃들고 있었다.

"저질."

"……스스로 변호할 기회를 다오."

"실망이에요! 선배님의 취향은 존중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가 보는 앞에서!"

우웅!

이번에는 마탑의 문에서 정서진이 등장했다. 그는 들어오는 와중에도 한쪽 팔로 노트북을 받치고 미친 듯 이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탑주님. 사냥터 외주 건을 알아보는 중이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쿵!

노트북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은 정서진이 홀린 듯한 얼굴로 눈의 여왕 차림의 에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대뜸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탑이 떠나가라 포효하기 시작했다.

"하여튼 간에 남자들은……"

진보라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오오오오!"

……그만해, 미친놈아.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은솔 쪽을 보았다. 간신히 밖으로 나오게 했는데, 그녀는 다시 로비 안에 꼭 숨어서 겁먹은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 * *

간신히 폭주한 정서진을 진정시켰다. 우리는 로비에 둘러앉았고, 진보라는 불안해하는 은솔을 데리고 와서 품에 꼭 안아주고 있었다.

"보라야."

"말 시키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철저히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대론 계속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오해라니까. 너 '푸롱푸롱 푸피피' 몰라? 거기 나오는 눈의 여왕님 흉내였어. 솔이가 얼마나 즐겁게 놀고 있었는데."

그제야 진보라가 새침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에아 씨를 푸피피나 다른 캐릭터로 변신시킬 수도 있었잖아요. 왜 하필 눈의 여왕님으로 시킨 거죠?"

……예리한 녀석.

"탑주님!"

이번엔 정서진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감사합니다!"

"… 뭘."

"저는 이 마탑에 뼈를 묻겠습니다!"

적어도 그 이유가 충성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저런 바보는 무시하죠. 그보다 솔이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도착할당시 은솔이 사람들에게 학대당하고 있던 상황을 설명하자 진보라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어쩜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목숨을 구해준 애를 의심만으로 폭행?"

"그러게 말이다."

"……하아아, 그럼 이제 솔이는 어쩔 거예요?"

내가 팔짱을 낀 채 말이 없자 진보라가 은솔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막 고아원 같은데 보낼 거 아니죠? 우리가 키울 거죠? 그쵸?"

뭐, 사실 요즘은 복지가 개판이라 고아원에서 아이들 받아주지도 않을테고.

"어떡할래?"

내 물음에 은솔은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숙였다.

"하, 하지만……"

"하지만?"

"……오, 오빠야들한테 바, 방해가 될 것 같고."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네 생각을 말해봐."

은솔이 울먹울먹 하더니 이내 힘겹게 말했다.

"……나 여기서 지내도 돼?"

진보라가 격한 환호성을 내지르며 은솔을 꽉 끌어안았다. 정서진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앞으로 잘 부탁해."

"응! 오빠야!"

그녀가 쪼르르 달려와 내게 안겼다.

그녀의 합류는 나도 바라던 바다.

은솔의 원격조종은 협회의 데이터베이스에도 등록되지 않은 전례가 없는 희귀 능력이다. 마법과 결합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

"아, 잠깐만요! 그런데……"

진보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낮에 은솔이는 누가 돌보죠? 저랑 선배님은 아카데미에 가야하고, 서진 씨야 일 때문에 계속 바쁠 테고……"

"걱정 마십시오."

에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눈의 여왕복장으로 변했다.

"제가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안녕! 어린이 친구들!"

"눈의 여왕님이다!"

사실 에아 녀석, 저 차림이 마음에 들었던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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