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25화
까악. 까악.
시커먼 까마귀 떼가 노을 지는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빈 공 터. 그곳에는 흙을 모아서 언덕을 만들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가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다 됐다."
열심히 흙을 주무르던 소녀가 마침내 손을 뗐다.
완성된 흙무덤의 위에는 뭔가가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아쉬워."
그것은 사람의 팔이었다.
소녀는 흙을 한 움큼 쥐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얼굴 위에 사르르 덮었다. 그러고는 다듬듯 손바닥으로 툭툭 덮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쉽게 죽는 걸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무로 만든 십자가까지 꽂아두었다. 마침내 완성된 무덤을 바라보던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잘 모르겠어. 그렇지?"
들썩들썩.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십자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 * *
이런 저런 일이 많았던 던전 출장이후, 나는 오랜만에 아카데미에 통학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스마트폰으로 수업시간표를 확인해 보았다. 오연희 교수의 마나 운용학 수업이라, 잠자긴 글렀네.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 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이 한 명 눈에 띄었다.
단순히 내 착각인지, 진보라의 관심병이 옮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맹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시선을 슬쩍 돌렸다가 다시 되돌아봤지만,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다.
심지어 '너 맞아요.' 라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더럽게 부담스럽네.
신호가 바뀌었다.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자 맞은편의 그 남자도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잠깐 실례합니다! 김유신 학생 맞으시지요?"
"예, 그런데요."
나는 빠른 걸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남자도 나와 보폭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하! 제대로 알아봤네요! 이번에 용암굴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용암굴? 이 사건 묻혔다고 진보라가 그러지 않았던가?
"그걸 어떻게……"
"이 바닥에서 알 사람은 다 알죠."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
길드 스카우터라. 나랑은 영영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는데.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그리모어 길드의 스카우터 곽찬희라고 합니다."
"아, 예."
"이야기 나온 김에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죠."
넥타이를 고쳐 맨 곽찬희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 그리모어 길드는 정식으로 김유신 학생에게 입단 제의를 하고 자 합니다."
와우.
살다 보니 내게도 이런 날이 오긴 하는구나.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니까 중소길드 정도 되겠지만, 신기하긴 하네.
근데 왜 이렇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입단 제의지?
"저는 아카데미에서 성적도 나쁘고, 마땅한 실적 같은 것도 없는데요? 뭘 보고 절 뽑으시려는 건지 궁금하네요."
좋은 질문이라는 듯 곽찬희가 손가락을 척 세웠다.
"그야 물론 유신 학생의 가능성이죠! 기자회견 때 용암굴 현장에 같이 있던 헌터분이 열렬히 칭찬하시더라고요.'나는 거의 한 게 없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아카데미의 김유신 학생 덕분이다!'라고……."
아, 그 어리바리가 진짜……!
보스전 보상 챙겨줘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끝까지 도움이 안 된다.
"절차가 그리 까다롭진 않습니다. 간단한 입단 테스트만 거치면 바로 저희 길드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와 제스처. 내가 당연히 들어갈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긴 뭐, 길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 건 헌터 지망생의 로망이니까.
"지금 유신 학생이 다니고 있는 아카데미, 물론 좋죠. 출장도 보내주고 던전도 잘 잡아주고…… 하지만 결정적인 게 없습니다. 바로 수입!"
수입이라는 말에 아주 살짝 마음이 동하기는 했다. 곽찬희는 생각할 여지도 주지 않겠다는 듯 파바박 말을 이어갔다.
"길드에서는 연봉이라는 확실한 수 입이 있습니다! 게다가 돈으로도 살수 없는 현장 경험과 고정된 파티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커다란 강점까지! 이제 그만 학교는 졸업하시고 현장에서 뛰셔야죠. 헌터 진출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직 어릴때 수입 쫙 당겨야지 않겠습니까?"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게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곽찬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펼쳤다.
"그럼 입단 테스트 일정은 언제로 잡아드릴……"
"아뇨, 그게 아니라."
"하하! 아직 망설이고 계시군요. 잘 생각해 봐요. 이런 기회는 두 번다시 오지 않는다니까요."
나는 말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곽찬희의 고개가 따라 돌아갔다.
그 순간, 아카데미 정문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 들었다.
"저, 저기 있다!"
"김유신 학생!"
"프리먼 길드에서 왔습니다!"
"천랑 길드입니다!"
스카우터들이 순식간에 내 주위를 에워쌌다. 격식 있는 정장 차림에, 과시하는 느낌이 강한 전신 슈트까지 가지각색의 차림이었다.
"김유신 학생!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합시다!"
"뭘 이야기를 해! 사람도 많은데 그냥 여기서 바로 연봉 협상해. 얼마를 원해요?"
"여기 사인만 해요! 다른 조건 없이 바로……!"
나는 슬쩍 그리모어 길드의 곽찬희를 돌아보았다.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굳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치기 싫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상도덕도 없나! 나랑 먼저 협상 중이었다고!"
스카우터들이 고개를 돌려 곽찬희를 보았다. 그러곤 하나같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모어 길드? 낄 데 껴라."
"연봉도 약하고 던전 사고율 1위 길드를 김유신 같은 유망주가 왜 가겠어요?"
다른 스카우터들의 일침에 곽찬희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분위기가 점점 더 가열되는 것 같아서 나는 상황을 진정시키려 입을 열었다.
"저는……"
"그래, 그래! 어디 길드에 들어갈 텐가! 천랑 길드지?"
"계약금 3억 어때? 아니, 3억 5천!"
"최상급 유망주를 푼돈 내고 데려가려는 꼴 봐라. 이쪽은 4억이다!"
"방금 사장님 허가받았습니다. 연봉 별도, 계약금만 5억 때립니다!"
……아니, 저기요. 이 사람들 도저히 남의 말은 들으려고 안 한다.
부우우우우웅!
그때 도로에서 달리던 세단 한 대가 난데 없이 방향을 틀어 인도로 돌진했다. 스카우터들이 혼비백산하며 뒤로 물러섰다.
끼이익!
세단은 스카우터들을 들이받기 직전에 멈췄다. 차체 문이 위로 찰칵 열리더니, 그 안에서 잘 빠진 슈트를 입은 여성이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자 스카우터들이 노아의 기적처럼 좌우로 물러섰다.
"김유신 학생이십니까?"
"네."
"스노우 길드에서 왔습니다."
그 한마디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일동이 얼어붙었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게 스노우라면 한국 제4위의 대형 길드였다.
"용암굴의 영웅이자 이레귤러 몬스터를 쓰러뜨린 소년. 저희 대표께서 김유신 학생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같이 가시죠."
웅성웅성.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스노우 길드라면 나쁘지 않다. 차후에 큰 적이 될 유닉스를 견제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이기도 하고.
"바로 입단인가요?"
"면접과 입단 테스트, 메디컬 테스트를 진행하셔야 합니다."
"그렇군요."
"제의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사실 내 대답은 NO로 정해져 있었다.
난 이미 소속이 있고 심지어 그곳의 리더이기도 하니까. 일단 여기선 에둘러 거절하자.
"지금 스노우에 들어가기엔, 저 스스로가 아직 많이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아카데미에 남아서 공부하고 싶네요."
내 한마디에 스카우터들의 입이 쩍벌어졌다. 하나같이 '스노우를 차다니!' 하는 표정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화를 내기는 커녕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유신 학생의 의중을 알겠습니다."
그래. 알았으면 이제 그만 가주….
"이제 곧 아카데미 조기 졸업 시험이었죠. 김유신 학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진정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거 군요."
아니! 그냥 안 간다니까!
"듣던 대로 당찬 학생이군요. 하긴, 아카데미 조기 졸업 정도도 못 해서야 곤란합니다. 입단 테스트는 그것으로 대체 하라는 당신의 제안. 꼭 대표님께 전하겠습니다."
그런 제안한 적 없다고!
스카우터들은 왜 다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말을 하면 제발 좀 듣지. 자기들이 손 내밀면 모든 학생이 굽신거리며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나?
진절머리가 났던 나는 얼른 스카우터들 무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새로운 무리와 맞닥뜨려야 했다.
"드, 들었어? 스노우 길드를 찼어!"
"그게 아니지, 멍청아! 몸값을 더 올리려고 새로운 제안을 한 거잖아! 이게 다 전략이라고."
"쟤 누구야? 몇 학년?"
"나도 언제쯤 스카우터들한테 둘러싸여 보냐."
소란을 듣고 아카데미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학교생활 귀찮아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 비켜! 비켜!"
그때 인파를 뚫고 2학년 과대인고신욱이 들이닥쳤다.
"역시 대단해, 유신아! 난 네가 잘 될 줄 알았다니까!"
녀석은 갑자기 친한 척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자, 자, 잠깐 비켜주세요! 차기 스노우 길드 멤버 지나갑니다! 하하!"
나는 고신욱의 옆구리를 한 대 때리고는 혼자 캠퍼스로 들어왔다. 고신욱은 낑낑거리면서도 헐레벌떡 나를 쫓아왔다.
* *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아카데미 내에서 돌풍의 핵 비슷한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전례가 없었던 하루에 4개 클럽을 홀로 끝장냈다는 소문. 거기에 더해 오늘 스노우 길드의 스카우트 사건까지. 어딜 가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김유신 학생."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오연희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차.
오연희한테 찍히면 여러모로 힘들어지는데.
슬그머니 교수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이번 마나실 응용 기술의 시범을 부탁드리고 싶군요."
'음?'
그날 이후 오연희 교수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저 콧대 높은 교수가 부탁이라는 표현까지 쓰다니.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걸어가 마나 투사기 앞에 섰다. 간단히 마나실의 응용기술을 선보이자 사방에서 탄성과 환호가 일어났다.
일주일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광경.
심지어 오연희 교수는 동경하는 듯 한 아이돌을 목격한 여고생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자를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내가 저 김유신이랑 한판 붙었다니까!"
"진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에이, 내가 어떻게 이기겠어. 그래도 나름 끈질기게 분투했지."
그리고 저 망할 고신욱은 남의 이름 엄청 팔아먹고 있었다.
"훌륭했습니다. 자, 모두 박수!"
떠들썩한 박수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이게 뭐라고. 나는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자리로 돌아갔다.
"아주 스타 다 되셨네요."
옆자리의 한윤정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한윤정과 함께 식당에 가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유신아! 유신아!"
고신욱이 충견처럼 따라붙었다.
"마나실 시범 정말 대단했어! 그 마나실로 거대한 나무를 만들었다는 것도 봤어야 했는데! 던전 출장 때문에 아쉽게 됐네, 하하하!"
"야, 너 잘 만났다. 아까……"
"김춘추우우!"
덜컥! 강의실 문이 열리며 이번엔 사극연구회 클럽장의 마연경과, 아이기스 클럽장인 이찬희가 들어왔다.
"……김유신이라고요."
"호호! 뭐 어때?"
"2학년 강의실엔 왜 오셨어요?"
"부클럽장이 클럽장 만나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해?"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결재 서류와 서명용 펜을 내밀었다.
"……클럽 운영은 선배가 알아서 하기로 했잖아요."
4개 클럽을 차지한 나는 기존 클럽장들을 쫓아내는 대신 부클럽장으로 강등시키고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애초에 진보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벌인 일이었고, 이제 진보라는 마탑의 일원이 됐으니 더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다만 클럽들을 차지하고 바로 나가 버리면 그림이 좀 그러니까 직위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래도 서명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예산 결재 서류야."
이 선배들은 내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마지못해 서명을 해주자 이번엔 이찬희가 끼어들었다.
"김유신이! 네 덕분에 클럽지원자가 억수로 늘었다카이! 저녁에 회식할 건데 클럽장이 와서 건배사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이 가!"
"죄송합니다. 저녁엔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야, 김춘추! 지금 나랑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저딴 놈이랑……!"
아, 그냥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그들 모두를 외면하고 한윤정을 바라보았다.
"윤정아, 그냥 가자."
드르륵.
"굳이 나랑 학식 돈가스 같은 거 먹으러 갈 필요 있니?"
그 말만 남긴 한윤정은 차갑게 등을 돌려 사라졌다.
윽, 얘까지 왜 이래.
"저, 저, 싸가지 없는 거 봐라."
멀어져 가는 한윤정을 보며 고신욱이 쯧쯧 혀를 찼다.
"지친구 떡상하면 자기도 좋은 거지. 어딜 저런 열등생이 감히……"
"……너 진짜 뒤지게 처맞기 전에 입 좀 다물어라."
내 싸늘한 한마디에 고신욱은 바로 온순한 양이 되어 굽신거렸다.
나는 홀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음, 훌륭합니다. 탑주. 바로 그 기세입니다.
조용히 지켜보던 에아가 말을 걸어왔다.
-무룻 마탑주는 만민의 존경과 우러름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 이제 지구의 사람들도 탑주의 위대함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현상이라 사료됩니다.
'위대함은 무슨.'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그래, 좋다. 아주 조금은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일을 벌인 것도 없지 않아 있다.
……근데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피곤하잖아.
아, 빨리 탑에 돌아가고 싶다.
-귀환하시는 길에 메론맛 아이스크림을 부탁드립니다.
'……너 방금 만민의 존경 어쩌고 하지 않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