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21화
"고생하셨습니다, 탑주님."
전투가 끝나고 정서진이 다가와 말했다.
"훌륭한 피니쉬였습니다만, 개운한 표정은 아니시군요."
…… 어떻게 알았지?
"실은 좀 고민이 있어서."
"탑주님께서 고민이요?"
"내 마법의 방향성에 대해."
그렇게만 말했지만, 정서진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스타일에 대해 고민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정답이 없는 난제인 만큼 시간이 다소 걸릴수도 있겠죠. 하지만 초조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이제 막 2공정 마법을 배운 참이다.
정서진의 말대로 성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고맙다."
"실례했습니다."
그때 진보라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보다 얼른 가요! 보스전에 늦겠어요!"
아 참. 깜빡 잊고 있었다.
가벼운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리는 다시 보스존을 향해 이동했다.
* * *
드넓은 용암 필드의 마지막 지점에는 넘실거리는 용암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반도처럼 툭 튀어나온 땅에 폐허가 된 대리석 신전이 존재했다.
이곳이 바로 협회에서 밝힌 보스출현 예정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가 신전 안으로 들어오자 몇몇이 아는 척을 해왔다.
"아카데미 분들도 오셨네."
"장비 잘 쓰고 있어요!"
"진짜 죄송한데, 물량 더 남은 거 더 없나요?"
어느새 나와 진보라는 이 용암굴에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보스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만든 저항 장비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옷 밖에 조끼처럼 걸치거나, 장비안에 입거나, 아니면 패션처럼 팔이나 목에 두른 사람들도 보였다.
이거 좀 뿌듯한 기분인데.
"혹시 여러분도 보스전에 참여하러 오셨습니까?"
어깨에 해머를 짊어진 인상 좋은 사내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 네. 그런데요."
"아카데미 재학생이라면 실력은 보증된 거나 다름없죠. 괜찮으면 저희 파티에서……"
"속지 마. 저기 탱커만 셋인 똥팟이야. 밸런스 좋은 우리 파티는 어때?"
"세 분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길드파티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갑자기 우리를 영입하려는 경쟁에 불이 붙었다.
필드 던전에는 특정 시기에 보스 몬스터가 출현한다. 이를 잡기 위해 플레이어들은 파티를 이루거나 레이드까지 구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현실은, 필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이 많은 인원의 공격을 다 받아낼 정도로 강력하지 않다.
몇 개 파티의 화력이 집중되면 보스는 5분도 안돼서 잡히기 때문에, 단순 화력전 양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도 화력에는 자신 있고, 파티원이 많으면 보상 배분도 귀찮아지니 파티 규모는 늘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희는 가볍게 셋이서만 하려고요."
"아, 그래요?"
"아쉽네."
다행히 접근해 온 사람들도 딱히 질척거리지는 않고 돌아갔다.
우리는 적당히 신전 근처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으으, 사람 너무 많다. 보상 타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죠?"
진보라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보상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고요! 여기 와서 3천만 원도 벌었고!"
"연연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왜 자꾸 시비야!"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두 사람이 말다툼하는 걸 지켜보는데 옆 파티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보스 출현까지 얼마나 남았어?"
"하아암, 몰라. 시간 되면 어련히 알아서 나타나겠지."
"근데 협회에서는 어떻게 보스 몹의 출현 징조까지 아는 거야?"
"……음, 내가 알기론 전용 능력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맞다. 다른 플레이어의 상태창을 훔쳐보는 내 탐지 능력처럼, 던전의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자들도 있다.
던전이 열리면 이들이 협회에서 파견되고, 그들이 읽어낸 정보가 각종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것이다.
아, 물론.
'에아, 이제 얼마나 남았어?'
-보스 출현까지 앞으로 5분입니다.
이쪽도 정보는 뒤처지지 않는다.
마탑의 대서재에는 온갖 던전의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던전의 이름만 안다면 출현 몬스터의 특징은 물론, 보스 몬스터의 출현 징조 및 장소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탑주. 혹시…….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행들과 잡담을 하며 기다리다 보니 정복 차림의 협회 직원이 보스존에 나타났다.
이제 곧 보스전이 시작된다는 의미였기에 플레이어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일어났다.
직원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앞으로 3분 후에 보스전이 시작되겠습니다."
역시 에아의 정보는 정확했다.
수 많은 파티가 한꺼번에 전투를 벌이는 필드 던전의 보스전은 워낙 한 순간이라, 결정적인 유효타를 제대로 박아 넣는 게 중요했다.
나도 몸속의 마나를 점검하며 마법진을 미리 펼쳐둘 준비를 했다.
이제 직원이 1분 남았다고 알렸다.
-탑주.
에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아까부터 이 녀석 좀 이상한데.
-당황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동료들과 함께 보스존에서 빠져나오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응? 여기까지 와서 나오라고? 그것도 보스전을 앞두고?'
-현재 보이는 보스 몬스터의 출현 징조가, 통상적인 용암굴 보스 몬스터의 것과 다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선배님! 빨리 와요! 한 대라도 더 때려봐야죠!"
어느새 두 사람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보상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며!
"그럼 지금부터 용암굴 보스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오오오오오!"
내가 큰 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지만,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가볍게 묻혀 버렸다.
'젠장! 에아, 응답해! 용암굴의 보스 몬스터 징조가 아니라면 뭐가 나온 단 거야?'
-원래의 보스 몬스터가 아닌, 이레귤러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레귤러?'
환호성이 한바탕 터져 나온 뒤, 주위가 급격히 조용해졌다.
시간이 됐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한 협회 직원이 열심히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때.
터업!
신전의 끄트머리 쪽, 용암의 바다에서 어떤 손이 올라왔다.
바닥을 짚고 천천히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것은 몬스터였다.
용암처럼 시뻘건 피부와 씨름선수를 연상케 하는 육중한 덩치에 툭튀어나온 배, 일그러진 개과 맹수의 머리와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손에 든 무기는 양쪽에 칼날이 달린 트윈 블레이드였다.
'저 몬스터는 뭐야?'
-검색 결과, 헌터 협회 홈페이지와 제 데이터에도 없는 존재입니다. 대서재의 서적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쳐진보라와 정서진을 불러 모으는 사이.
"보스가 나왔는데 다들 뭐 해?"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호기롭게 보스에게 달려 들었다.
보스 몬스터가 눈동자를 굴려 그를 보더니 입에서 희뿌연 입김 같은 것을 뿜어냈다.
"흐라아아아앗!"
검사가 마나 코팅을 부여한 검을 휘둘렀다.
터엉!
두 무기가 쇳 소리를 내며 격돌했다. 이어서 검사는 자신의 두 팔이 바람 빠진 인형처럼 위로 쳐올려 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그 틈에 보스가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어, 어어?"
촤아아아악!
남자의 몸에 사선으로 빗금이 생기더니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신전의 타일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상처를 내려다보았고.
서정!
뒤이어 그의 머리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허, 허억!"
"꺄아아아악!"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들이 쏟아졌다.
이제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자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간의 목을 장난감처럼 떨군 보스 몬스터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쿠구구구구구구!
지면이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이내 툭 튀어나온 지형이었던 보스존 전체가 지상에서 떨어져 나와 용암의 바다로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도망치려던 플레이어들도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지, 지금 퇴로를 봉쇄한 거야?"
슈슉!
보스가 인간들의 무리로 파고들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누군가의 팔 한 짝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아아아악!"
그 비명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신체부위가 하나둘씩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팔, 다리, 그리고 심지어는 머리까지.
핏줄기를 내뿜으며 갈라지는 육편들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미, 미, 미친!"
"뭐야 이거!"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저 랭크 던전을 돌면서 프로 헌터에 도전하고 있는 가면허 플레이어들은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냥터에 들어와 이미 분석이 끝난 몬스터를 공략대로 쓰러뜨리면 그만이다.
모두가 프로 헌터가 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이 중에서 제대로 프로가 될 각오가 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굳이 헌터가 되지 않아도 저랭크 사냥터를 꾸준히 도는 것만으로도 먹고 살 돈은 번다. 그래서 그냥 그자리에 눌러앉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이들의 공통점.
전투 중에 매뉴얼에 벗어나는 변수가 생기면 믿기 힘들 만큼 간단히 무너져 내린다.
보스존 전체가 혼란의 구렁텅이가 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촤아아아악!
콰직!
살이 찢기고 피가 튄다. 나는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인류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플레이어들도, 전의가 꺾이자 한낱 허수아비로 전락할 뿐이었다.
"아, 다들 뭐 해? 던전에서 사람 죽는 거 한두 번 보나."
"잡을 생각 없으면 비켜!"
길드 소속의 호전적인 플레이어들이 나섰다. 그나마 소속이 있다는 것은 유망주로서 제대로 프로 헌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었다.
확실히 다르긴 했다. 이들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는 상황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철저히 짜온 스크럼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티, 팀장님!"
"물러나! 일단 물러나!"
이들도 이레귤러 보스 몬스터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 몬스터는 지능적이었다. 앞에 나와 방패를 든 탱커를 상대하지 않고 갑자기 옆으로 뛰어나가 무방비 상태의 저격수를 암살했다.
그리고 동료의 죽음에 당황한 플레이어들의 빈틈을 노리고 하나둘씩 요리해 나갔다.
사람이 죽는 건 익숙해질지 몰라도, 바로 전에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길드 소속의 플레이어들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버, 벌써 일곱 명은 죽었어!"
"아니, 어떻게 된 거야? 필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는 약하다며!"
다들 보스를 피해 허겁지겁 도망치기만 했다.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공격 마법을 쏘고 싶었지만, 이리저리 날뛰는 사람들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활을 든 플레이어들도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위험한데.
"오!"
"저기……"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일제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지이이이이익!
지상과 신전 사이에 마나 실을 연결하고 그 위에 무기를 얹어 건너오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저런 일이 가능한 자들이라면…….
"허, 헌터다!"
"프로 헌터가 왔다! 이제 살았어!"
사방에서 안도하는 한숨과 격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헌터들은 플레이어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상에 내려왔다.
"공인 5급 헌터 강현입니다. 자, 여러분 모두 진정하세요."
"같은 5급 최진천입니다.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간혹 보스 몬스터가 좀 버거운 경우가 있으니까요."
침착한 헌터들의 모습은 다른 플레이어들로 하여감 안도감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했다.
상대는 이레귤러다. 침착하다 못해 너무 긴장감이 없는 거 아냐?
"헌터가 왔습니다. 워, 워. 거기 앞에 좀비켜주세요."
"조심하세요. 저희가 잡아도 보상은 적절히 분배해 드릴……"
쿠당탕탕탕!
전면에 있던 사람들이 볼링핀처럼 나가떨어지며 보스 몬스터의 몸뚱이가 확 들이닥쳤다.
앞에 있던 헌터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쾅!
헌터는 검을 반쯤 뽑은 자세에서 보스 몬스터와 충돌했다.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며 허리가 반쯤 꺾인 그가 '떠헉!' 하는 아찔한 소리를 냈다.
뒤에 있던 대머리 헌터가 한심하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야, 야. 사람들 놀라잖아. 2랭크 보스 몹 가지고 장난치지 말고."
"서, 선배! 이거 진짜……!"
까앙!
보스 몬스터가 트윈 블레이드를 회수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뒤쪽의 대머리 헌터에게 던졌다.
"크웁!"
당황한 대머리 헌터가 다급히 두팔을 가슴 위로 들어 올렸다. 칼끝이 가슴을 살짝 찌른 채로 멈췄다.
"노, 놀래라! 2랭크 던전 보스 몹이 뭐 이런 박력……!"
콰직!
그리고 그의 몸이 지면에 짜부라졌다.
모두의 놀란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난데 없이 바다에서 나타난 거대한 용암 팔이 보였다.
"라, 라바 골렘이다!"
쿠구구구구!
쿠구구구구구구구!
용암 바다가 사납게 출렁이며 그안에서 집채만 한 라바 골렘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섬이 된 보스존을 감쌌다.
"……미친! 헌터까지 당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중앙에는 이레귤러 보스 몬스터, 그리고 바다에는 대형 몬스터들까지. 완전히 포위당한 셈이다.
게다가 부상으로 피를 토하며 도망치던 대머리 헌터는, 득달같이 쫓아온 이레귤러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에서 피를 뿌리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버렸다.
이다음부터는 학살의 연속이었다.
구하러 온 헌터까지 당하자 플레이들은 저항의 의지까지 꺾인 채 도망치기만 했다.
"커흑! 사, 살려줘!"
바닥에 쓰러진 중년의 남자를 향해 보스가 트윈 블레이드를 내리찍으려는 그때.
터업!
바람처럼 등장한 정서진이 휘둘러지는 트윈블레이드를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매, 맨손?"
정서진은 힘에서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보스 몬스터가 무기를 회수해 재차 휘두르려 했으나.
꽈아아아앙!
난데 없이 날아온 포션이 보스의 안면에 부딪혀 폭발했다. 녀석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예에, 명중!"
포션을 양손에 든 진보라가 나타났다.
"당신과 협력하긴 죽어도 싫지만, 선배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네요."
"그건 이쪽이 할 소립니다."
두 사람이 시간을 버는 사이, 나는 서둘러 하나 남은 5급 헌터에게 달려갔다. 이 녀석마저 당하면 정말로 승산이 없다.
"이봐요!"
헌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녀석은 눈의 초점이 반쯤 풀려 있었다.
미치겠네. 이런 유약한 놈이 어떻게 헌터 자격시험을 통과한 거야?
"야! 정신 안 차려?"
이렇게 된 이상 앞뒤 가릴 것 없다.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뒤쪽의 돌벽에 강하게 밀어붙였다. 꽤 크게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짜악! 짝!
연이어 뺨을 몇 대 정도 후려갈기자, 가까스로 멍해 있던 녀석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누,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