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마탑주 018화
진보라와는 내일 합류하기로 하고, 바로 작업 준비를 했다.
우선 가까운 도매상가에서 얇디얉은 천 쪼가리 묶음을 몇백 장 사왔다.
이래 봬도 옷이긴 한데 팔을 넣어 가볍게 겉옷 위에 걸칠 수 있는 조끼 타입이다. 한 장에 천 원 정도.
나는 이 옷들을 로비에 잔뜩 쌓아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1공정 마법 두 개를 합쳐 만드는 2공정 마법.
주문 마법의 경우에는 '공정'이 늘어나면 주문의 길이가 늘어나고, 마법진의 경우에는 '공정'이 늘어나면 필드, 그러니까 원의 개수가 늘어난다.
고위 마법진을 보면 큰 원 안에 작은 원들이 여러 개 들어간 형태가 많이 보이는데, 모두 2공정 이상의 마법진들이다.
1 공정 +1 공정 =2공정 이지만, 구축 난이도는 단순히 두 배로 어려워지는 개념이 아니다.
마법이란 것은 하나의 복잡한 생태계와 같아서 공정이 추가될 때마다 덧셈이 아니라 제곱으로 구축 난이도가 올라간다고 보면 된다.
다행히 나는 바포메트와의 보스전에서 2공정 마법 체계를 순수히 깨달을 수 있었기에 개념 자체는 쉽게 이해했다.
하지만 역시 힘든 건 숙달이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1공정 마법의 마나에로우, 건틀릿, 쉴드만큼의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뼈를 깎는 연습만이 답이겠지.'
나는 쌓아둔 흰색 조끼 뒤편에 손바닥을 올리고 마법진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메인은 방열의 룬. 그리고 그 안에 작게 원을 하나 더 그리고 지속의 룬을 그려 넣었다.
두 개의 마법진이 적용되어야 하므로 수식도 더 어려워졌지만 어떻게든 '마법의 정석'을 참고해서 써 내려갔다.
그렇게 몇 번 정도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처음으로 두 개의 마법진을 결합했습니다.]
[마력이 2층가했습니다.]
[지능이 1층가했습니다.]
[방열의 마법진 -지속]
마법진 가치 : C
공정 : 2공정
분류 : 지속형
특수 효과 : 열기 저항
이해도 : 11
유지력 : 180
운용력 : 7
출력 : 5
그렇게 나는 밤을 새워가며 마법진 조끼 200장째를 만들었다.
후반부에 숙련도가 올라가 속도가 좀 붙어서, 간신히 할당량의 삼 분의 일까지 채울 수 있었다.
하룻밤 만에 600장은 무리다. 남은건 현장에서 처리하기로 하며 힘겹게 눈을 붙였다.
* * *
다음 날 아침.
새벽 시외버스를 타고 여주에 도착했다.
나루터가 있는 한적한 강가 근처였는데, 주차장에는 차들이 쫙 깔려 있고 입구부터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총각! 방어구 안 필요해?"
"장비 좀 보고 가! 이게 다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여!"
"던전 필수품 보고 가세요!"
주위에 엄청나게 많은 노점상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매운 닭꼬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길거리 음식부터 시작해서 각종 장비까지 없는 게 없었다.
'던전이 아니라 어디 시장바닥이라도 온 것 같네.'
던전이 열린 주변에 노점들이 쭉들어서는 진풍경은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아주 흔한 일상이 되었다. 나는 부담스러운 노점상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빠르게 길을 가로질러 걸었다.
'공용화장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메신저로 진보라에게 어디쯤이냐고 물었다. 다 와 간다는 답변과 함께 동물 캐릭터가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이모티콘이 돌아왔다.
적당히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부우우우웅!
고급스러운 검은색 BMW가 좁은 길을 통과해서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차 문이 찰칵 열리며 젊은 운전자가 튀어나왔다.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외제차라……. 흥미가 생겨서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열어준 조수석에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쟤가 저기서 왜 나와?'
다름 아닌 진보라였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남자와 함께 트렁크로 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짐들을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태워주셔서 감사해요! 오빠."
"아냐, 아냐. 나도 가던 길이었는데 뭘. 이번 던전 출장도 몸조심해."
"오빠도 안전 운전하세요!"
부우우우웅!
BMW는 왔던 길로 돌아갔다. 진보라는 떠나는 차를 보고 한참을 손을 흔들다가 이내 식은 표정으로 돌아서서 '중고 똥차 가지고 되게 생색내네.' 하고 중얼거렸다.
"왔어?"
"꺅!"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보았다.
"노, 놀랐잖아요! 선배님!"
"또 남자 꼬셔서 차 얻어 타고 온거야?"
"꼬시다뇨!"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꽥 소리 질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만…… 너 그러다 언젠가 큰코다칠지도 모른다?"
"후후! 걱정 마세요. 저도 지킬 선은 다 지킨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어장이라는 거야, 이 아가씨야.
"암튼 어제 말씀드린 대로 다 준비해놨어요!"
내 시선이 그녀의 준비물 더미로 향했다. 배너 현수막에, 이동식 천막에, 풍선에, 심지어는 춤추는 바람인형까지.
"……어디 행사 뛰러 가니?"
"귀엽죠? 기왕 준비하는 거 철저하게 하면 좋잖아요."
그녀가 바람 빠진 인형을 얼굴 옆에 들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다 좋은데 그거 바람은 어떻게 넣어?"
"선배님이 불어주시겠죠."
"……."
"자, 자. 들어가자고요!"
우리는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던전을 향해 이동했다.
사방에 통제선이 처져 있고 무장한 헌터, 경찰, 그리고 협회 직원들이 플레이어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협회 정복을 차려 입은 여성 직원이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5분 후에 입장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디 놀이동산이라도 왔나?
내가 상상했던 긴장감 넘치는 던전의 느낌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뭐, 저 랭크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필드 던전은 원래 이런 게 맞겠지.
나중에 상위 던전 정도는 가야 이제 내가 꿈꾸는 상황들이 연출되리라.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고, 하늘에는 군용 헬기들이 두다다다 소리를 내며 떠다니고, 던전에 들어갈 길드원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모으며 '이번에도 반드시 살아남자!'하는 대사를 주고 받는 그런 장면들.
지금의 내 성장 속도라면 그런 던전에 가는 것도 먼 미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입장하시겠습니다!"
나와 진보라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
허공에 생긴 큼지막한 균열, 그 안에서 블랙홀같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던전의 입구.
긴장감 없이 농담을 주고 받던 사람들도 그제야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기다리니 금방 우리 차례가 되었다.
"출입 허가증을 보여주세요."
협회 직원의 말에 우리는 아카데미 학생증을 꺼냈다.
아직 프로 헌터가 아닌 플레이어들은 몬스터 사냥을 허락받는 '가면허'를 소지해야 한다. 우리는 학생증으로 그 가면허를 대신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분들이셨군요. 확인되셨습니다."
몇 가지 간단한 추가 절차를 거친후, 우리는 앞 사람들을 따라 던전의 검은 포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
포탈 안으로 들어오니 주위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면은 구멍이 숭숭 뚫린 시커먼암석이었다. 곳곳에 흐르는 강은 누런빛이었고 달걀 썩은 것 비슷한 유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용암굴이구나.'
갑자기 몸이 근질거렸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사냥 때문에 온 게 아니다.
목표 금액 채우면 남은 시간에 사냥 좀 하다 가지, 뭐.
"그럼 시작할까요?"
"그래."
먼저 이동식 천막을 펼쳐서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다음, 현수막을 위에 달았다.
저런 건 또 어디서 출력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열기 저항 장비30% OFF!' 라고 적혀 있었다.
"……30% 할인?"
"헤헤, 진짜 할인하는 게 아니라도 저렇게 숫자가 들어가면 눈에 확 띈다고요! 그냥
'열기 저항 장비 팝니다!' 하면 너무 심심하잖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네.
이어서 우리는 천막 주변에 준비해온 배너를 주변에 설치하고, 테이블위에 내가 작업한 열기 저항 옷들을 쌓아두었다.
"인간적으로 바람 인형은 하지 말자."
"왜요! 이게 하이라이트인데!"
"너무 분위기가 산만해지잖아."
"그래도 시선은 확실히 끌어준단 말이에요!"
"이런 거 안 써도 충분히 시선은 끌려. 던전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우리 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아도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 몇몇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했다.
"선배님! 저 잠깐 뒤쪽 배너 위치만 바꾸고 올게요."
"그래."
진보라가 사라지고 나는 홀로 천막에 남았다. 던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한 번씩 이쪽을 보고 지나갔다.
와, 이거 장사를 하긴 해야겠는데…….
생각보다 좀 민망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장사나 영업같은 걸 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나? 장비 팝니다? 장비 사세요? 아니 무슨 시장통도 아니고, 장비 보고 가세요? 아까 노점상인들이 어떻게 말했더라.
"뭘 파는 건가요?"
그때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먼저 다가와 주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용암굴의 열기를 막아주는 장비들을 팔고 있습니다."
"뭐 냉기팩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아이템입니다."
요즘 '아이템'이라는 말은 '지구의 물건이 아닌 이계의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으로 쓰인다. 질문한 사람의 파티원이 뒤에서 나타나 말했다.
"그냥 냉기팩 같은 게 5만 원이나 할 리가 없잖아. 아이템이겠지."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인가요?"
일단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데에는 성공한 듯했다.
"두 시간 동안 용암굴의 열기를 완전히 막아주는 효과입니다."
웅성웅성.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반응이 좋은 것도 당연하다. 이 용암굴에서 가장 까다로운 건 역시 열기다.
후기를 보니 10분만 몬스터를 사냥해도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르고, 거기서 30분쯤 지나면 체력과 컨디션에 직접적인 악 영향이 오기 시작해서 사냥을 멈춰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무리해서 한 시간씩 사냥하다 보면 픽픽 쓰러져 나가겠지.
그래도 용암굴의 사냥 효율은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딱 하나, 필드에서의 열기가 문제인데, 그것만 막을 수 있다면 입장권 본전과 마정석 수익을 생각해 5만 원 정도 지불하는 건 크게 아깝지 않으리라.
나도 천 원짜리 천 쪼가리를 5만 원에 팔아넘기는 거니까 압도적인 이득이고.
"그런데요."
눈이 길쭉하게 째진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이거 제대로 된 물건 맞아요?"
"……네?"
"두 시간 동안 열기를 막아주는 아이템? 들어본 적 없는데요."
그 옆 사람도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테이블에 놓인 옷을 들어보았다.
"좀 이상하긴 하네. 이런 게 정말 열기를 막아준다고? 아무리 봐도 그냥 흰 티 같은데."
"정확히 두 시간 동안 유지된다는 보증이 있습니까? 어떤 몬스터의 부산물로 만들었죠?"
사람들의 시선에 불신이 섞이기 시작했다.
흐음, 곤란한데.
품질은 자신 있지만, 사람들은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일부러 던전 안에 들어와서 물건을 팔기로 계획한 건데, 이걸로는 모자란 듯했다.
내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환불조건을 거는 방법도 있고, 몇몇 사람에게는 무료로 제공해서 소문을 퍼뜨리는 방법도 있다. 어떻게 할까.
"선배님! 무슨 일 있어요?"
그때 소란을 본 진보라가 쪼르르 달려와 복귀했다. 내가 상황을 설명해 주자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보증이 있죠."
"……뭔데요?"
"저희는 헌터 아카데미 학생회에서 나왔습니다."
그녀가 아카데미 학생증을 당당히 내밀자, 눈 째진 남자가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진보라를 바라보았다.
"협회장이 직접 세웠다는 그 아카데미 말하는 거 맞지?"
"나 거기 지원했다가 떨어졌는데."
"게다가 학생회 애들이래."
진보라가 방긋 웃으며 청산유수처럼 설명을 늘어놓았다.
"실은 아카데미 연구회에서 개발한 시제품이 출시를 앞두고 있거든요! 내부 테스트는 모두 끝났고, 이제 저희 학생회가 직접 던전에 나가서 소비자 반응을 보기 위해 시판하기로 했어요."
진보라 녀석, 명색이 학생회 소속이면서 학교 이름을 팔 줄이야…….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한국 헌터 아카데미라는 말에 사람들의 신용이 확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하긴, 사기꾼들이었으면 던전에 직접 들어와서 팔지도 않았겠지."
"효과는 확실한 거죠?"
"물론이죠! 아카데미에서 보증하는 상품이니까요!"
진보라가 그렇게 말하며 내 쪽으로 눈을 찡긋해 보였다.
"할인가 단돈 5만 원! 열기 던전에서 쾌적한 사냥을 시작하세요! 이거 연구비 마진도 안 남는 거라고요!"
몇몇 사람들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4장 주세요."
나는 옷을 건네주고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20장을 받았다.
조금은 기분이 얼떨떨했다. 이걸로 진짜 돈이 벌리긴 하는구나.
"200장 한정 판매 중이에요! 네에! 감사합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진보라가 앞에 나서서 영업을 하고 내가 계산을 맡았다.
진보라의 영업 수완은 탁월했다.
일단 그녀는 앞에 나서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달콤한 목소리, 부담스럽지 않은 시선 처리, 발랄하면서도 신뢰감이 생기는 분위기 연출까지.
남자들에게 써먹는 기술을 총동원해서 손님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물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아카데미라는 이름값을 믿고 구매하는 사람들.
아직 저게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며 구매를 망설이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고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 맞죠? 던전 입구에서 열기 저항 장비 판다고 들었는데요!"
"학생들! 그거 재고 얼마나 남았어?"
소문은 빨랐다.
내가 만든 열기 저항 장비를 입고 쾌적하게 사냥을 하는 사람들의 소문이 퍼지면서 필드에서 사냥 중이던 사람들까지 대거 몰려온 것이다.
순식간에 100장이 동났다.
별다른 재룟값 없이 수익 5백만 원이 내 주머니에 꽂혔다.
"저희 또 왔어요!"
"이런 걸 학생들이 어떻게 만든 거야?"
"내일도 올 거니까 넉넉하게 사두자."
그리고 한번 열기 저항 장비를 써본 사람들은 크게 만족하며 나머지 물량을 확보하고자 했다.
세상에, 떨이로 구매한 천 쪼가리에 내 마나 쪼금 부여한 2시간짜리 인스턴스 마법진이 5만 원에 팔리고 있다. 이게 바로 창조경제라는 건가?
"선배님! 이럴 때가 아니에요!"
"응?"
"계산도 제가 할게요. 여기서 물량 더 만들어요! 어서요!"
마법 장사가 너무 잘 된다.